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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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염창권 

 

 

 

 

 

현대시조에 나타난 슬픔과 애도의 형식

— 슬픔의 기표: 구멍 뚫린 타자

   

 

 

   

슬픔이란 ‘온전성을 지향하는 데서 오는 그리움’이라고 정의할 때, 현존적 조건에서 온전성의 결여를 인식하거나 발견함으로써 ‘슬픔에 빠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여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다. ① 인간적인 조건으로서의 근원적 결여와 ② 이미 존재하던 것의 상실로서의 결여, 그리고 ③ 주체의 좌절된 경험으로서의 결여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의 경우는 유한자인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동경에서 발견되므로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는 슬픔이다. 이에 비해, ②와 ③의 경우에는 사회 환경적 조건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여’를 비켜 갈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그 기대가 배반 되는 상황에서 ‘슬픔’이 야기된다.

    

슬픔의 기표 : 구멍 뚫린 타자  

 

온전한 실존을 지향하는 주체나 타자는 애착 대상을 상실하거나 목표 추구의 과정에서 좌절을 겪게 됨으로써 실존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 그리고, 그 결여의 구멍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통하여 슬픔의 주체가 드러나며, 그 고통의 신호를 통해 ‘슬픔의 기표화’가 진행된다.

한편으로 타자 지향적인 면에서 슬픔에 동참하는 감정은 동정적이지만, 그 슬픔은 자신에게 돌려지는 방식으로 재귀성을 갖는다. 이로써 타자의 슬픔이 자기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나 라캉의 도식을 빌려오면, ‘구멍 뚫린 타자’를 통해 그의 결여를 인식하게 되고, 역으로 타자의 구멍을 통해 나에게 뚫려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는 눈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타자에게서 발견하는 구멍  

   

다음 시에서 “다후다 이불”은 소시민적 삶에 대한 환유이다. 화사하게 프린트된 ‘다후다’의 색감은, 수실로 거칠게 수놓아진 면포의 시대를 대체하면서, 가볍고 밋밋한 질감과 함께 쉽게 불구멍을 내던 근대적 생활 양식의 표상이 되었다. 그런 이불 속에서 식구들은 체온을 나누고 발을 섞었던 기억이 있다.

 

   1

   2차선 국도변 민무늬 다후다 이불

   장롱이며 냉장고 이삿짐 보듬고 와

 

   순순히 자리 내어주고

   비탈 한 뼘 덮고 있다.

 

   저 남루 끌어다가 한잠 푹 자고 싶다

   누벼온 생의 이력 비록 한 줄 뿐이라도

 

   누군가 성긴 잠들을

   꼭꼭 다져 꾸려왔을,

 

   2

   수척한 가로등이 제 발등만 찍는 저녁

   도시의 칼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는

 

   뜯겨진 저 실밥들의

   무료배식 긴 행렬

③ 손영희, 「다후다 이불」 전문

 

제목인 “다후다 이불”은 우리의 누추한 삶을 표상하는 환유적 기표이다. “뜯겨진 저 실밥들의 / 무료배식 긴 행렬”에서, “다후다” 이불에 촘촘히 박힌 실밥은 무료 배식을 위해 줄을 선 노숙자로 은유된다. 도시의 변두리 비탈에 무가치하게 버려진 가구며 이부자리가 있다. 이들은 누추한 이웃들의 삶을 환기하는 환유물이자 은유적 장치이다. 즉 우리 생활에 인접한 생활용품이라는 점에서 환유로, 또한 생의 표상에 등가적인 의미로 연결됨으로써 은유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이 환기하는 생활은 곤궁하거나 누추하다. 시적 화자의 시선 또한 그러한 삶에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다가 생의 어느 순간 “수척한 가로등이 제 발등만 찍는 저녁 / 도시의 칼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는” 처지를 발견하게 된다. 생이 생을 배반한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서 도시의 비탈을 덮어주는 “다후다 이불”이라는 생의 기표가 잠입한다. 그리고 때를 맞춰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노숙을 하는 고단한 일상이 우리 몸속에 익명의 타자 이름으로 틈입한다. “저 남루 끌어다가 한잠 푹 자고 싶다 / 누벼온 생의 이력 비록 한 줄 뿐이라도”에서 생의 피로감이 폭로된다. 그들 모두가 이불속의 따뜻한 휴식을 갈구하는 섬약한 시민들이다. 여기서 생의 피로감은 무차별적이다. 누구나 쉬고 싶고, “한잠 푹 자고 싶”지만 그 순간, 자본 사회의 탈락 요인이 되며 곧 중지 명령이 임박한다. 그러므로 쉴 수 없는 곤궁한 현실이 누덕진 “다후다 이불” 한 장의 무게로 환유되면서, 줄을 선 노숙자의 행렬과 그 익명성의 거주지로서 내 몸이 “다후다 이불”처럼 눅눅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다후다 이불”은 내 몸속에 기거하는 그들의 피로한 인생과 통합되면서, 휴식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하게 된다. 다른 작품에서도 몸이 가진 부분적 징표들이 생을 환유하는 기표가 된다. 결국, 타자를 주시하던 주체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돌려지면서, 내 몸속에 거주하는 ‘익명의 가시성’을 수긍하는 방식으로 통합적 주체가 된다.

생애의 서사에서는 “서서히 풍화해 가는 / 만월 속의 구멍들(「요양원 302호」에서)”처럼, “결여”는 서서히 진행되어 간다. 그와 같이 타자나 주체나 무차별적으로 유한성을 가진 동일자이다. 이와 같은 유한성에 대한 수긍을 통해, ‘구멍 뚫린 존재자’들 간의 대화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의 다른 시 「지독한 안부」의 “신발” , 「꽃 피는 장미모텔」의 “꽃”, 「인력시장」의 “끈”, 그리고 「맨홀-버스 정류장에서」의 “가슴”, 「불룩한 의자」의 “칼금” 등도 타자성과 주체가 통합된 몸의 기표로 읽을 수 있다.

    

— 개인적 슬픔의 상호 침투성  

    

메를로 퐁티를 인용하면, “비록 나의 양손 감각이 서로 간에 일치할 수 없다고 할지언정, 이들은 마치 단일한 기관인 것처럼 서로 결합하면서 세계를 탐색할 수 있다.” 이때, 타자의 문제는 해결되기보다는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익명의 가시성’으로 우리 안에 기거하는 타자를 우리는 분리해 낼 수 없다. 대타적 자아의 방식으로, 나는 그의 뚫린 구멍을 바라보면서 그의 거울이 비추는 나의 구멍을 되비추게 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동정은 나의 결여에 대한 인식이며, 그에 투사되었던 슬픔은 재귀적으로 나의 구멍에 대한 슬픔과 동정으로 되돌려진다.

레이코프와 존슨에 의하면, ‘슬픔’은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이다. 견딜 수 없는 심적 괴로움이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된 것이 슬픔이다. 체험적인 면에서, 슬픔의 원인으로 상실이나 좌절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상실은 이별이나 죽음과 같이 애착 관계가 단절되면서, 좌절은 목표 추구가 불가능하다는 인과적 상황을 인지하면서 야기된다. 견딜 수 없게 된 상실과 좌절의 경험은, 존재감의 하락과 함께 울음이라는 신체적 형태로 폭로된다.

 

   소리로

   소리를

   감싸줄 수 있을까

 

   문틈으로 새어 나온

   누군가의 울음소리

 

   역사 내 여자 화장실

   벽면에서

   흘러내렸다

④ 김태경, 「손을 오래 씻었다」 전문

 

“역사 내 여자 화장실”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와 같은 익명적 존재가 처한 상황이다. 여기서 슬픔에 빠진 그 익명의 타자는 여성이고 시적화자 또한 여성으로서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단지 여성이라는 기표에 의한 것으로, 그 슬픔의 속성조차 여성화된 상실과 좌절의 형태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처음부터 타자 연민을 전제로 삼는다. “소리로 / 소리를 / 감싸줄 수 있을까”와 같이 타자의 슬픔에 동참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픔 ‘감싸기’가 ‘덮어 감추기’의 형태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슬픔이 공개되기보다는 내적으로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제목 “손을 오래 씻었다”와 같은 행동은 타자의 슬픔에 동참하고 연대를 이루는 기표이자 상징이다. 이로써 고립된 방에서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 고통의 무게만큼 “벽면에서 / 흘러”내리는 시간을 “오래” 함께 견디어낸다. “역사”라는 단서에 주목하여, ‘이별에 의한 상실’을 떠올리면서 ‘버림받음’의 이미지를 환기한다면 수동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지나친 단순화라 하겠다. 슬픔은 그보다도 근원적인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실존적인 증상이다.

심적 괴로움은 신체적인 증상인 울음의 방식으로 해소되거나 어느 정도는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이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라 함은, 현실적으로 슬픔의 표현을 지속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실이나 좌절의 경험이 생활의 전반에 침투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다른 시 「단역배추」의 “이름”, 「B201호의 때늦은 노크」의 “신발”, 「슬픔을 그리는 방식-빈센트 반 고흐, <슬픔>에 부쳐」의 “표정”, 「별빛의 말」의 “유리, 독백” 등은 ‘몸 주체’로 수용된 타자의 구멍들이다.

 

두 시인의 시조를 통하여 슬픔이 기표화 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③ 손영희의 「다후다 이불」은 생활의 환유물인 “다후다 이불”을 매개로 하여, 누추해지는 삶의 잔상과 마주친다. 내 몸속에 기거하는 그들의 피로한 인생과 통합되면서, 휴식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하게 된다. 다른 작품에서도 몸이 가진 부분적 징표들이 생을 환유하는 기표가 된다. 결국, 타자를 주시하던 시선은 주체인 자신을 향해 돌려지면서, 내 몸속에 거주하는 ‘익명의 가시성’을 수긍하는 방식으로 타자가 수용되며 통합적 주체가 된다.

④ 김태경의 「손을 오래 씻었다」는 익명의 존재자가 떨구는 울음 “소리”에서 촉발된 것으로, 듣기의 방식으로 시선의 주체가 된다. 구멍 뚫린 타자의 ‘슬픔’을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의 상태로 받아들이면서, 상호 공감적 주체가 된다. 타인을 시선 아래에 두지 않고도 청각적 근접성을 확보하면서, 여성 젠더가 가진 익명의 소리 죽인 슬픔을 몸 주체로 수용함으로써 몸을 통해 실현된 익명의 가시성의 상태에 이른다. 이로써 타자의 슬픔은 무차별적으로 나의 몸속에 거주하게 된다.

    

애도를 통한 사회적 연대 가능성  

   

앞의 글에서, 대상 혹은 타자에 대한 대응과 관계성이 동양적 자아의 정위(定位, schema) 방식임을 언급했다. 타자와의 관계 맺기는 ‘직접적인 / 간접화된 수준, 경험적 / 정동적 차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언급될 수 있다.

애도는, 애도하는 자와 상실된 대상 간의 관계성에 따라 ‘사적 애도’와 ‘공적 애도’, ‘사회적 애도’로 구분된다. 사적 애도는 애도하는 자가 상실된 대상과 사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이며, 공적 애도는 애도하는 자가 상실된 대상과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애도는 공적 애도가 필수적이지만 사적 애도도 포함되는 복합적인 관계로 얽혀 있다.

대상의 발견은 관계성의 기초이다. 애도는 대상의 상실에서 비롯되지만, 대상과의 관계성의 강도에 따라 애도의 수준이 결정된다. 또한 상실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이 클수록 사회적 애도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대상과 관계하는 다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와의,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사회적 애도는 모든 죽음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세월호 사건”에서와 같이 죽음이라는 물리적 상실 외에도,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도덕적 상실이 복합되었기에, ‘사회적 애도’로서 전국민적 애도 대상으로 확산된 것이다.

 

   끝내 오지 못했구나 빈 의자만 남긴 채

   와르르 무너져 주저앉은 울음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세월은 또 흐르고

 

   이름 하나 눈물 하나 아롱지는 시간들

   침몰할 수 없는 사월, 희망을 꿈꾸며

   너 앉던 바로 그 자리 꽃다발 놓아두고

 

   가끔씩 물 밖에 숨 쉬러 나왔다가

   천 개의 바람으로 세상 구경하다가

   노랗게 승천하거라 내 예쁜 고래들아.

⑤ 김영란, 「노란 고래의 꿈 — 세월호 단원고 명예 졸업식」 전문

 

제목 “노란 고래의 꿈”은 단원고에 세워진 조형물의 이름이다. 이 작품에서는 “명예 졸업식”, 조형물 “노란 고래의 꿈”을 통해 공적 애도를 상징화하고, 또 이를 통해 그들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발화자의 목소리(voice)는 공적인 추도의 음성에 해당한다. 즉, 사회 집단이 가진 목소리를 통해 공적인 추도 형식의 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적인 애도 형식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추도를 통한 상징화를 통해 사회 집단의 자의식으로 침전되지 않고, ‘넋 보내기’의 형식으로 해소됨으로써 사회 집단의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도의 의식은 죽은 자들의 인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주체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애도 주체는 구멍 뚫린 대상과의 관계에서 촉발된 것으로, 수동성에서 벗어나 문제 사건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사회적 주체로서 일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슬픔이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하고, 슬픔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고 관계의 끈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적 애도를 통하여 침묵 집단의 목소리는 정치화될 수 있다. 역으로 애도의 금지는 정치권력에 의한 침묵의 강요에 해당한다. 사회적 애도에는 수많은 정치 세력이 개입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전유하고자 한다. 갑자기 닥친 불운으로 인하여, 대상 집단은 자신의 목소리를 문화적 기표로 생산해 낼 수 없다. 다만 날 것인 상태로의 구체적이며 생생한 목소리 그 자체일 것이므로, 소통의 채널은 한정되어 있으며 언제나 왜곡된 채널이 개입한다. 따라서 ‘목소리’의 대가로, 왜곡된 시선이 만드는 권력의 기표에 덧씌워질 우려가 있다. 이 지점이 전유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무사한 판단으로 헌신하는 ‘목소리 빌려주기’까지도 거부한다면, 침묵 집단은 그대로 강요된 침묵이나 왜곡된 시선에 사로잡히고 만다.

버틀러의 말에 따라 “폭력은 최악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 ……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속수무책인 채로 양도되는 방식,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말살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을 때, 폭력은 새로운 폭력의 형태로 재생산될 수 있다. 외부자일지라도 이처럼 취약한 대상을 발견하고 그들의 고통에 진정성 있게 참여할 수 있다. 이때의 전유는 무보상의 공동체적 타자 윤리를 실천하는 방법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애도가 사회적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애도의 강도 면에서 가장 깊이 있는 관계성은 사적 애도의 형식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는 객관화된 공적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 친밀의 역사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적 애도는 지속적이며, 살아있는 주체가 있는 한 쉽게 망각 되지 않는다. 다음 두 편의 시조는 ‘세월호 사건’을 제재로 한 사적 애도의 장면들이다.

 

   아들의 생일날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교과서보다 만화책을 좋아했던 아들을, 공부보다 게임을 좋아했던 아들을, 밥 먹는 시간 대신에 자겠다는 아들을, 대학 안 가고 돈 벌겠다는 아들을, 바닷속의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들을, 비 오는 밤바다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들을

 

   이제는 보내야 하는

   눈 붉힌 노을이 된

⑥ 이송희, 「문득」 전문

   

   1.

   마지막

   이란 말,

   이젠 널 잊겠단 말,

 

   새벽부터 몸부림치며

   영혼마저 흔들던 바람

 

   흰 국화 빈 관에 놓는

   노모의 마른 눈물

 

   2.

   기타를 좋아했지, 운동을 잘했지,

   제주로 이주 중이었지, 천생 선생이었지,

 

   이 세상 마지막 인사

 

   사랑한다

 

   미안하다

⑦ 김영란, 「너 없는 봄 — 세월호 마지막 장례식」 전문

 

⑥, ⑦의 작품은 사적 애도의 장면 중에서 “엄마 / 노모”라는 기표에 집중한다. ⑥에서 시적 주체는 학생의 엄마이고, ⑦은 교사의 노모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자신의 내밀한 고통을 가독성 있게 전체 대중을 향하여 공개하지 못한다. 시에서의 목소리는 퍼소나의 역할을 한다. 시인은 퍼소나를 통해 “엄마 / 노모”의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껴입거나 발설한다. 고통에는 목소리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에게 목소리를 빌려주었을 때, 고통은 타인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목소리 빌려주기’는 이와 같은 차원에서 전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⑥에서는, 지극한 엄마와 아들 간의 관계성을 관찰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애도의 현장을 목격자 시선으로 들려준다. “교과서보다 만화책을 좋아했던 아들을”에서 연속되는 것인, 평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을 비로소 긍정하며, 그리워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그가 가진 기억을 반추한다. 그러나, 시선의 주체는 그들의 내부까지 스며들지 못한다. 초․중장에서, 목소리는 “엄마”의 기억과 행동을 초점화한다. 이를 통해, 엄마가 가진 상실감이 구체화,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종장에서는 “이제는 보내야 하는 / 눈 붉힌 노을이 된”과 같이, 초점화된 시선을 거두고 소모된 시간적 상황에 집약된다. 이처럼 그들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면서도, 목소리를 빌려오지 않는 거리두기는 현대시조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타자 응시의 방식이다.

⑦에서 1과 2의 두 수를 독립적으로 구획한 것은, 1에서의 시선이 ⑥의 시와 같이 ‘타자 응시의 지점에서 논평적 거리두기’의 방식이고, 2에서는 “노모”의 목소리를 퍼소나로 한, ‘목소리 빌려오기’이자 기억의 현재화이다. 즉, 1은 “노모”에 초점을 맞춘 제한된 관찰자 시점이라면, 2는 “노모”가 목소리의 주인공인 일인칭 시점이다. 1에서 “마지막” 상실이 진행되는 장면을 객관화시켰다면, 2에서는 그 상실의 주체인 목소리를 빌려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2에서 진행된 이별 의식이 다소 성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공적 제의로서의 마지막 “의식”이 심리적으로도 “마지막”이라고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유의 경우에는 사건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주체의 목소리를 직접 껴입을 때 목소리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젠 널 잊겠단 말” 혹은 “이제는 보내야” 한다는 말의 불가능성이 사회적 애도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⑥, ⑦에서 사회적 애도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이나 논평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타자 이해와 관련하여 객관화된 시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정이나 보편성의 추상 속에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의 구성적 성격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앞의 세 편 시조를 통해서 공적, 사회적 애도의 방식 면에서 “목소리 빌려주기”의 제한점과 위험 요소를 살펴보았다. 각각의 작품이 거둔 성과와 함께 극복해야 할 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전유의 성공 여부는 방법적인 측면뿐 아니라 인식력의 깊이와도 관련되어 있다.

 

   나의 외부적 위치(나의 ‘외재성’)는 나에게 그(녀)의 전체를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동시에 나는 타인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타인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의 조건을 결정한다. 인간의 사회적 성격은 그(녀)의 도덕성의 기초가 된다. 동정이나 보편성의 추상 속에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의 구성적 성격을 인식하는 데서 그렇다.

 

위의 인용에서 미하일 바흐친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타자의 ‘밖’에서 위치하는 “나의 외재성”을 강조한다. 이로써 나는 타자에게 스스로 다가가 주시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상호 동등해질 수 있다. 고통을 받는 타자에 침투해서, 주체의 목소리에 함몰될 때 슬픔은 주관화되어 과장될 우려가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왜곡하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분리된 자아가 외재적인 타자의 시점에서 본래적 자아를 바라볼 때 자기 이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상호주체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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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권  l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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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호(VOL.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