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재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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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들의 풍찬노숙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가네”
(조용필, 〈고독한 러너〉 中)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놈을 막다른 골목에서 만났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녀온 후로 저녁부터 열이 나고 기침을 하길래 밖에서 춥게 놀아 감기에 걸린 줄 알았다. 다음날 어린이집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열 명쯤 되는 아이들이 똑같은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연락을 취하여 검사를 받았다. 이튿날 코로나 양성이라는 문자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이주 전 일이다. 이삼일 후 나도 감기 기운을 느끼고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직감하고 검사소에 가서 검사를 받은 후 바로 작업실로 향했다. 자가 격리를 하더라도 작업실에서 할 요량이었다. 막바지 작업만 남겨두고 있는 4년 만에 나오는 음반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양성 통보를 받고 기다렸다는 듯 근육통과 콧물 기침 두통을 동반한 감기가 온몸을 적셨다.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무얼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질 않았다. 예정보다 늦어지는 음반 작업에 마음은 급한데 일어나면 몸이 쑤시고 아파 자꾸 눕고만 싶었다. 행여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이대로 멈춰버린 음반 작업을 영영 끝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절망과 불안도 수시로 몰려왔다.
꿈을 꿨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꼭 그런 희뿌연 사막을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열심히 걷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듯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꿈이다. 딛고 선 자리가 늪이나 고무처럼 질척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딱딱한 땅인 것 같기도 하다. 물속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그곳에서 도망가려는 듯 발을 구르지만 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땀에 젖어 깨곤 하는 그 꿈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꾼다. 심하게 몸살을 앓는 날은 여지없이 이 꿈이 등장하곤 했다. 이생과 저 생의 중간 지대쯤을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어둡고 좁고 탁한 어머니의 양수 속에 웅크리고 있던 태아 때로 다시 돌아간 느낌 같기도 해서 묘한데 이런 날은 삶과 죽음이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을 꾸듯 그렇게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렇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니겠다.
영상 통화를 했다. 나도 나지만 함께 코로나를 앓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어 수시로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씩씩하게 잘 버텨주고 있었다. 영상 전화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흡사 나희덕 시인의 「불 켜진 창」에 나오는 장면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창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섦"도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의 아득함"도, "내가 없는 세상의 온기 또는 평화"도 말이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ㅡ 김사인, 「노숙」 전문
가만히 떠나도 좋을 것 같은 아늑함마저 느껴진다. 숨 쉴 ‘식’ 자를 써서 편안하게 숨을 쉬는 상태를 ‘안식(安息)’이라 하니 ‘영원한 안식’은 살아있는 것들이 불완전한 ‘안식’을 끝내고 영원한 쉼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겠으나, 육체와 분리되어 호흡이 필요 없는 상태임에도 평안하게 숨을 쉬는 존재로 영혼을 인식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살고 죽는 일이 숨을 쉬듯 그렇게 자연스럽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 버스처럼 가까이 있는 것이라면, 나 없이도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는 식구들을 바깥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내 몸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일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겠다. 나로 인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나’라는 주체를 지우고 나면 온 세상은 그저 객체일 뿐이니 스쳐가는 길거리 노숙자와 내가 무엇이 다르랴. 아니 우리 모두는 지구를 빌려 잠시 노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울면서 와서 웃고 떠들고 영원히 살 것처럼 폼을 재다가 쥐죽은 듯 잠들어 먼지처럼 사라지는 긴 긴 노숙을.
나를 일으킨 건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나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숙명 같은 일들 혹은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어이없게도 식욕이었다. 사나흘 앓고 나니 먹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매콤한 라면이 당겨서 이것저것 야채를 썰어 넣고 끓였다. 라면을 먹더라도 되도록 몸 생각해서 당근, 양파, 콩나물 등의 야채를 있는 대로 집어넣고 끓이는 내 평소의 습이 아픈 중에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조금 독한 감기 몸살을 앓았을 뿐인데 누워서 이생의 저편까지 넘겨 짚어보던 한없이 나약한 나와, 천 원짜리 라면 하나에 세상 살 것처럼 행복해하고 있는 나는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겠노라고 떠벌리던 내 입과 틈만 나면 폰으로 재밋거리를 뒤적이는 내 손가락은 또 같은 몸이란 말인가.
노래는 육체의 영역에 해당하고 작곡은 정신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이 둘을 병행하는 일은 불행에 가깝다. 어느 한쪽에만 전념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느 한쪽은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나에게 작곡을 잘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래를 잘한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어림없는 일이다. 그저 지나가는 풍문으로나 들을 일이다. 작곡도 어려울뿐더러 노래는 더 어렵다. 특히 녹음을 하는 일은 꿈에서도 되풀이되는 어떤 악몽처럼 느껴진다. ‘천의무봉’이 아니라 ‘일의무봉’쯤만 되어도 좋겠다. 꿈꾸는 기준의 근사치에 닿기 위해 한 소절 한 소절 이어나가는 일은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그래도 이태쯤 이어온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음 달 초쯤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해산의 고통 이후에는 육아와 양육의 긴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낳은 새로운 노래들을 알리러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는 이 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코로나로 일주일쯤 강제 휴식을 당하였으니 이제 슬슬 움직여볼 일이다. 의지를 앞세운 ‘생의’라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게 배운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것, 하늘의 별과 달을 볼 수 있는 것,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것,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 등 모든 것이 감사한 일투성이였음을, 의자 위로 조용히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고마운 일이었음도. *

신재창 I
작곡가, 가수. 〈국어 교과서 아름다운 시노래 음반1〉, ‘노래로 만나는 시’ 연작인 〈눈 온 아침〉 등 6장의 음반, ‘삶의 시, 삶의 노래’ 연작인 〈김포행 막차〉, 자작곡 음반 〈길〉, 시노래 베스트 음반 〈조곤조곤 시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매월 시인 초청 〈수요시콘서트〉 등을 열어오고 있으며,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노래 동인 ‘시노래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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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