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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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천수호 

 

 

 

 

툰드라, 툰드라, 이렇게 발음해 보면 튼 들아, 튼 들아, 이런 애처로움이

ㅡ 알래스카, 그 극지를 달리며

 

        

   

 

   노란 점선으로 된 중앙선의 2차선 도로를 달린다. 날씨가 흐리다. 맞은편 차선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나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끝이 없는 툰드라의 길. 숲 사이로 자주 호수가 보이고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철길도 가끔 보인다. 이정표 뒤로 텐느강이 흐른다. 집이 듬성한 마을이 보이고 오래 켜지지 않은 것 같은 가로등이 보인다. 길고 짧은 가시 같은 나무도 박혀 있다. 죽은 나무의 유골인 셈이다. 그 사이로 전선이 있고 전봇대가 있다는 건 이미 이곳은 인간의 땅이 돼 버렸다는 인간의 영역표시다. 

  클래식 음악의 음량 데시벨 그래프처럼 나무는 먼 들판을 배경으로 진폭이 들쭉날쭉하다. 하얀 수피가 자작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뾰족한 우듬지가 가문비라는 이름을 쓴다. 가문비나무 꼭대기에 비를 내리게 하는, 간지럼을 주는 손이 있는 것처럼, 거기 걸쳐진 안개는 비를 쉽게 데리고 온다. 그러나 이곳의 그 어떤 것도 원래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의 ‘자연’이라는 말은 ‘질서’에 더 가깝다.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질서, 외길과 두 숲의 갈라짐의 질서, 산과 강물과의 거리의 질서…….

  작은 호숫가에 잠깐 차를 세웠다. 말라가는 분홍바늘꽃과 뽀리뱅이 그리고 여전히 배경이 되는 숲이 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뒤적거렸다. 할 일이 없을 때 어린 시절에 했던 일과 똑같다. 헬기 모양을 닮은 돌 하나를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치 이 툰드라를 모두 싣고 이륙할 것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툰드라의 숲들, 저 숲에는 지금 어떤 소리가 지나갈까. 싸르락거리는 바람 소리일까. 무슨 들짐승이 낮잠에서 깨는 소리일까. 그 어떤 소리가 들릴지 모르지만, 이 툰드라를 받아 적는 일은 그들의 입에 귀를 더 깊이 꽂아야 가능한 일. 빨대 대롱같이 긴 이어폰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집중하는 소리는 달리는 차 바퀴 소리 뿐이다. 일행들의 웃음소리, 떠들썩한 얘기 소리, 이런 것들은 모두 나를 외롭게 하는 것들이니까. 어쩌면 나를 외롭게 하는 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그 자리인 시 쓰기의 실패가, 가도 가도 툰드라인 이 여정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제 시를 발전시켜 보려고 오만 노력과 몸부림을 해왔던 것이 시를 망쳐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그러니까 참 허망하고 허망한 짓이었지요. 하지만 시가, 그리고 시 쓰기가 본래 그렇게 실패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실패하지 않는 시가 어디 있겠어요. 시 쓰기는 늪 속의 허우적거림처럼, 사막에서의 제자리걸음처럼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은 것이고 ……

— 이성복 시인의 산문 「Q의 마지막 여정」 중에서    

 

  제자리걸음 같은 질주지만 멀리 산은 층층이 겹쳐진다. 네 겹이다. 저렇게 포갤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지? 마음은 자꾸 외투를 찾는다. 어린 가문비가 막 숲을 이루기 시작한 곳을 지난다. 어떤 연유였을까. 화재로 인해 다시 탄생한 것인지, 늪에서 육지로의 몸바꿈인지,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숲의 탄생이 경이롭다.

  이정표들을 스쳐 지나간다. 아예 낯선 곳에서는 이정표도 전혀 나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 강 이름 계곡 이름 마을 이름 그런 것이 내겐 중요하지 않으므로 무심히 흘려보낸다. 마치 감각으로 체득하지 못한 문학 이론서의 무용성이라고 할까.

  스쳐 지나는 산등성이가 파릇해진다. 어린 가문비나무가 일어서려 애쓰고 있으리라. 그들이 어떻게 이 자연을 견디고 일어서는 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산이 있으면 반드시 가문비나무가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곁으로 강이 흐른다. 물살이 세어서 상류에 소나기라도 온 것같이 엄청난 유속이다. 절개지는 잠시 공사 구간이고, 강물의 유속을 보면 낙석 구간이 이해되기도 한다.

  높은 산이 다시 시야를 막는다. 빙하도 보인다. 높고 낮음의 경계도 넓고 좁음의 경계도, 어떤 표식 없이 늘 느닷없다. 우리 절망이 느닷없듯이! 또 평화롭지 않은 물무늬를 그리며 회색 강물이 오래 따라온다. 다시 차창에 비가 뿌린다. 숲 사이에 숨어 있던 안개의 반란 같다. 멀찍이 비켜서 주던 산도 희뽀얀 안개에 싸여 있다. 여기서는 늘 산과 하늘을 혼동한다.

 

   시인으로서의 인생이 정점이 있는 산봉우리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해안 절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해요. 완성 같은 것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고 이십 대 삼십 대의 벼랑, 사십 대 오십 대의 벼랑이 있을 뿐이며, 마침내 이 몸과 마음이 소진하면 그 가파르고 위험한 벼랑이란 것도 없어지겠지요 …… 완성이란 것도 어떤 정점이 있고, 거기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산봉우리의 은유일 뿐이지요. 사실은 단 하나의 정상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봉우리들이 있을 테지요.

— 이성복 시인의 산문 「Q의 마지막 여정」중에서    

 

  차가 달리면 가까이에 핀 나지막한 꽃들은 형체도 없이 가려져 가까운 상처가 얼마나 정당한 척하는가를 보여준다. 자작의 작은 잎들은 파닥거리며 안개를 쫓았다 모았다 한다.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저기에 있을까. 달리는 차 안의 한주먹 내 몸은 계속 가라앉는다. 알래스카에서는 그리운 사람도 없다. 그리움이 풀리고 녹는 곳이다. 길가의 꽃들이 흰색이 많아질 즈음 차는 오르막을 달리고 있다. 오르막 내리막 왼 커브 오른 커브, 길은 어떤 유형을 고집할 수 없는 유연한 마음을 가졌다. 가끔 숲속에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이기라도 하면, 그 말라빠진 나무에 애도도 없이 나머지 나무들이 무심하게 푸르기만 할 때,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같은 것을 잠깐 생각하게 된다. 따라가고 싶다면서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를 붙이고 퍼질러 앉아 엉엉 울던 때가 있었듯이.

  강의 폭을 가늠하며 다리를 건너고 숲의 길이를 예측하며 숲길을 달린다. 툰드라, 툰드라, 이렇게 발음해 보면 튼 들아, 튼 들아, 이런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깊이 뿌리 박을 수 없는 동토에, 이미 튼살의 흙에, 저토록 광활한 숲을 이룬다는 건 얼마나 혁혁한 에너지가 들었을 것인가.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꺾일 때나 길의 오르막이 끝날 때, 우리는 또 모호한 세계의 한 굽이를 돌아야 한다. 그 너머의 세계는 언제나 다른 곳을 넘어다보며 꿈꾸고 또 절망하곤 한다. 숲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세 그루 나무가 마치 한 그루처럼 가깝게 서 있다. 너무 가까워 한 나무는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도 한다. 마치 가까운 사랑의 뜨거운 자멸 같다. 여기선 불이 나면 끌 수가 없어서 그냥 둔다고 한다. 저절로 불이 항복하여 꺼지거나 호수나 늪을 만날 때까지 불은 스스로 불길을 재촉한다. 새로 자란 나무여서 그럴까. 두루미 다리처럼 가느다란 자작 다리들, 굽은 나무도 없다. 그것은 타고, 죽고, 쓰러지는 나무들보다 더 애절한 호소에 가깝다.

  시도 그렇지 않을까. 빨리 불타서 소진 되거나 꼬치꼬치 말라가거나.... ‘꼬챙이 같다’ 라는 말은 툰드라의 자작나무 숲에 딱 맞는 말이다. 말라깽이 페병쟁이 소녀 같은 야리야리하고 창백한 다리, 그것이 이 숲을 이루는 가장 큰 힘이다. 이런 숲을 받아 적으려면 숲만 한 노트가 필요하다. 놀랍지도 않지만 놀라운, 사건도 아니면서 사건인 이 숲의 나날이 얼마나 많은 걸 써나가게 하나. 그렇지만 결코 이 숲의 기록도 세계의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단지 실패의 기록일 뿐일 것인가.

 

  시가 지향하는 자리, 시인이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극지’이고, 그 지점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무작정 버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다리로 쓰는 것이며, 시가 있는 자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연소함으로써 밝힐 수 있습니다. 시에 대한 공부는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이지 그곳을 이론이나 사상으로 대체하려 하면 도리어 멀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 이성복 시인의 산문 「극지의 시」 중에서

 

  타깃트나 경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마침내 첩첩 산 위에 내려앉았다. 북미에서 가장 높은 6,190미터의 매킨리봉 근처였다. 만년설로 뒤덮인 바위산, 이 비현실적인 극지! 여기서 버티라고 한다면 나를 견디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그래도 마지막까지의 나의 선택은 시가 아닐까. “시라는 것이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극지’의 산물이자 ‘극지’ 그 자체”(이성복 시인, 「극지의 시」)라 하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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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l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가 있음. 현재 명지대·단국대 강의, 《세계일보》 칼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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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호(VOL.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