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염창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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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시적 변주: 시에서 시조로
ㅡ 문인수 시인
문인수 시집 중에서 갈래 넘기에 해당하는 작품집으로는, 동시집 『염소 똥은 똥그랗다』(2010), 짧은 시를 모은 시집 『그립다는 말의 긴 팔』(2012), 시조집 『달북』(2014) 등이다. 이들 가운데 『그립다는 말의 긴 팔』에 주목하는 것은, 시와 시조가 혼재되어 있으며, 5편의 작품이 시조집 『달북』에 재수록 되었고 나머지 작품 중에서도 같은 수 이상의 작품이 시조 갈래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와 시조의 양식이 혼재된 시집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먼저 시(자유시)에서 형식적 제약 요건이 없다는 것은 시조(정형시) 형식의 참조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가곡에서 국악의 멜로디를 차용하는 것이나 그 역이 가능한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자 간에 우선순위는 없으며, 작품에 사용된 지배적 형식에 따라 그 작품의 갈래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①
섬진강 가 동백 진 거 본다.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동백 져 비린 거
아, 마구 내다버린 거 본다.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낭자하구나.
나는 그러나 단 한 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 「동백」 전문(『동강의 높은 새』)
①의 시에 나타나는 장소는 “섬진강 가”이다. 이곳에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마구 떨어지는 “동백”이 있다. 그런데 그 동백은 “비린 거”다. “비린” 냄새는 아직 생의 생생한 상태를 함의한다.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 낭자하”게 펼쳐진 것, 그것은 아프게 지나가는 생생한 젊음이 풍기는 냄새이자 고통의 흔적이다. 이처럼 “내 청춘”도 비린 거였으나 그걸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와 붉디붉다 내 청춘, /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고 반성하며,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던 젊음에 대해 자책한다.
시의 의미 구조는 전체적으로 3분절 된다. “섬진강 가 동백 진 거(현상) → 대가리째 떨어져 낭자한 비린 거(현상의 의미화) → 비명도 없이 흘러간 내 청춘(반성적 의식, 탄식)”과 같다. 이와 같은 의미의 3분절은 초·중·종장의 3단 구성을 요구하는 시조의 의미 전개 방식과 상통되는 면이 있다. 즉 이 시에 시조의 율격적 형식을 덧씌우면 갈래 바꾸어 쓰기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종결 행인 “이제 와 붉디붉다 내 청춘, /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와 같은 부분은 그 자체로 시조의 종장의 형식에 일치한다. 정황상의 설명이나 강조를 나타내는 관형어를 지우고 시조 갈래로 바꾸어 쓰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섬진강 가,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낭자하구나
㉠ 동백 져 비린 거, 내다버린 거 본다
㉡ (나는 그러나 단 한 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1)
– 「동백 b」 자유시를 시조 갈래로 바꾸어 쓰기
시조의 중장 형식에 맞추려면 ㉠과 ㉡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하나를 건너뛸 때, 종장의 의미부에 의해서 그 공란이 보충될 수 있어야 한다. ㉡의 내용은 종장인 “이제 와 ~ /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와의 의미 관계는 분명하나 공란이 협소해진다. 3장이 가진 기능과 공란을 고려하면 ㉠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 「동백」과 시조 「동백 b」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반응이 이루어질 것인가. 의미 전달 면에서는 주제를 중심으로 의미가 집중된 시조 「동백 b」가 효과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정감적’ 현실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정서적인 결을 살린 시 「동백」의 호소력에 무게가 놓인다. 이 시는 주제 의식보다는, “아, 마구 내다버린” 단명한 내 청춘에 대한 탄식과 이에 해당하는 정서적 표출이 시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따라서 정서적인 결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시(자유시)의 표현 양식이 내용과 더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시조가 가락(시절가의 곡조)에 봉사하는 노랫말의 형태였다면, 절구(絶句)나 하이쿠는 이미지 제시와 함께 의미 자체로 자립하는 시의 형태였다. 현대시조의 시작점에서 굳이 글자 수를 바탕으로 한 정형률을 강조한 점은, 후자가 끼친 형식 체험의 영향을 간과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본질적인 면에서 옛시조와 현대시조 간의 속성은 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②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전문(『동강의 높은 새』)
②의 시에서 “저 달, 소리북 하나”라고 했을 때, 달의 형상을 ‘북’의 모양으로 환기하는 것이며, 이와 짝이 되는 ‘북채’는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에서 ‘달북’을 치는 것은 봄날의 감각이다. 북채를 흔드는 계절 감각은 꽃의 폭발과 낙화를 동시에 가져오는 “선혈의 천둥”이자 생명성의 잔치이다.
지리산이 남성적 자세로 고쳐 앉을 때 섬진강은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이때 커다란 자연은 인간의 몸처럼 신체적 공간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와 같은 40대 중반의 성인이 거쳐왔을 만한 생사고락의 현장성이 스며들어 있다.
봄날 “매화 폭발 자욱한” 것처럼, 생명은 분출되고 분출된 생명은 곧바로 유한성의 극점에 꽃 피었다가 떨어진다. 꽃의 화염은 죽음을 동반한 생명의 분출이자 순간의 극한이다.
그 짧은 순간에 “동백 진 소리”를 들여다본다. 「동백 진 소리」는 시집 『그립다는 말의 긴 팔』에 수록되었다가, 시조집 『달북』에 재수록된 작품이다. 시조의 3장 형식, 4음보격 율격, 종장 첫 구의 소음보 / 과음보의 형식이 모두 일치하는 단시조 작품이다.
③
동백 져 깜짝 놀라 한 번 더 피었다.
한 번 더 피었다 그대로 징 때린
파동이, 목구멍 깊이 빨려드는 중이다.
– 「동백 진 소리」 전문(『그립다는 말의 긴 팔』, 『달북』)
③의 강조점은 “동백 진 소리”라는 시각의 청각화에 있다. 동백이 지는 찰나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청각적 이미지로 환치하고자 하는 데서 이 시의 발상이 이루어진다. 동백꽃은 땅바닥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외적인 현상을 넘어 “비명”과 같은 찰나적인 극한에 눈길을 돌린다. 이때, 절명의 순간으로서의 “동백 진 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는 것을 통해 들을 수 있어야 하므로, 파동은 징소리처럼 놀람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동백꽃의 형상과 질 때의 파동과 그 소리를 받아서 놀라 빨아들이는 붉은 입술 혹은 목구멍의 이미지가 상호 조합되면서 이미지의 파장을 증폭시킨다.”(염창권, 2018)
「동백 진 소리」는 화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지점에서 대상의 내면성을 탐구한다. “징 때린” 소리의 시각화 혹은 시각의 청각화는 현재의 순간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와 같은 ‘순간적 발화’의 양상은 현대시조 미학 혹은 단시조의 미학적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하나의 충분한 예시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문인수의 시에서 ‘동백’은 그의 시작 초기와 후기 시에 고루 편재되는 주요한 은유적 등가물이며, 시적 발상의 방식을 열어 보이는 해석소이다. 또한 그의 ‘동백꽃’은 남성적인 어법을 바탕으로 생사고락의 현장에 깊숙이 침투하여 있다. 시조 또한 시의 한 양식이라 강변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미학적 성취는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는 부분이다.
1) 종장에 해당되는 내용도 관형사절을 생략하거나 後수식구로 처리함으로써,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붉디붉은”과 같이 간결하게 바꾸어볼 수 있다.

염창권 ㅣ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1년 《소년중앙》 문학상(동시),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등, 동시집 『망치를 이해하는 방식』, 평론집 『존재의 기척』 등, 학술서 『어린이문학과 교육』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노산시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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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호(VOL.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