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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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채성 

 

 

 

 

귀뚜리 저 귀뚜리

어여쁘다 저 귀뚜리

 

 

 

 

 

  바야흐로 낙엽의 계절이다. 가을의 아이콘인 낙엽은 존재의 마침표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승에서의 존재 자체를 연장하기 위한 식물들의 고육지책이자 생존을 위한 결단이다. 추운 겨울을 딛고 일어서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한 그들만의 겨울나기 생존전략인 셈이다. 낙엽이란 단어 속에는 각양각색의 이미지들이 잎맥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억과 회한과 고독이라는 일반적인 연상 단어 외에도,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사춘기 소녀와 오 헨리(O. Henry)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고, 또 옛날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도 떠오른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메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꿈의 시체를 땅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가을의 사색을 내비쳤던 이효석은 가고 없지만 여전히 낙엽은 쌓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또 치워야만 한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를 걱정했는데, 어느새 창밖의 나무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면서 낙엽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면서 곧 다가올 겨울까지 걱정하게 만든다. 이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가을 앞에서 우리의 신체 리듬도 이성에서 감성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 二月花]”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구를 떠올리면, 봄과 여름 동안 뜨거운 열정과 충천하는 기상으로 잎과 꽃을 피우다가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하는 풀과 나뭇잎의 유언에도 귀가 쫑긋 서게 된다.

  뜨거웠던 여름에는 선선한 가을이 그리웠는데, 떨어지는 낙엽을 보노라면 짙푸르던 여름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짧고 순간적이어서 아쉬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된다고 하지 않던가. 떨어지는 낙엽이나 스산하게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똬리 틀고 있던 욕망의 그림자를 반추해내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이란 이처럼 주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가올 겨울에 대한 두려움과 적막을 이길 수 있을 만큼만 존재의 의미를 남기는 계절. 그래서 가을은 센티멘탈의 짙은 우수를 동반한다. 가을을 일컬어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생각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생각이 많아짐으로써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그동안 지켜왔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금 재정립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사람들 속에 서 있으되, 망망대해의 섬처럼 홀로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때 외로움이라는 감정에도 빠지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선천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외로움의 감정은 진화심리학에서 보면 우리의 생존율과 번식률을 증가시키는 동인이 된다. 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게 되면서 생존율을 높이고,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이성을 찾게 되고 결국 번식률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고파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한 경우에는 떠나간 옛사랑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직설적이고 시의적절하게 풀어내는 대중 가요의 노랫말들을 보면 가을의 고독과 그에 따른 우수의 감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계행은 <가을 사랑>에서 “그대 사랑 가을 사랑 단풍 일면 그대 오고 / 그대 사랑 가을 사랑 낙엽 지면 그대 가네”라고 노래했다.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또 어떤가.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 오래토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라며 헤어짐 뒤의 고독감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이처럼 가을의 고독은 얼마나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사색을 통해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어 왔던가. 그래서 우리는 가을이 되면 이길 수 없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먼 옛날의 추억을 전설처럼 되씹곤 한다. 가을이 주는 이 묘한 고독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가을은 마치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조차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처럼, 스산한 바람 소리에 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하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었다면 더욱더 선명해질 것이다. 우리의 그리움을 부추기며 가을의 고독을 심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자각이 깊어가는 가을밤을 더욱 쓸쓸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귓도리 져 귓도리 에엿부다 저 귓도리

   어인 귓도리 지는 달 새는 밤의 긴 소릐 쟈른 소릐 절절(節節)이 슬픈 소릐 제 혼자 우러 녜어 사창(紗窓) 여왼잠을 살드리도 깨오는고야

   두어라 제 비록 미물(微物)이나 무인동방(無人洞房)에 내 뜻 알 리는 저뿐인가 하노라

     

  가을은 눈으로도 오지만 소리로도 온다. 곤충들의 울음소리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미가 여름철 합창단이라면 가을밤을 적시는 콘서트 주인공은 귀뚜라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귀뚜라미의 합주 소리를 듣다 보면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고전문학 작품 속에 ‘실솔(蟋蟀)’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귀뚜라미는 그만큼 친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7월 귀뚜라미 가을 알 듯 한다”는 말을 하며 무더운 여름의 끝과 시원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로 생각했다. 중국에서도 귀뚜라미는 ‘행운’과 ‘부활’을 상징한다. 당나라 궁중에서 시작된 귀뚜라미 씨름은 중국의 고유 민속놀이가 됐다. 귀뚜라미가 ‘가을 전령사’로 불리는 것은 주변 온도에 민감한 변온 동물이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는 땅속에서 알로 월동한 뒤 8∼10월쯤 성충으로 부화하는데 이때의 기온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편, 귀뚜라미 소리를 ‘울음’이나 ‘노래’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날개 마찰음이다. 오른쪽 앞날개에 뾰족하고 오톨도톨한 작은 돌기가 튀어나와 톱날같이 생긴 줄이 있는데, 이것을 왼쪽 날개 위쪽 가장자리에 비비면서 소리를 낸다고 한다. 밤에 자주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밤의 서정을 쓸쓸하게 이끈다.

  『청구영언』에 전하는 작자미상의 저 사설시조도 귀뚜라미 소리에 깨어나 깊어 가는 가을밤의 고독을 곱씹고 있다. 표기 방식만 현대식으로 바꾼 이 시조를 지금의 우리말로 바꿔보면 이렇다. “귀뚜리 저 귀뚜리 가엾다 저 귀뚜리 / 어인 귀뚜리 지는 달 새는 밤에 긴 소리 짧은 소리 마디마디 슬픈 소리 제 혼자 계속 울어 여인의 여윈잠을 실뜰히도 깨우는구나 / 두어라 제 비록 미물이나 임 없는 밤에 내 뜻 알아줄 것은 저뿐인가 하노라”. 이는 곧 독수공방에 처한 한 여인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여기서 ‘여윈잠’은 겉잠(깊이 들지 않은 잠)을 말하며, ‘사창’은 비단으로 바른 창, 즉 여인의 방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붙어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그리운 법이고, 사랑은 이루었을 때보다 이루지 못했을 때가 더 안타까운 법이다. 비단을 창에 바른 지체 높은 여염집의 고상한 여인이라도 가을밤의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만 재우던 그리움의 감정을 조선의 여인도 저렇게 분출하는데 하물며 오늘의 여인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밤하늘의 별빛이 저리 아름다운 건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얼마나 더 아름다우려고

당신, 그리 먼가요 

— 서숙희, 「멀어서 아름다운」 전문

     

  왜 그리운 것들은 늘 멀리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욕망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투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별을 우러르는 까닭은 잡을 수 없이 아스라이 먼 거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까닭이다. 무변광대한 우주 공간을 거리로 측량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사용한다. 킬로미터나 마일 같은 지구의 잣대로는 우주 별자리 사이의 광막한 거리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초에 30만㎞를 간다고 하는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는 약 1.2초, 태양까지는 8분쯤 걸린다고 한다. 태양계가 위치한 우리은하의 지름만 해도 약 10만 광년 수준이고, 가장 가까운 이웃 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도 약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는 햇빛은 8분 전에 태양을 떠난 빛이고, 맑은 가을밤 하늘을 흐르고 있는 은하수의 푸른 별빛들도 최소 몇만 년 전의 것이란 얘기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그리움의 근원에 닿으려는 간절한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에 따라 감성의 촉수가 예민하게 자라나고 상상력의 파장도 넓어지고 커진다. 그리운 것들은 먼 곳에 있어서 아련한데,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은 멀리 어딘가에 그리움의 근원이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다. 서숙희 시인만은 그 아련한 그리움의 실체를 알고 있는 듯하다. 별처럼 멀리 있는 ‘당신’은 그래서 별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답기 때문에 더더욱 보고 싶은 것이다. 보고 싶다는 것은 곧 그만큼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멀리 있는 존재를 놓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직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그리움의 시간에 닿아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찬바람 일어나는 가을에도 따뜻하고 보드라운 봄날일 것이다.

    

찡긋

눈웃음치며 젊은 사내 말 건네자

앳되 뵈는 아가씨들 뭐 그리 우스운지

손으로 입 가렸지만 까르르 터진 웃음소리

 

뭔 영문인가?

솔깃하여 새들은 조잘조잘

수천 장 이파리들 손사래 치듯 넘실넘실

추파는 사람에게만 던지는 게 아닌가 봐

 

추파(秋波)

가을 물결이라, 참 어여쁜 말이네

"헤이~ 이봐!"

내게도 추파 던질 사람 없나요?

나 또한 휘파람 불 듯

아! 하는 탄성으로… 

— 노영임, 「추파(秋波) 던지다」 전문

      

  귀뚜라미 소리가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가을밤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다. 특히 처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1악장은 누구든 가을 호수(또는 강)에 비치는 달빛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가을의 호수는 ‘추파(秋波)’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추파’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며[魯郡東石問送杜二甫]」의 “가을 물결은 사수로 떨어지고[秋波落泗水], 바다 빛은 조래산을 밝히는구나[‌海色明徂徠]” 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여인의 맑고 반짝이는 예쁜 눈빛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울긋불긋한 단풍의 반영(反影)을 통해 다채로운 색깔로 치장한 가을 물결의 유혹을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은근히 보내는 눈길’로 의미가 확장 변환된 것이다. 이백은 가을날의 정경을 추파라고 노래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추파를 보내고 받으면서 설렘과 기대의 느낌까지 더하고 있는 것이다.

  노영임 시인의 「추파(秋波) 던지다」를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이 시조에서는 ‘젊은 사내’와 ‘앳되 뵈는 아가씨들’이 서로 추파를 주고받고 있다. 그들의 “까르르 터진 웃음소리”는 ‘남녀 간의 희롱은 보장 없는 섹스에 대한 약속’이라고 했던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말을 되새김하는 것 같다. 이를 듣고 있던 “새들은 조잘조잘”하고, “수천 장 이파리들”도 “손사래 치듯 넘실넘실” 거린다. “추파는 사람에게만 던지는 게 아닌가 보”다고 인식하는 시인의 눈썰미가 이채롭다. 그리하여, “내게도 추파 던질 사람 없나요?” 라며 시들어가는 자신의 젊음을 탄식하고 있다. 태양의 열정과 초록의 순수가 지쳐 낙엽으로 뒹구는 가을날의 비애 같다고나 할까. 명랑함 속에 깃든 우수 어린 눈빛이 이 가을의 분위기를 한층 센티멘털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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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l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메께라』,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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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