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최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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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생일
최휘
아, 찬란해
나는 이 세상 최초의 열매
나로 인해 빨강이 생겨났지
온 힘으로 매달려 중력을 거부해 보았어
거부하느라 얼마나 빨개졌는지 몰라
빨강 전구들이 일제히 불을 켠 양지 언덕
빨강 사과 하나
빨강 사과 둘
빨강 사과 셋 넷……
엄마는 동생을 낳고
햇빛은 사과를 낳고
사과는 빨강을 낳고
저길 봐 사과들이 태어나고 있어
끝없는 빨강들이 태어나고 있어
오늘은 사과의 생일,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을래
안녕하세요. 최휘입니다. 차를 타고 아주 멀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과수원에 빨간 사과들이 찬란한 시월 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걸 보고 이미 멀리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지도 않으면서 멀리 가고 싶어하는 구체적 막연함은 왜 자꾸 태어날까요?
빨간 사과 한 상자가 택배로 도착했어요. 상자를 열까요? 아니요. 설렘을 좀 더 즐겨야죠. 상자를 열자 달콤한 사과 향이 화르륵 뛰쳐 나옵니다. 커다랗고 탐스럽게 정렬된 사과들이 일제히 빨간 불을 켜는군요. 사과 상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요. 앨리스처럼. 거긴 분명 “빨강 전구들이 일제히 불을 켠 양지 언덕”일 테니까요. 천천히 스며들 듯 걸어볼게요. 여긴 분명 “이 세상 최초의 열매”이며, “나로 인해 빨강이 태어났”다고 외치는 찬란한 사과들이 사는 곳일 테니까요. “오늘은 사과의 생일” 이라는 문장이 태어납니다. 희미한 모름이 한 줌의 이해로 다가왔다면 무언가 태어난 거잖아요. 너무 평범해서 평범조차 잊고 살아가던 일상에 언니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울음이 태어납니다. 삶은 너무 얇아 쉽게 찢어질 수 있다는 한 줌의 이해를 했으니 주렁주렁 슬픔에 찬 빨간 눈들이 태어납니다. 이건 빨간 사과 한 상자를 받은 2년 후의 일입니다.
2년 전, 선생님께 받은 빨간 사과 한 상자는 양지의 언덕으로 나를 데리고 갔고, 빨간 사과를 보내주신 선생님께 보답의 시로 「사과의 생일」을 썼습니다. 선생님이 잘 쓰면 또 한 상자를 보내준다고 하셨거든요. 즐겁고 사랑스런 과제였습니다. 그때 “빨강이 아닌 사과는 어쩌라고!”하며 아오리가 슬퍼했다는 소문도 떠돌았습니다. 이안 선생님 덕분에 사과적 몽상에 빠져 「사과의 생일」을 즐겁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사과는 사과 밖으로 나온 것 같아요. 사과는 사과의 밖으로 걸어 나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나 봐요. 지금 사과는 병실의 언니 앞에 서 있습니다. 작고 강렬한 빨강을 깜박깜박 등불처럼 켜고 링거를 꽂은 언니의 이마를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아픔이 태어났다면 회복도 태어날 거예요. 언니, 얼른 일어나. “온 힘으로 매달려” 사과처럼. 쑥쑥 회복하는 건 “중력을 거부하느라 더 더 빨개”져야 하는 일이잖아. 언니, 줄줄이 매달린 언니의 동생들이 보여? 저마다 빨갛게 불 밝히고 언니를 향해 매달려 있는 거 보여? ♣

최 휘 l
2012년 《시로여는세상》 등단. 동시집 『여름 아이』, 시집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 『난, 여름』이 있음. 제10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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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