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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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2년 1월 공시사 월평 


 

 

 

 

 

변신과 죽음으로부터 도래할 미래

  

● 신수진

 

 

 

 

 

 

 바야흐로 2022년이 밝았다. 어릴 때 SF영화에서 보던 그 멀고도 아득한 미래가 지금 여기 태연히 당도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란다. 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미래는 정말 나중에 오는 시간인가. 과거는 정말 지나간 시간인가. 조그맣고 두꺼운 상자 같았던 텔레비전으로 비디오를 보면서 도무지 오지 않는 미래 때문에 안달하던 꼬마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시간에 압도된다. 때로 그것은 머릿속에서는 설계할 수 있지만 실제의 차원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 펜로즈 계단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뉴턴 물리학의 절대시간에 종언을 알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이다. 아인슈타인은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나침반을 선물 받았는데 기계적 힘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보고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고 회상한다.

 한 세기 전 우주의 차원을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조우하고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운명을 건 위대한 과학자처럼 책과 영화에 빠져 지내던 한 꼬마는 그 안에서 열리는 비밀의 시간 때문에 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역행하고 정지하고 겹치고 휘어진다. 이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호위하는 영원의 시절이고, 모든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꿈의 시간이며, 한 세계를 창조하는 실현의 순간이다.

 

 

    그것이 끝나면 애인들은 몸을 바꾸었습니다

  

    절벽 끝에 서 있던

    어린 애인들은 주로 청둥오리나 후투티가 되었지요

 

    꽤 오래 남을 엔딩이지만

    결국 날아가는 신발짝에 불과한 걸요

 

    어떤 애인은 포구 끝에서 무거운 물고기로 변했는데

    영락없이 버려진 헌신짝이었습니다

    어느 한심한 날이었죠

  

    펄떡거리고 뻐끔거리는 것은 내내 눈에 밟히라고 그럽니다만

    혀를 찹니다 짧게

    애인은 물고기를 물가로 밀어 넣습니다 이때 애인은 재치 있게 울먹입니다만

  

    애인은 애인의 아가미에서 꽃을 꺼내어 가버립니다

    숨 가쁘고 벅차오르는 그 붉은 것을

  

    애인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애인이 몸을 바꾸는 것입니다

 

    멧돼지가 수족관을 들이박은 일이 있었습니다 높은 기량을 뽐낸 그는 인두겁을 덮어쓰고 한동안 씩씩거렸습니다

    그는 동네의 간판스타가 되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되면 우리는 둥글게 앉아 손뼉을 칩니다

    앞으로 우리 애인이 될 애인이 수건을 물고 들고 우리 둘레를 뜁니다

 

    애인은 바꾸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고 밖이기도 합니다

    모두의 예상

    모두의 축하

  

    변신하는 각자의 장기자랑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총명하게 서로의 불찰을 안아줍니다

 

    부풀었던 애인이 볼품없이 줄어도

    슬기롭고 다정한 문화는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 박지웅, 「각자의 장기자랑」,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1월호

 

 

 “그것이 끝나면” 어린 애인들이 “청둥오리나 후투티”로 “몸을 바꾸”는 이 변신 이야기는 고결한 사랑의 대가로 절벽 끝에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관계에 대한 동화적 알레고리다. 물고기로 변한 애인의 “펄떡거리고 뻐끔거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혀를 차며 그를 물가로 밀어 넣는 애인은 마침내 아가미에서 “숨 가쁘고 벅차오르는 그 붉은 것”마저 꺼내가버린다. 애인을 유기하고 살해하는 가공할 모반과, 악의와 경멸을 감춘 채 울먹이는 메소드 연기는, 애인의 생명이나 인격 같은 존재론적인 본질을 영구적으로 훼손하고 모독한다.

 사랑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에서 비롯한 수직적인 서열이 이 죽음의 행렬을 계승하도록 했을테지만 애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이고 연쇄적인 공격과 살의에 구체적이고 개연성 있는 동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심장을 빼앗긴 애인들은 이미 죽임을 당했기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청둥오리나 후투티나 물고기 같은 엉뚱한 몸으로 바뀔 수밖에 없고 마침내 인두겁을 덮어쓰고 씩씩거리며 수족관을 들이박는 멧돼지가 되어 귀환한다.

 애인에게서 자신을 반영하고 정립하며 완성해가야 할 애인은 거부되고 학대받고 부정되어 인식적 측면으로서의 아이덴티티 뿐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서의 육체마저 해체된다. 이처럼 끔찍한 놀이의 희생양이 되어 제거된 애인은 더이상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기에 엽기적인 변형체가 되어 출몰한다. 타살된 후 괴물로 돌아온 존재는 자신의 변신과 부활 능력을 장기로 증명함으로써 폭력과 부조리의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고 비로소 불편한 진실을 함구하고 은폐하는 “문화”에 합류한다.

 둥글게 앉아 손뼉을 치며 수건 돌리기를 하는 이 장면은 “바꾸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애인의 변신 능력을 모두의 놀이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애인’이라는 말은 두 사람을 가리키고 있지만 한 번도 서로 다른 어휘로 지칭되지 않기에 문맥상으로 대상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배신 당하는 애인과 배신하는 애인이 어쩌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이 폭력성과 가학성은 전이되고 진화되어가기 때문에 애인과 애인은 결국 순환론적 루트 안에서 동일화된다.

 사랑이 끝나면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각자의 변신 장기자랑이 계속될 때 상실과 위선으로 “볼품없”어진 나와 너는 서로의 “불찰”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비겁하고 졸렬한 공모자가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을 내어주고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하나로 거듭나는 변증법적 사랑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복제와 증식을 위해 타자를 이용하고 통제하는 이율배반적이고 병리적인 관계만이 확장되어가는 것이다.

 

 

    미래, 라고 가만히 발음하면

    집 나간 엄마랑 고모랑 할머니가 떠오른다

 

    경제는 앞으로도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뉴스를 보며

    다 먹었니? 삼촌은 졸린 눈을 비볐다

 

    불어터진 면발만 남은 우동 그릇 앞에서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말하지 않았지

  

    그날 삼촌의 트럭은 뒤집어지고 불타올랐다

    매일 수년을 다니던 도로인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같은 것

 

    그러니 영동고속도로는 언제나 들이받고 싶은 것들로 가득해서

    아무리 우동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고

  

    쪼그라든 할아버지는 자주 울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해? 하면 자꾸만

    미안합니다 그만 용서하세요 라는 그의 앞에서

 

    저기 나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아, 하는 대신

    이제 인류는 곧 하늘을 날 수도 있다며 속삭여 주었다

    두고 봐,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먼저 갈 거야

 

    우리 집 사람들의

    이리도 한결같은 최후

 

    그리고 다 커 버린 나는 노란 조끼를 입고

    안전봉을 흔들며 영동고속도로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앞으로만 달릴 줄 알고

    그중에 집 나온 사람과 끼니를 거른 사람과

    기억을 지운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가로등, 켜지고 꺼지고 수없이 반복될 때

    어느 날에는 차에 치인 고라니를 갓길로 끌고 와 웃옷을 덮어 주었다

 

    그때 저 멀리서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속으로 그 애에게 미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조그마한 귀를 펄럭이며 이쪽을 바라보던 미래가

    이내 몸을 돌리더니 절뚝이며 멀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

 

    미래,

 

    에게,

― 한여진,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파란》 2021년 겨울호

 

 

 미래, 미래라고 발음하면 “집 나간 엄마랑 고모랑 할머니”가 떠오르는 ‘나’는 매일 삼촌의 트럭을 타고 고속도로를 다녔지만 삼촌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고 결국 혼자 남게 된다. 고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지겨우리만치 반복되고 누적되어도 결코 익숙하거나 초연해지지 않는 것 말이다. 특히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내 벌 받는 기분이 들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영동고속도로는 언제나 “들이받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고 아무리 불어터진 우동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는다.

 치매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버린 할아버지에게 “이제 인류는 곧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미래를 속삭여주는 ‘나’는 “한결같은 최후”만을 맞닥뜨리게 하는 현재를 겪고 또 겪으면서도 어느덧 어른이 된다. 그리고 로드킬 당한 고라니를 갓길로 데려와 웃옷을 덮어줄 때 멀리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새끼 고라니에게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가 멀리 “미래, 에게,” 뛰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미래가 저 혼자 깜깜한 밤을 숱하게 견뎌야 할지라도, 어미를 남겨둔 채 어딘가로 절뚝이며 떠나야 할지라도, 미래가 미래에게 꿋꿋이 나아가는 이 장면은 기필코 삶을 지속시키는 준엄한 시간과 죽음을 넘어섰을 때에만 개시되는 숭고한 미래를 준다.

 재투성이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와 눈부신 드레스가 12시까지만 유효하다. 종소리와 함께 풀리는 마법처럼 한때 찬란했던 몸과 마음은 찰나와 환상에 불과하고 고단한 현실은 퇴폐와 부식으로 누추해져 있다. 여기에는 사랑만이 능히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라고 믿었던 순진한 기대와 무서운 배반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에 박수 치는 사람들 같은 기만적인 군중심리와 부끄러운 공범의식이,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는 불운과 비극적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두 편의 시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랑 때문에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변신과,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처럼 불시에 닥쳐오는 죽음의 목도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것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애인은 애인의 아가미에서 꽃을 꺼내어 가버”리고 “그러니까 애인이 몸을 바꾸는 것”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둥글게 앉아 손뼉을 치”며 “변신하는 각자의 장기자랑”에 참여하는 “슬기롭고 다정한 문화”를 이어간다. 한편 가족의 가출과 퇴행과 죽음을 관통하면서 자란 ‘나’가 “노란 조끼를 입고 안전봉을 흔들며 영동고속도로 위에 서 있”는 모습은 어미가 죽고 혼자 살아남은 고라니 새끼와 오버랩 되면서 이들이 만나야 할 미래를 먼 길 끝의 소실점으로 연장한다.

 바흐찐이 라블레의 작품에서 발견했던 ‘축제’의 ‘비일상성’처럼 장기자랑 시간과 고라니의 제의는 미래가 된 과거와 과거가 된 미래가 조응하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우리 앞에 불쑥 전시된다. 사랑이 끝나는 시점이 사랑의 시작점으로 재설정 되는 경우, 의식의 흐름이 미래에서 과거로만 수렴되는 경우, 역방향이 아니라 속도에서 시간의 격차가 발생하는 경우 등 이 변신과 죽음의 이야기는 사랑과 시간의 변수가 시공간을 전도하고 해제하는 함수로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신과 죽음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두 편의 시는 그 통과의례의 밖으로부터 올 미래를 견인하면서 비로소 과거와 현재를 딛고 나아간다. 그것이 비록 경쾌하고 씩씩한 활보가 아니더라도 맹렬하게 말달리는 경주가 아니더라도 쓰러진 자의 낮고 느린 포복으로도 생의 나침반은 움직인다는 것. 우리가 당도하고자 하는 현실은 이토록 미약한 떨림과 진동으로도 비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그렇게 마지막처럼 다시 시작될 것이다. 시작은 다시 과거로 과거는 다시 미래로 몸을 바꾸고 죽음을 넘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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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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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