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권현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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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빛, 허기
빛이 어른거리는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다만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오래된 골목과 건물, 녹색 식물들을 따라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는 우주 생명체의 순간을 내 몸이 만끽하고 있음은 분명히 알겠다. 그런 이유로 볕 좋은 날 햇볕흡입을 멈출 수 없다. 자장면이나 찰수수 경단처럼 뼛속 깊은 허기를 채워주지는 못할지라도 어쩐 일인지 배고플수록 햇볕을 갈망하게 된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작은 실마리들을 산책하는 동안 확인하게 된다. 구시가지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이런저런 모양의 창문들에 내내 매혹되고 눈길이 머물게 되는 것으로 봐서 햇볕이 드나드는 창문은 풍경의 입구 혹은 세계의 입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햇볕은 받아먹을수록 허기가 진다. 그에 비해 자장면은 폭풍 흡입하다 보면 정신의 허기까지 채워져 기름지고도 명랑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팔순이 되어도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청을 갖고 있던 할머니를 두고 어머니는 광목 찢어지는 소리를 낸다며 핀잔하곤 하셨다. 그들 모녀지간의 애증을 읽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난 중립지대에서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살아계실 때 일 년에 한 번은 꼭 찰수수 경단을 만들어주셨는데, 그 음식의 효능을 사전에는 없는 단어 ‘골멤이’로 칭하셨다. 아마 찰진 것이 골(骨)이나 결락을 메운다는 의미인 ‘골을 메우는 음식’이 골메움으로 축약되었을 것이고 이윽고 발음하기 쉬운 골멤이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짐작하며 골을 메우는 길을 따라 가본다. 발성의 변천은 그렇다 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골을 메우는 찰 수수떡이 우리 집 밥상에서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카페 간판에 그려 넣은 나무 잎사귀에도 잠시 행복해진다. 산책은 사유를 너그럽게 확장시켜 나무 잎사귀 그림에서도 생명의 DNA를 감지하게 한다. 나무 잎사귀 시그널이 이끄는 것은 마카롱 가게, 단 것이 필요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올리브나무를 화분에 키우고 있는 마카롱 가게는 내부의 낡은 소파를 눈부신 흰 천으로 덮어씌워 놓았다. 가죽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기도 하고, 광목이든 옥양목이든 흰 천은 근원적인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의 끈질긴 생애사, 카랑카랑한 목청 같은 것 말이다. 흰 천 커버를 씌어놓은 소파와 올리브 나무와 여백이 많은 나무 액자를 편애한다.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사물과 나는 분명 혈연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빛은 알 수 없는 허기를 안고 있는 인류를 위해
끝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다
골목 깊숙이 들어설수록 애정이 가는 사물과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도시가스 배관 파이프가 붉은 벽돌 벽에 기역 자 형 회로처럼 노출되어있는 다세대 주택과 주택 사이 작은 화단에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가느다란 수형으로 웃자랐으나 여름답게 작은 잎사귀들을 풍성하게 거느리고 있는 한 그루 나무 덕분에 낡은 주택이 오래된 골목 전체가 싱싱하고 생기있어 보인다. 식물과 건축물은 서로 공명하고 감화되어 나무는 나무를 넘어서고 있고 건축물은 건축물을 넘어서고 있다. 초록은, 광합성은, 빛은 알 수 없는 허기를 안고 있는 인류를 위해 끝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다.
나무가 서 있는 화단의 낮은 담장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작은 화분들은 바로 앞 반지하 창문과 맞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반지하 소속인 듯싶다. 작은 화분에 담긴 작은 화초들이 낮 동안 골목 안쪽에 겨우 머문 햇볕을 옹기종기 나누고 있다. 응달에 나란히 놓여 있는 무해한 생명체들과 나는 실시간으로 공명하고 있다. 반지하 창문 안쪽의 삶에 행운이 깃들길 바라게 된다. 그런 마음을 저절로 갖게 되는 한 골목 안쪽에서 일어나는 숭고한 광합성 빛 그물에 걸려 나 또한 푸릇푸릇 파닥파닥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 짧은 여행의 절정은 조명 가게 앞 커다란 화분에 심어놓은 한 그루 사과나무와의 만남이다. 커다란 화분에 심어놓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놀랄 만큼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좁은 화분 속에서도 나무는 열매를 낳아 기르고 있다. 화분을 뚫고 나가 땅 깊숙이 박힌 뿌리를 몽상한 한 그루 사과나무의 허기로부터 삶을 배운다. 화분 속 사과나무의 절박한 몽상은 동네 전체로 뻗어 나간다. ‘까치 다방’으로 ‘구제 의류 샵’으로 ‘후라이드 참 잘하는 집’으로 ‘패밀리 식당’으로 ‘민생 약국’으로 ‘고향 쌀집’으로 ‘홍어와 탁주’로 울창하게 드리워진 나무 뿌리를 상상해본다. 저 홍탁 집에 혼자 앉아 피부까지 냄새가 스며드는 강렬한 맛의 홍어에 도취된다면, 탁주 한 병에 대취한다면 얼굴을 알 수 없는 모두에게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다. 처음의 삶이여, 여기까지 흘러오느라 애썼어요.
인간은 골목이다. 골목을 떠돌다 골목을 빠져나가서 이윽고 사라지지, 그런 문장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타이핑된다. 차츰 구시가지가 개조되고 골목이 사라지고 건축물이 고층화되면서 감정과 정서까지 콘크리트로 덮이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는 짓지 않을 7층짜리 단층 아파트 외벽에 저녁 빛이 새겨넣은 전봇대의 그림자마저 그리워질 것이다. 골목 안쪽에는 늘 꽃이 피어 있다. 고무 화분이든 세숫대야든 담장 위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은 꽃을 심는다. 석양을 닮은 붉은 장미의 계절이 돌아왔다. 장미는 코로 냄새를 맡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훅! 향기가 심장을 건드린다. 초여름은 말없이 장미를 바라보게 되는 나날, 바깥의 장미가 너무 아름다워 무어라고 기록해야 할지 몰라 온종일 일기를 쓴 날도 있다. 골목 안쪽에 두고 온 게 무엇일까. 장독대 위에 골고루 내려앉던 햇볕, 혀를 날름거리며 받아먹었던 깨끗한 눈발, 매일의 밥처럼 질리지 않던 맛있는 고전 소설, 눈높이에서 보이던 창문 안쪽의 따뜻한 불빛……. 아름다움에 대한 지독한 허기를 골목 안쪽에 두고 왔다. ♦
- 그동안 “권현형의 [빛을 위한 오마주]”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권현형 l
1995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2013년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아마도 빛은 위로』, 편저 『김영태 시선 초판본』, 공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ㅡ 김수영 50주기 기념시 해설집』 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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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