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재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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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길 (2)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ㅡ 신경림, 「길」 부분
‘초고음교’에 빠져 득의양양한 시절을 보냈다 부끄럽게도. 보통 노래의 카타르시스는 절정의 고음에서 나오므로 고음에 강하다는 사실은 노래의 자신감과 직결되는 일이다. 그렇게 앞뒤 분간 못하는 개구리마냥 동아리방을 강의실 삼아 이년 여를 다니다 처음 내게 기타를 가르쳐준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각자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 친구는 모 대학의 그룹사운드 ‘청림’에서 노래하며 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중고등부 태권도 선수를 지냈던 이 친구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으며, 모든 일이 쉬웠다. 그런 그에게서 훈련소에 입소했던 자신의 같은 과 동기가 간염 판정을 받고 학교로 복귀했는데 치료비가 없어 절절매니 무작정 길거리로라도 나가 노래를 해 치료비를 마련해주자 연락이 온 것이다. 전공과 나와의 괴리로 연이은 F가 성적표를 물들일 무렵 학교도 재미가 없고 딱히 다른 일도 없어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합류하게 되었다. 가장 번화가였던 은행동에 처음으로 차 안다니는 도로가 생긴 시점이었다.
열심히 알바해서 산 내 첫 클래식 기타를 들고 그렇게 친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주보고 있는 양쪽 상가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목소리가 묻히기 일쑤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불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걸어 다니며 노래 부르던 습관이 대학까지 이어져 늘 뚜벅이 생활을 하던 터였고, 차비가 없어 걷는다는 궁상맞은 사실보다는 노래 연습을 위해 걷는다는 변명이 훨씬 그럴 듯했던 시절이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한적한 곳을 찾아 걷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노래 부를 때만큼은 세상일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12월에 시작된 길거리 공연이 아픈 친구가 떠난 뒤인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졌다.
열정이라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던 그 친구가 자기 길을 찾았다며 경호원을 양성하는 대학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태권도 선수였고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그에게 딱 맞는 길이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의 용감함이 또 다른 하나의 계기를 만들고 있었다. 떠나기 한 달 전쯤 우리를 구경하는 인파 속에서 프로처럼 보이는 머리도 길고 기타를 들고 지나가는 한 무리를 발견하고는 노래하다 말고 뛰어가서 노래하시는 분이시냐고, 그럼 우리 좀 거둬달라고 대뜸 달려든 것이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피식 웃고 서 있는 그들의 표정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나 나나 딴에는 잘한다고 자부하던 우리의 얄팍한 실력을 길거리 무대에서 여실히 깨달은 뒤다. 실력은 늘지 않고 레퍼토리도 빈약한데 기타도 한계가 있어 어려운 코드는 무조건 패스했다. 신청곡이 들어오면 대충 아는 부분만 몇 소절 불러주고 웃음으로 때우기 바빴다. 그야말로 무모한 자신감으로 몇 달을 버텨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당시 길거리 공연은 우리가 처음이었기에 신기함 반 재미 반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고, 기타 케이스에 돈도 수월찮이 들어왔기에 생활비 버는 재미로 근근이 이어가던 차였다. 그런 때 친구의 못 말릴 용기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의 한 모퉁이로 접어들게 한 것이다. 때마침 그분들은 한 달 뒤 있을 공연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공연 때마다 음향 장비 나르는 일이나 기타 공연에 관계된 일에 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막내들이 들어온다니 신기하고 반가웠던지 팀으로 받아주었다. 졸지에 한 달 뒤 무대에서도 두어 곡 노래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되었다. 계란판과 부직포로 엮은 지하 연습실에서 꽁꽁 언 수도를 녹여가며 라면을 끓이던 일이나 주구장창 음향 장비를 나르던 일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대전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뮤지션들이었고, 전국 경연대회에서 상도 여러 차례 받은 경력을 가진 포크 그룹이었다. 우리로서는 소 뒷걸음질 치다 문고리 잡은 격이었지만 부담감도 또한 떨칠 수 없었다. 결국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연을 며칠 앞두고 나와 친구는 그의 고향인 춘천으로 잠수를 탔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자기의 갈 길로 가고, 나는 혼자 남아 막내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형님들은 공연장 겸 카페를 열었는데 카페 이름이 ‘귀뚜라미’였다. 내가 볼 때는 이미 완성된 뮤지션들처럼 보였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음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노래 〈귀뚜라미〉의 한 구절 ㅡ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 누구의 가슴 하나 울릴 수 있을까”하는…. ㅡ 이 얼마나 절절하게 다가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법하다. 이후 정지용, 나희덕, 김지하, 정호승 시인 등의 시노래도 내 애창곡이 되었으나 그 일이 그로부터 십년 뒤의 내 삶에 또 다른 계기를 만들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귀뚜라미’에서 연습하고 노래하며 서빙도 하고, 저녁에는 다른 카페에도 가서 노래하고 돌아오는 라이브 가수 생활이 시작된 이후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몇 년 뒤 음악을 더 배우고 싶어서 실용음악과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그마저도 중단되었다. 2001년 가을, 월드컵을 겨냥한 응원가 음반에 가수 모집 공고를 신문에서 보고 참여한 오디션에 덜컥 합격을 하였다. 나는 오디션을 정말 싫어하지만 기획자가 내가 좋아하는 ‘노찾사’ 출신이라는 기사 한 줄에 마음이 동해서 먼저 연락을 했던 것이다. 여의도에 사무실 겸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니 그리로 오란다. 나름 인간적인 이들로 느껴졌고 그들도 내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마침 해병대 제대 후 일자리를 알아보러 서울로 올라온 두 살 터울 동생이 아현동에 월세 방을 구한 터라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낯선 타지에서 의지할 수 있는 식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세상의 일이란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지만 일단 마음이 정해지면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음악을 하면서 주변의 많은 선배들의 이야기로 들어온 서울은 무서운 곳이었다. 실력도 대단하고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실력 있는 선배들이 음반 내러 서울에 갔다가 줄줄이 낙향하는 모습들도 거기에 한 몫 더했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만난 사람들은 인간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내 목소리가 그들이 원하는 방향에 맞으니 함께하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나는 포크 음악을 좋아했고 대중적인 팝포크 보다는 김민기, 한돌, 안치환, 김광석 같은 민중음악 계열의 포크를 더 좋아했다. 달달한 목소리의 상업적인 노래는 왠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오디션 때 부른 노래도 〈광야에서〉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였다. 이런 배경에는 내 성향도 성향이지만 길지 않은 대학에서의 경험도 만만찮게 작용했다. 음악에 더 열중하긴 했지만 명색이 정치학도였지 않은가. 입학하자마 민중 가요를 먼저 배웠다. 게다가 선배들에게 학습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민주 투쟁의 역사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고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군부독재의 민낯, 그리고 이어지는 5.18의 참상 등은 피를 끓게 했다. 그래봐야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데모에 참여하는 것뿐이었을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삼삼오오 모여 이 사회와 정의에 대하여 토론하고는 했다. 역사는 대표적인 사건만을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개개인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다양한가. ‘새벽’이나 ‘메아리’, ‘노찾사’ 등 당시 노래패로 활동했던 분들을 요즘도 종종 만나는데 이미 지난 일들도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그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현역 가수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교수로 있으면서 음반을 내고 시를 노래하는 분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래를 잘한다는 것. 높고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대중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소리에 속됨이 없이 진정으로 노래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떤 유명 가수들의 목소리보다 더 가슴을 울린다.
대전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형님들에게도, 몇 년을 노래하던 카페들에도 사정을 이야기한 후 작별을 고하고 친구들이며 내 청춘의 무대가 되어준 도시를 뒤로하고 서울 살이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부모님도 시골집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함께 살게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 빠지게 일해도 빚만 늘어가는 농촌의 삶, 결국 3만 평이 넘는 산과 큰 밭과 논을 빚잔치로 털고 맨몸으로 나오신 것이다. 그래도 가진 건 없어도 식구들이 함께 살 수 있어 고맙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월드컵은 4강 신화를 기록하고는 눈 깜작할 사이 지나갔다. 경기장마다 다니며 공연을 했지만 흥행엔 실패했고 7명의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다. (계속)
나 같은 것들
오봉옥
열다섯 상고머리 시절엔 풀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새벽이슬이 난 줄 알았다
스물하고 두어 살 시절엔 외로워서 슬퍼서 보조개가 깊은 가시내랑 밤새 술이나마시며 살고 싶었고
피 끓는 스물다섯 그 시절엔 조국이니 민중이니 역사니 그리도 큰 것들 어깨에 터억 걸쳐 메고 백리길 내달리는 내가 자랑스러웠지
그런데 내 나이 서른댓쯤 되어보니 돈맛도 알겠고 곱빼기 술맛이며 이런저런 권력 맛도 알겠으니
어쩐 일인가 세상 다 살았는가
아님 가슴속 저 깊은 곳 양심 꼬랑지 같은 것이 반생을 더 끌고 갈지도 모르고
지금 난 십 년 후 내 모습도 생각하고 있어.

신재창 I
작곡가, 가수. 〈국어 교과서 아름다운 시노래 음반1〉, ‘노래로 만나는 시’ 연작인 〈눈 온 아침〉 등 6장의 음반, ‘삶의 시, 삶의 노래’ 연작인 〈김포행 막차〉, 자작곡 음반 〈길〉, 시노래 베스트 음반 〈조곤조곤 시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매월 시인 초청 〈수요시콘서트〉 등을 열어오고 있으며,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노래 동인 ‘시노래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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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