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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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재창 

 

 

 

 

꿈과 길 (1)

 

 

 

 

 

“계기는 계기를 낳고 그 계기는 무수한 곁가지를 파생시킨다. 본류가 어디였는지조차 헷갈릴 때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가라앉는다.

결국 내가 좆는 것은 세상 누구도 알려줄 수 없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뿐인 나를 좆는 길이므로.”

 

*

  

  어머니는 공부를 좋아하신다. 중학교 때도 늘 일등이셨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어업조합장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형편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가사를 돕다가 스물여섯에 그래도 밥은 굶지 않고 사셨다는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할머니는 고조할아버지가 인근에서 알아주는 훈장을 지내셨다는 이야기와 목수 중 대장 격인 대목 일을 하시면서 집안을 일으켜 인근에 보이는 땅은 전부 우리 땅이었다는 증조할아버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누누이 하셨는데, 왜정시대를 지나며 할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는 어린 마음도 언제나 아쉬숨에 젖곤 했다. 급기야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부터 집안을 돌봐야 했다. 눈뜨면 논밭으로 나가서 해 질 녘에야 들어오는 삶 속에서도 두 분 모두 자신을 돌아볼 여력이 없으셨던 삶을 사셨지만 자식들 교육에는 늘 헌신적이셨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일과 속에도 틈만 나면 공부를 시키셨다. 덕분에 우리 사남매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글을 다 떼었고 어머니의 시골 삶의 유일한 희망 같던 우등상을 타서 안겨드리곤 했다. 어찌어찌 나는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고, 외삼촌댁에서 지내며 외삼촌의 기타를 만지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 날에 이르게 되었다.

  집에서는 천방지축이지만 밖에만 나가면 창피해서 말도 잘 못하는 나는 음악은 좋아했지만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집 앞 밭에서 일하실 때 늘 틀어놓으시던 아버지의 커다란 전축에서 나오는 노래와,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어디선가 거나하게 한잔하고 계실 아버지를 모시러 나서는 어머니를 따라 밤길을 걸으며 들려주시던 찬송가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할머니를 따라 오산에 있는 고모 댁에 갔는데 사촌 동생의 피아노로 처음 들었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다음 날 새벽 첫 기차로 서천 집으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는 동생을 깨워서 그 노래를 한 번만 더 쳐달라고 부탁했다. 고모와 고모부는 이 바쁜 아침에 무슨 일인가 어이없는 눈초리셨지만, 난생처음 듣는 낭만적이면서 애잔한 멜로디는 부끄러움도 잊게 했다. 그 새벽에 나는 결국 그 곡을 다 듣고서야 할머니를 따라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다. 이후로도 그 곡은 수없이 들었지만 그 새벽에 느꼈던 그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비틀즈며 퀸, 아하, 런던 보이스 등의 음악에 눈을 뜬 것이 그 무렵이었고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쉬는 날에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특별반에 야간 자율학습에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돌아오는 중학교 3년 시절을 보낸 후 낯선 타지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중학교 때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했었는데 고1 첫 시험에서 중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당시에도 이미 영어 수학 정도는 선행학습을 하고 들어온 도시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어느 하루아침에 하층민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들 끼리는 중학교 때 친구들이 대부분 같이 진학해 각자 그룹이 나뉘어 있었고 나는 쉬는 시간에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외삼촌 외숙모가 잘 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눈치가 보였고, 같이 방을 쓰게 된 4대 독자인 한 살 아래 사촌 동생마저 촌스러운 내가 어색했는지 퉁명스러운 데다가 대화는 단답형이었다. 어디 마음 둘 데가 없었다. 형편은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지극하셨던 어머니가 그립고, 티격태격해도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눠먹던 따뜻한 형제들이 내 곁에 없다는 상실감이 그렇게 큰 나락일 줄 몰랐다. 조심스럽고 불안하고 원망스럽고 모든 게 싫었다. 그때 내게 의지가 되어준 것이 기타였다.

  어느 날 우연히 친구의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는 완전히 매료되어 집에 돌아와 창고에서 외삼촌의 기타를 꺼내 혼자 연습하기 시작했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에 더없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부는 안하고 매일 기타만 치고 있는 내 모습에 걱정이 되셨는지 기타를 창고에 넣고 잠가 버리신 거였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아서 어른들 몰래 성가대 활동을 시작했다. 틈틈이 기타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다가 학교 통기타 서클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어느 여고와 조인하여 문학의 밤 행사를 하는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은 없었음에도 기타를 놓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2학년 때 어느 반 아무개가 기타도 잘 치고 작곡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길로 찾아가서 친구 삼았다. 그렇게 노래를 좋아하는 반항기 가득한 친구 다섯이 모여 그룹사운드를 만들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음악을 하자는 의미로 ECT(전기충격요법 Electroconvulsive Therapy)라고 이름 지었으나 깜짝 놀랄만한 음악은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어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일들만 저지르고 다녔다. 집에서는 얌전한 척했지만 학교 마치면 노래 연습한다고 밤거리 고성방가에 용돈 좀 생기면 노래방은 수시로 드나들었고 종종 당구장에도 갔으며 술, 담배도 그때 배웠다. 돈 벌어서 악기도 사야 하니 주말에는 막노동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졸업할 때까지 악기는커녕 밴드 구성조차 못하고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소심한 일들이지만 나를 믿고 도시로 보내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탈이었다. 마음 붙일 곳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버스로 두 시간 반을 달려 고향엘 가곤 했다. 그리고 식구들과 재회하고 나면 조용히 산에 올라가 앞산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 나도 모르게 호흡이 편안해졌다. 그럴 때는 산과 내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지고 내 소리가 자연과 공명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시끄럽고 듣기 싫던 내 소리가 산울림처럼 적막하고 맑게 들리는 순간이 있었다. 아마도 소리는 호흡과 같다는 것을 이때 체득한 듯싶다. 단전호흡도 처음에는 땀이 날 정도로 숨 가쁘고 답답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호흡이 가다듬어지고 온 몸의 숨구멍이 열려 몸의 안과 밖이 소통하는 듯한 상태가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배에 힘이 붙고 공명된 소리가 나니 점차 고음에 욕심이 났다. 사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겠지만 피아노의 ‘가온 다’ 음을 기준으로 할 때 남자는 2옥타브 솔 혹은 라까지 육성으로 가능하다. 그 이상의 음은 남자에겐 가성의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음역대는 아니다. 가성에 힘을 주어 소리를 쏟아내면 진성처럼 힘 있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헬로윈의 〈A tail that wasn’t right〉, 스틸하트의 〈She’s gone〉 같은 초고음의 노래들이 유행할 때였고 우리나라에도 시나위, 티삼스, B612, 블랙홀 등 보통 남자들은 흉내도 못내는, 여성의 메조소프라노 음역대로 노래하는 유명한 밴드들이 있었다. 나도 라디오에서 들었던 〈She’s gone〉에 반해 녹음해놓고는 매일 듣고 따라 불렀다. 내 주위엔 이런 초고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는데 고2 겨울 방학 때 쯤 이 노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을 본적이 없으니 맞는 창법인지 확신이 안 섰다. 반신반의하며 그룹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불렀는데 다들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 성당에서 열렸던 노래 경연대회에서 김종서의 〈겨울비〉를 기타 치며 노래해 대상을 받았다. 그래봐야 또래의 중고등학생들 예닐곱 팀 뿐이었지만.

3학년이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 시골에 계신 부모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느라 일 년 내내 삭발을 했다. 멤버들도 모두 대학 준비하느라 서로 만날 새가 없었다. 그러다 5월쯤 봄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작곡하던 친구가 갑자기 여러 친구들 앞에서 〈She’s gone〉을 불러보라고 바람을 잡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바람에 물러날 수도 없어 눈 딱 감고 그냥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눈을 뜨고 보니 우리 학교 뿐 아니라 소풍 왔던 다른 학교 여고생들까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부터 학교에서 가수로 통했다. 기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노래가 너무 좋았고 답답한 가슴을 풀어줄 창구였을 뿐이다. 짓밟힌 자존감을 공부라는 정면승부로 돌파하지 못하고 다른 출구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입시가 다가왔고 다행히 그 지역 국립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겨우 부모님의 면은 세워드렸는데 ‘정치외교’가 나의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이미 나는 부풀어버린 곁가지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클래식 기타와 그룹사운드 동아리로 등하교하듯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계속)

 

 

 

 

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ㅡ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창비, 1993

 

 

 

 

 

 

 

 

 

 

 


 

연재-신재창.jpg

신재창 I 

작곡가, 가수. 〈국어 교과서 아름다운 시노래 음반1〉, ‘노래로 만나는 시’ 연작인 〈눈 온 아침〉 등 6장의 음반, ‘삶의 시, 삶의 노래’ 연작인 〈김포행 막차〉, 자작곡 음반 〈길〉, 시노래 베스트 음반 〈조곤조곤 시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매월 시인 초청 〈수요시콘서트〉 등을 열어오고 있으며,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노래 동인 ‘시노래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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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