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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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채성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서양문화의 근간이 기독교라면 한국 전통문화의 기반은 불교와 유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는 삼국시대에 전래해 두루 융성했던 불교에 비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 색채가 옅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에서 불교를 빼고서는 전통문화를 논하기가 어렵다. 불교는 한반도에 전래된 지 약 1600년 이상이 지나 이 땅의 종교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래의 토속신앙과 외래의 불교문화가 서로 배척하고 반목하는 게 아니라 조화롭게 융합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공식적으로 서기 372년을 시초로 삼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전을 가져오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보다 빠른 서기 48년을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 왕비가 인도에서 시집오면서 불교도 함께 전래했다는 것이다. 불교계와 지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가야불교의 사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의 기록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가락국기」에는 수로왕 즉위 2년인 서기 43년, 가야의 수도를 정하기 위해 땅을 둘러보는 자리에서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라며 새 궁궐을 지을 터를 골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16나한’은 학문과 덕행이 가장 높았던 석가모니의 16제자를 일컫는 말이라는 점에서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을 수로왕이 이미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금관성 파사석탑」에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부왕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가려 했지만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했다. 허황옥은 다시 부왕의 명에 따라 파사 석탑을 싣고 뱃길에 올랐는데, 그제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허황옥이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면서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 허왕후릉에 보존돼 있다.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불교의 상징물인 탑을 싣고 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만큼 이것을 불교가 전래된 시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탑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서 불교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도 ‘가야’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불교성지 ‘부다가야’에서, 다라가야(6가야 외 제7가야)가 아뇩다라(부처가 깨달은 모든 진리를 가리키며, ‘바른 평등’ 또는 ‘원만’이라는 뜻)에서, 아라가야가 범어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며 불교의 가야 전래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실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도 승려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전래 과정에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 고유의 사상을 흡수해 나갔다. 불교가 우여곡절을 거쳐 한반도에 빠르게 정착하게 된 원동력도 토착 신앙과의 융합에 있었다. 불교의 핵심 교리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에 중점을 두지만, 천지신명에게 복을 비는 재래 기복(祈福) 신앙과 결합하면서 토착민의 정서에 녹아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어느 사찰에나 있는 산신각(山神閣)이다. 본래 불교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殿)보다 격이 낮은 각(閣)을 건물 이름에 붙였다. 한반도에 토착화된 불교는 이후 한국인들의 삶과 궤를 같이하게 되었다. 불교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한국인들의 삶에 있어 질서이자 문화가 됐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으로 작용했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철학하는 법과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국가관과 예술관, 윤리관과 생사관, 음식과 주거 등에 관한 사상과 문화의 구심점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통치 이념이며 삶에 대한 희망의 증거로서 찬란하게 피어났던 통일신라의 불교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더욱 융성해졌다. 하지만 최승로는 982년(성종1)에 올린 「시무28조」를 통해 신라 망국의 원인으로 불교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지향점을 제시했다.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요, 유교는 치국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왕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왕들은 불교 의례에 과다한 재정을 낭비했으며, 정치적 노력보다 불공에 더 힘을 기울임에 따라 신라와 같은 망국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고려 불교의 폐단을 목격하고 이를 혁파하고자 했던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도심 사찰 폐지, 종파 통합, 출가 제한, 사찰 소유 토지 몰수, 과도한 부역 등으로 불교를 억압했던 것이다. 혹세무민이나 기복 신앙과는 담을 쌓고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만 가까이하는 사대부조차도 비난에 시달렸다. 율곡 이이도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고 나서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했는데, 그 또한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조선 불교는 왕실 여성들의 불심과 능침수호사찰의 역할로 인해 그 생명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이는 조선왕조가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억압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불교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의 영향은 속담이나 관용구에도 남아 있는데, 승려나 절이 등장하는 속담은 땡중이나 파계승을 뜻하는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스님’이나 ‘승려’ 대신 ‘중놈’으로 표기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이처럼 불교계와 수행자를 낮잡아보고 업신여기는 ‘중놈’과 같은 표현은 『청구영언』과 같은 가집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즁놈은 승년의 머리털 잡고 승년은 즁놈의 샹토 쥐고

두 끄니 맛맷고 이 왼고 져 왼고 쟉쟈공이 쳔난듸 뭇 쇼경이 구슬 보니

어듸셔 귀머근 벙어리는 외다 올타 하나니

 

  『청구영언』에 실려 전하는 위의 사설시조도 불교와 승려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작품 전체를 현대어로 표기해보면, “중놈은 승년의 머리털 잡고 승년은 중놈의 상투 쥐고 / 두 끄덩이 맞맺고 이 그른가 저 그른가 짝짝꿍이를 쳤는데 뭇 소경이 굿을 보니 / 어디서 귀먹은 벙어리는 그르다 옳다 하느냐”가 된다. 비구와 비구니가 있지도 않은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소경(시각 장애인)이 그런 싸움을 구경하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언어 장애인)는 판사질을 하고 있는 이 모순적인 상황은 부조리와 불합리가 판치는 사회의 천태만상을 비틀고 조롱하는 풍자의 표현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소경과 벙어리에는 붙어 있지 않은 ‘놈’과 ‘년’이 승려에게는 붙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 승려(비구)는 ‘중놈’이라 하고, 여자 승려(비구니)는 ‘승년’이라고 한 것이다. ‘놈’과 ‘년’은 전형적인 비하의 표현이다. 불교계에 대한 이러한 비하의 표현은 억불정책에 따른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까 싶다.

  불교의 삭발 의식은 석가모니가 인과응보의 이치를 설명한 『인과경(因果經)』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체발체수(剃髮剃鬚)’라고 하는 이 의식은 권위를 드러내는 머리와 수염을 깎아 버리는 것으로 지금껏 관계해오던 세상과의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르는 머리카락은 번뇌와 망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삭발은 머리카락과 함께 잡념도 끊어버리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속세를 떠나 출가할 때 스님들은 머리를 깎음으로써 세속의 번뇌도 함께 지운다고 믿는다. 종교의 지향점인 깨끗하고 맑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깨끗하게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曹溪宗) 승려들은 모두 머리를 깎은 한결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깎은 사람은 곧 승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수행자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대처승이 많은 태고종(太古宗)의 경우는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머리를 기르는 것이 허용되기도 한다. 천태종도 비구니에게는 삭발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조오현, 「아득한 성자」 전문

  

  조오현 시인은 만해 한용운 이래 승려 시인으로서의 뚜렷한 자취를 남긴 분이다. 법명은 무산(霧山), 법호는 만악(萬嶽), 자호는 설악(雪嶽)인 조오현 시인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설악산 신흥사 주지 및 조실, 백담사 조실, 조계종립 기본선원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 등을 역임했다. 특히 만해사상 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마을을 조성한 그는 만해대상, 만해축전을 개최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과 은관문화훈장, DMZ평화상, 조계종 포교대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2018년 세납 87세(승랍 60년)로 입적한 조오현 시인은 자신의 깨달음을 선시로 읊으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의 높고 깊은 뜻을 심도 있게 형상화함으로써 한국 불교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섰다.

  구도의 넓이와 깊이를 잘 보여주는 「아득한 성자」는 조오현 시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에서 순간을 읽어내는 오도적(悟道的) 깨침을 날카롭고 섬세한 직관으로 꿰뚫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 고승인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핵심 교의를 담아 668년에 지은 게송(偈頌)인 「법성게(法性偈)」의 제12구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아득한 성자」라는 것이다. 순간과 영원, 현상과 본질을 넘나드는 속에 삶의 진실이 있으며,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깨우침이자 오도송이라 할 수 있다. “뜨는 해도 다 보고 /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야 말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성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성자는 곧 부처와 동격의 표현이다. 부처란, 깨달음에 이른 자, 곧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한 자유로운 존재를 일컫는 말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시인은 ‘하루살이’에게서 깨달음을 완성한 시공을 초월하여 적멸에 드는 부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는 인간의 100세 수명도 결국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에게서 성자를 보고, 모래알에서 우주를 읽어내는 대선사(大禪師) 시인의 구도자적 명상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는 새벽녘 범종 소리처럼 깊고도 우렁하다. 

 

정수사 법당 문은 꽃살무늬인데요

벌 나비 드나들다 날아가는 문짝으로

날개가 스치기만 해도 뚝뚝 꽃물 떨어져요

 

세상에서 제일 고운 연꽃이며 모란을 꽂은

저런! 저런! 꽃가루가 날리는 꽃병 아래

문풍지 조심하세요

발꿈치를 들고요

 

문지방을 건너다 헛디뎌 넘어지면

거봐요, 스러질 듯 출렁출렁하는 꽃대

툇마루 문고리 잡고 흔들리는 부처님 댁이죠

- 이석구, 「꽃병이 있는 집」 

 

  불교에서는 꽃을 상징화하여 만행화(萬行花)라 부르기도 한다. 꽃은 반드시 열매로 이어지는 속성이 있어 해탈을 위한 용맹정진에 비유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깨달음에 비유하여 각화(覺華)라고도 하는데,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찰의 법당 문은 대개 꽃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선(善)과 미(美)로 불전을 장식하려는 뭇 중생들의 환희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꽃살문에 새겨지는 꽃은 연꽃뿐만 아니라 모란꽃, 국화꽃, 해바라기꽃, 백일홍 등 다종다양하다. 꽃살문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문과 예천 용문사 윤장대의 꽃문, 그리고 강화도 정수사 대웅전의 꽃살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창건한 정수사는 강화도 마니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전등사, 보문사와 함께 강화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법당 출입문짝 전체가 통판 투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정수사 꽃살문은 각양각색의 꽃을 꽃병에 꽂아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사방연속 또는 이방연속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연꽃, 모란, 국화꽃을 꽃병에 꽂아 놓은 모습을 조각한 것은 부처님께 꽃을 공양하려는 숭앙심의 표현일 것이다. 꽃병에 꽃을 꽂아 불전을 장식하는 것은 화만(花鬘, 華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화만은 생화로 불상을 장식하거나 금·은으로 만든 조화를 불상의 머리 위에 매달아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석구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정수사 법당의 꽃살문 앞에서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은유적으로 노래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법당, 즉 대웅전은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사찰의 중심 공간이다. 부처님 중에서도 으뜸가는 부처인 석가모니가 계신 곳이라고 해서 ‘부처님 댁’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의 꽃살문은 안에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화(供養花)’이자 그 덕을 기리는 ‘화만’이지만. 밖에서 보면 중생들을 현혹하는 온갖 번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해탈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번뇌의 꽃밭을 지나면 화엄의 꽃밭에 이를 수 있듯 꽃이 만발한 부처님 댁을 찾은 사람들 또한 벌과 나비에 비유된다. 그래서 시인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지혜를 간구하며 법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당부한다. “문지방을 건너다 헛디뎌 넘어지”지 않게 “발꿈치를 들고” ‘조심하’라는 목소리는 삼가고 경계하는 자세로 한눈팔지 말고 정진에 힘쓰라는 온유돈후한 고승의 죽비 소리처럼 들린다. 불교문화의 정수로 피어난 꽃살문 앞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는 이석구 시인에게서도 꽃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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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l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메께라』,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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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