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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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동억 

 2024년 5월 공시사 월평 


  

 

 

 

 

최후까지 마주 본다는 것

 

● 박동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세상을 떠나기 전 뮌스터 거리를 기록하려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경남 진주에서 보냈고, 방송작가로 일할 때는 서울 봉천동에서 살았으며, 가족을 더 이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지자 자신을 내던지듯이 1992년 가을 독일로 떠났다. 이후 그의 터전은 도시 뮌스터였다.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난다, 2015)는 이젠 그의 거처가 되어버린 뮌스터를 향해 바쳐진 기록이다.

시인은 직접 뮌스터 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시인이 눈길을 두었던 장소는 아름답거나 육중한 건물 뒤편의 무너진 벽의 잔해이거나 교회의 부러진 첨탑이었다. 시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것은 ‘시간이 고여 있는’ 공간이다.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허수경이 뮌스터 거리로부터 읽어내는 것은 역사적 참혹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은 뮌스터에 포격을 가했고 700여 명의 독일 시민이 사망했다. 그런데 그 무렵 뮌스터에는 700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나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700여 명이라는 숫자를 거듭 기록하며 시인이 어떠한 역사적 대위법을 떠올렸는지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선악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숙고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사실처럼 폭력은 반복된다. 하지만 그 폭력의 정당함이나 방향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폭력이 대상이나 외양을 달리 할지라도 그 실체는 악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단언하듯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라고 그녀는 힘주어 말한다.

뮌스터의 여름 풍경 속에서 시인은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Selma Meerbaum-eisinger; 1924~1942)의 시를 읽고 있었다. 아이징어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나치의 광기에 희생된 유대인 소녀였다. 아이정어가 수용소로 떠나기 직전 그녀의 시가 연인 피히만에게 건네졌고, 다시 그녀의 친구들에게 건네졌다. 그렇게 살아남은 기록에 대해서 허수경은 다음과 적는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기억하고 그 잔혹에 대항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면서 거의 잊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순결한 소녀의 시들을 읽는 시간”(95쪽)이 남겨졌다고 말이다.

폭력은 반복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참상을 알리던 소녀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가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지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가자 지구의 참상을 알리던 시인 라피트 알라리어(Refaat Alareer; 1979~2023)가 이스라엘 군의 폭격으로 인해서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 인간의 악의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행할 수 있을까. 전쟁은 전쟁일 뿐이라고 곱씹을 수밖에 없었던 허수경 시인이 뮌스터 거리에서 찾아 헤맸던 것은 무엇일까.

 

『너 없이 걸었다』를 계속 읽어나가면 계절이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를 집필했던 시기는 늦가을이거나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뮌스터의 중앙시장과 옛 시청을 거닐면서 허수경은 또 다른 유대인 시인 넬리 작스(Nelly Sachs; 1891~1970)의 작품을 읽어나갔다. 넬리 작스는 나치 독일의 인종 학살을 피해서 스웨덴으로 탈출했던 시인이다. 생존자였던 작스는 자연스럽게 증언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허수경에 따르면 넬리 작스의 시는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증언할 때조차 복수나 절망과 같은 격정적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허수경은 조심스럽게 용서나 화해와 같은 단어 대신 ‘부드러움’이라는 단어를 택하여, 작스의 시는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삼는다고 해명한다.

역사를 증언하는 ‘부드러운’ 자세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작스의 시와 함께 허수경 시인이 언급하는 것은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 1924~2002)의 거리 미술인 <대화를 통한 관용>(Toleranz durch dialog)이다. 작품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거리 한편에 거대한 의자 두 개를 마주 보고 놓아두었을 뿐이다. 누구나 의자에 앉아 쉴 수 있고 마주보며 대화 나눌 수 있다. 칠리다에 대해서 허수경 시인은 “오랜 분쟁을 통한 대화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예술가”라는 소개를 덧붙인다. 작스의 시가 간직한 ‘부드러움’과 에두아르도 칠리다가 제안하는 ‘분쟁을 통한 대화’를 음미하면서 허수경 시인이 떠올렸던 것은 무엇일까. 시인이 상상한 바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 본 채 끈질기게, 때론 고통스럽게 대화하기를 지속하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오랜 분쟁을 통한 대화’, 미국의 수사학자 카임 페렐만(Chaim Perelman; 1912~1984)이 강조했던 것도 고통스러운 대화였다. 페렐만은 실천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직접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와 이스라엘인 사이의 양자 회동을 열고자 했다. 그가 주최한 회동에 비록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회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페렐만은 최후까지 대화야말로 서로 다른 신념과 입장에 선 두 타자가 따라야 하는 제일원칙이라고 믿었다.

이때 대화를 통해 설득이나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페렐만은 대화가 그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불화를 종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사건 자체이다. 페렐만은 그의 주저 『수사 제국』에서 토의나 대화가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과 타협하는 방식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화해나 용서는 없다. 다만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협상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페렐만은 사람 간의 합의와 공감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들을 폭력의 영역에서 협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은 대화하는 일보다 대화를 시작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끝까지 대화에 임하는 자세이다.

허수경이 작스의 시를 읽으며 화해가 아닌 ‘부드러움’이라는 단어를 택했던 이유를 상상해 본다. 덧붙여 진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독일로 떠나야만 했던 허수경 시인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그에게 시 쓰기는 ‘나’로 남지 않기 위한 여정은 아닐까. 완고한 ‘나’라는 장소로부터 떠나 타인에게 부드럽게 ‘나’를 내어주기 위한 여정. 말년에 집필한 『너 없이 걸었다』에서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은 시인이 제안하는 자세이다. 침묵하는 자만이 오롯이 ‘나’일 수 있지만 시인은 말 건네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는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하여 마주 서기를 회피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연루되고자 한다.

 

땅끝 모서리에 튀어나온 바위 절벽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같다

기도는 끝에 머무는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에 박힌 털장갑 한 짝

흘려 쓴 문장 같은 먹구름의 갈기들

 

한번 기울어진 시소는 평형을 찾지 못하고

한쪽은 땅으로

다른 한쪽은 하늘로

 

무거운 쪽의 무게를 덜거나

가벼운 쪽에 더 많은 짐을 싣거나

 

눈송이 하나가 안구에 닿아 스러질 때

차가운 결정에 눈꺼풀을 재빨리 덮을 때

 

히말라야의 눈 속에는 얼어 죽은 새들의 시체가 가득하지

높은 추진력이 얻지 못한 새들은 산꼭대기를

넘지 못하지 산꼭대기만큼

높이 날아오를 힘이 없는 새들은

눈 더미에 몸을 박고 버둥거리다가 죽어가겠지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기도가

교회의 첨탑을 타고 흘러내린다

첨탑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다

 

하느님은 얼마나 큰 안테나를 가지고 있을까

저 수많은 용서와 저주를 담아내려면

지구의 둘레만큼 넓은 귓바퀴를 가지고 있을까

밀폐된 기도는 허밍과 같은 것일까

 

모든 용서는 증오보다 고통스럽다

증오를 포기하는 자리에 용서가 들어선다

 

심장에 금이 갔다

심장 아래 피가 고여 있다

 

천장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기도

구름의 발바닥에 닿아서 흐물거리는 기도

기도가 웅웅거린다

ㅡ 신철규, 「누전」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5월호)

 

말 건넴의 한계에 기도의 형식이 놓인다. 기도는 찾아 헤매는 것이다. 기도가 시작하는 순간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는 도저히 ‘나’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타자를 구한다. 역설적으로 이 절박함이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계기가 된다. 기도는 자신을 낮추고 타자를 초대하는 하나의 열림이다.

이 작품에서 사람을 절박하게 하는 것은 용서와 증오의 감정이다. 이 작품에 제시되는 시소의 은유는 고통스러운 양가감정을 미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용서할 것이냐, 증오할 것이냐는 물음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고뇌이다. 한편 시소의 은유는 ‘나’와 타자 사이의 균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서는 ‘나’이거나 낮은 자세로 간구하는 ‘나’이거나, 그래서 나는 땅과 하늘 사이에서 휘청거린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치우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용서이든 증오이든, 충실함이든 절박함이든 “무거운 쪽의 무게를 덜거나 / 가벼운 쪽에 더 많은 짐을 싣거나” 움직이며 ‘나’는 ‘나’의 균형을 맞출 것이다. 이와 함께 감상할 것은 시적 운율이다. 각 연에서 하나의 행이 지나치게 길거나 짧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절제된 운율은 자신의 마음을 숙고하는 자의 시선을 내밀하게 표현한다. 그렇기에 그는 기도하는 자로서 절박함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하느님의 마음조차 헤아릴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용서가 이 작품의 화두라면, 이 작품이 “모든 용서는 증오보다 고통스럽다 / 증오를 포기하는 자리에 용서가 들어선다”라는 시구를 향해 나아갔을 때, “심장 아래 피”로서 남겨진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여기서 읽어내야 할 것은 마음의 한계일 것이다. 사람은 증오든 용서이든 끝까지 행할 수 없다. 무엇이든 끝까지 증오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렇지만 용서 또한 어렵다. 용서하고자 한다면 피가 심장을 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기도’는 어떠한 선택으로든 후련해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위해 행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때 심장에 고이는 어둠을 사람은 홀로 감당할 수 없기에, 신은 호명되어야 한다.

이 절박한 체념 때문에 이 작품은 타자를 향해 가없이 존재를 연다.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신만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용서하기를 택한다면, 사람은 용서하기를 선택한 자신만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끝내 어떠한 체념 속에서 그의 기도가 천장을 뚫을 수 없고, 다만 방안에서 혹은 입속에서 웅웅거릴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계가 우리에게 닿아야 할 장소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이룰 수 없는 윤리를 상상하게 한다.

 

모든 것이 축축하고 희미해져만 갈 때

나는 한 소년의 손아귀에서

뜨겁게 뛰는 심장이었네

강물을 떠도는 삶이 어쩐지 싫어져

나는 왜 하필 여기 떨어진 지푸라기일까 생각하던 때였지

 

나를 움켜쥐고 소년이 버티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소년을 떠받쳤네

지푸라기일 뿐이지만

무지개…… 무지개 같은 심장이 되어주고 싶었지

 

물을 토해내고 긴 숨을 뱉은 소년이 구급차에 실려 떠난 뒤

아득한 마음 강둑에 누워

내가 소년을 구한 것이 아니라

소년이 나를 구했다는 걸 알았지

 

그리고……

그리고……

 

바람이 부네

ㅡ 김선우, 「지푸라기의 시」 후반부(《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낮은 자세로 타자를 청하는 것이 기도라면, 김선우 시인의 「지푸라기의 시」는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는 자 사이에서 가능한 하나의 기적 같은 윤리를 상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푸라기인 ‘나’가 강물에 떠내려가던 소년을 구하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만, 자신이 소년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소년이 나를 구한 것이라는 진술을 행함으로써 독특한 윤리적 인식을 자아낸다. 이러한 진술이 가능한 것은 ‘지푸라기’가 단지 소년을 구원하는 손길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는 비루한 자아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소년을 구하는 순간 그저 ‘축축하고 희미한’ 지푸라기로 내던져져 있던 ‘나’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되며 구원받았다는 기분을 받는 셈이다.

이 지푸라기의 우화는 시인의 윤리적 의식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윤리는 곧 소년을 구해낸 지푸라기처럼 삶은 작은 것들에 의해 지지된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구하며 자신의 초라함을 잊을 수 있었던 지푸라기처럼, 존재의 소명은 자기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손 내밀 때 획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소년’만이 강물에 떠내려가며 자신을 구원할 지푸라기 하나를 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강둑의 지푸라기처럼 모든 존재는 타자에게 손 내밀며 자기 존재의 소명을 찾아 헤맨다는 사실이 ‘지푸라기의 시’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윤리적 바람으로 판단된다.

 

아주 오래 걸었습니다 우리 헤어지고 나서도요 할 말이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든요 작게 말해서 못 들은 것 아니죠 어긋나서 그랬던 거죠 사실 나 그쪽으로 가지 않았어도 됐어요 그런데 염치가 없었어요 끝까지 못 걸었잖아요 도망쳤잖아요 그런데 나는 못 들어가고 한참을 밖에서 길 잃은 펭귄처럼 이쪽 저쪽을 마음대로 건너 다녔어요 당장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데요 조심하라고 늘 조심하라고 밥도 잘 먹으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나는요 밥도 잘 안 먹고 사인이란 건 완전히 쳐다도 안 봐요 모럴이라는 거 알죠 도덕이라는 뜻 나에겐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이쪽 저쪽을 마구 그런데 아주 오래 걷기만 했어요 나에게는 선을 구별할 능력도 모럴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깍듯하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걷고 싶어요 엄마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무리를 떠나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못 다니는 노루펭귄처럼요 이렇게 마음대로 걸어 다니다간 당신 말대로 집 가는 길에 차가 나를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훨씬 가까운 죽음이라고요 도로에는 사인이 없어도 방지벽이라는 게 있잖아요 죽음을 사고를 미연에 방지 더 작게 만들어 보려고 이미 벌어진 거리인데도

 

나는 안 치이고 잘 돌아왔어요 방지벽에 가로막히지도 않았고요 엄마도 무리도 잘 찾았어요 너무 크고 너무 징그러운 나의 집으로

 

당신도 잘 걸어 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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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시인과 김선우 시인의 시에 우리가 확인한 것은 찾아 헤매는 자세이다. 그들의 시에서 탐구되는 것은 타자에게 내어주고-내어줌 받는 자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세로부터 멀어졌을 때 어떠한 언어가 탄생할까. 박참새 시인의 시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친 세대가 가질 수밖에 없는 자명한 세계관, 즉 “당장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 세계를 단언할 수밖에 없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중요한 물음은 그러한 세계에 맞서는 시인의 태도이다. 첫 시집 『정신머리』(민음사, 2023)에서 합의가 되었던 것은 탈권위적이고 도발적인 목소리였다. 이 작품에서도 화자는 ‘모럴’도 ‘도덕’도 없는 ‘나’, 심지어 “엄마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노루펭귄’으로 선언된다. 또한 세상은 언제라도 교통사고가 벌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주체는 왜소화되고 세상은 격하된다.

박참새 시인의 시에서 반복하여 제재로 삼는 대상은 책임의식으로 판단된다. 의도적으로 내세워지는 것은 타인에게 연루되기를 꺼리고, 금기를 위반하며, 스캔들을 예비하는 화자이다. 징후적인 것은 그러한 과장된 표현과 별개로 주체의 무의지적인 태도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의 시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의지로 나아간다. 이 작품에서도 어떠한 입장이나 신념도 입안되지 않는다. 다만 “당신도 잘 걸어 왔으면 좋겠어요”라는 바람을 위해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나’가 나타날 뿐이다. 위험한 거리와 “너무 크고 너무 징그러운 나의 집”으로 당신이 ‘나’에게 잘 도착하기를 바라는 소망만이 고백된다.

세상은 자명하게 위험한 곳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그 자명한 위험을 부정할 의지조차 이 작품에 부재한다는 사실이 징후이다. 박참새 시인의 시에서 결여된 것은 기도이다. 찾아 헤매는 자세이다. 그의 시를 이루는 긴 방백은 어떠한 형이상학의 가능성이나 타인과의 유대를 예비하지 않는다. ‘나’는 고독하게 기다릴 뿐이다. 장르적 관점으로 볼 때 그의 시가 도발적인 이유는 그의 시가 시적인 언어에 대한 체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시로써 무엇을 행한다기보다 시로써 꿈꾸지 않기 때문에 시에 대한 정확한 모독을 수행한다.

모욕적인 언어나 자기비하의 비유를 내세울지라도 그의 시는 편안하게 읽히는 것,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에 따르면 ‘매끄러운’ 것이다. 이 시의 산문체는 일상언어의 매끄러운 직물에 가깝다. 이 산문체 형식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은 없다. 매끄러운 모욕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자의 끔찍함이 없다. 이 작품의 형식은 자아의 클로즈업이고, 이 작품의 내용은 자아의 셀카이다. 이 시의 얼굴은 불안에 떨고 있다. 그리고 시구들은 자신의 불안을 확인하기 위해 바쳐진다.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자의 얼굴, 타자의 흔적이 이 시에는 없다. 만약 이 시가 현실을 모욕한다면, 바로 얼굴을 타인과 마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실상 얼굴도 육체도 없다. 그의 시 세계의 자아는 유령이나 다름없다. ‘나’의 목소리는 타인에게 전해지는 대신 부드럽고 견고하게 ‘나’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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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평론집 『침묵과 쟁론』,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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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