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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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1년 12월 공시사 월평 


 

 

 

 

 

오징어 게임과 오래된 미래

  

• 신수진

 

 

 

 

 

  1. ○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모든 국가에서 1위를 기록하며 바야흐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각종 캐릭터 상품으로 제작되어 팔리고 길거리에서는 추억의 뽑기가 유행이며 어린아이들까지 게임의 참가 번호가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닌다. 〈기생충〉이 쏘아 올린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에 대한 메시지를 만화적이고 엽기적인 코드로 설계하고, 신파와 판타지 그리고 게임보다 공포스러운 리얼리티라는 독창적인 데페이즈망을 구축함으로써, 또 하나의 장르적 성공을 보여줬다.

  실화 재연 프로그램의 가발 쓴 외국인들 연기를 연상하게 하는 VIP 역할 외국인 배우들의 번역기를 돌린 듯한 영어 대사, 부도덕하고 저속한 부자들이라는 클리셰만 제외하면, 돈을 위해 어디까지 인간성을 포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 모의실험은 일차원적이지만 신랄한 문제의식에 한국 특유의 유머까지 겸비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난데없이 옛날 옛적 꼬마들의 놀이가 소환된 2021년의 ‘오징어 게임’에는 사채에 쫓겨 신체 포기 각서까지 쓴 채무자, 불법 임금 체불을 당한 외국인 노동자, 사기당한 탈북자 등 한국형 자본주의의 최하층 구조를 증거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제1항, 참가자는 임의로 게임을 중단할 수 없다. 제2항, 게임을 거부하는 참가자는 탈락으로 처리된다. 제3항,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은 게임 규칙처럼 간단하지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기에 게임 규칙처럼 간단한 이 동의서에 자발적으로 서명하게 된다.

  첫 번째 놀이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알록달록한 놀이터를 세팅하고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던 귀여운 양갈래 머리 영희를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추적해 난사하는 거대하고 섬뜩한 피규어로 세워놓은 미장센은 압도적이다. 그러나 원래 이 놀이는 움직이면 바로 탈락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술래에게 잡혀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으면 다른 아이가 와서 구해줌으로써 다 함께 사는 놀이였던 것이다.

  탈락자들에게 가해지는 잔인무도한 총격과 선혈이 낭자한 공동체 내부의 사투를 매 순간 겪어야 하는 게임 참가자들의 알레고리는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생존 문제와 다름없다. 시 쓰기는 경제성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참가자들에 의해 지속적이고도 자발적으로 계승되고 있는데 이 아이러니한 시의 생존 안에서 세계는 어떻게 조형되고 있는지 읽어 보자.

 

 

  2. △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호스피스와 산파가 동시에 필요한 시기

   잘 배웅하고 또 잘 마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교에서는 성찰하고 표현하라고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활동가들이 시장통을 지나 광장에서 모이자고 합니다

   혼자는 혼자의 안팎을 살펴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희미합니다 잘 안 보입니다

   누가 무엇이 왜 혼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습니다 절망하기에도

   무력해지거나 우울해지기에도 힘이 듭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감정이 고장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근처에는 혼자와 다를 바 없는 혼자들뿐

   어쩌면 낡은 것은 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떠나간 척하면서 안안팎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새것은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오래된 미래는 오래된 책 속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들이 낡은 것과 새것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 이른바 도래했다는 인류세의 문턱에서

   배웅하지도 못하고 마중을 나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혼자 안에도 혼자들이 혼자 밖에도 혼자들이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는 이상한 환절기입니다

   우리 혼자는 끝이 시작되었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끝이 시작되었다고 조만간 끝나고야 말 것 같은

   마지막 끝이 시작되었다고

― 이문재, 「혼자 혼잣말」 전문( 《문학동네》, 2021년 가을호)

 

 

  ‘나’는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는 세계를 응시한다. 그것은 과거만이 유령처럼 출몰하고 미래는 더 이상 도래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의 현현을 뜻한다. 학교에서는 “성찰”하고 “표현”해서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어쩐지 우리는 자라날수록 자기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 같다. 광장도 골방도 잊은 채 “혼자의 안팎을 살펴”볼 뿐이다. “누가 무엇이 왜 혼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사고’나 분노·절망·무력·우울 같은 ‘감정’이 “고장”나 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안에도 혼자들이 혼자 밖에도 혼자들이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는 이상한 환절기”에 이르러 비로소 혼자는 “끝이 시작되었다고 혼잣말을” 한다. “조만간 끝나고야 말 것 같은 마지막 끝이 시작되었다고” 혼잣말을 한다.

  잉여 생산과 과잉 소비의 수레바퀴는 점점 더 가속화될 뿐 멈출 수 없다. 멈추면 쓰러지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과 양극화를 승인하는 시스템의 야수성으로부터, 복제되는 자기동일성과 배제와 차별의 야만성으로부터, 고유한 아이덴티티의 상실과 인간 실격의 우화로부터, 전복과 전회의 순간은 망각되고 말았다.

  묵시록처럼 기어코 “마지막 끝이 시작되었다고” 혼잣말을 하는 ‘혼자’들은 그러나 알고 있으리라. 어른들이 만든 오징어 게임 안에서 성공과 실패는 온·오프 스위치처럼 생과 사를 켜고 끄지만, 진짜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 성공과 실패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결과와 무관한 여러 변수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놀이일 뿐이다. 모든 아이들이 성공하는 것이 놀이의 목표가 아니라 실패를 비롯한 예기치 못한 플롯의 생성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유희이기에 실패는 도리어 놀이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그래서 지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경우의 수 전부가 놀이의 완성을 위한 루트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는 곧 성공인 셈이다.

  승자독식의 가치가 정의로 규정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실패를 무릅쓰는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지만 시 안에서 벌어지는 혼자들의 혼잣말에는 실패와 성공 너머 잃어버린 자기 세계와 그 세계들이 조우하는 순간으로 비상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도약이 있다. 그래서 “성찰”도 “표현”도 “자기 이야기”도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가는 자신을 예감하면서도 “광장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하고 “오래된 미래”를 찾기 위해 책갈피를 뒤적인다.

 

 

   이다음 생은

   원서동에 살고 싶다

   창덕궁 높은 궐담 아래

   원서동 볕 좋은 이 골목길에

   사는 듯 마는 듯

   소리 없이 살고 싶다

 

   창덕궁5길 31번지

   나즈막한 지붕에

   굴뚝을 내고

   조붓한 밭에

   맨드라미도 심고

   내 괭이만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잃어버릴 줄 알았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늘진 방에서 데리고 나올 것을

   이 볕 좋은 원서동 골목길 함께 걷다

   창덕궁 후원에 들어 나란히

   부용 연못가에 앉았기도 할 것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지

   내 괭이를 잃어버리고도

   괭이라면 어느 괭이라도

   다 같으려니 했지

   세월이 흘러서야

   슬픔을 알았지

 

   다음 생은 정말

   이 볕 좋은 원서동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 길이 되는 골목에서

   내 괭이와 양지바른 사랑만 하다

   있었는 듯 없었는 듯

   살다 가고 싶다

― 방민호, 「원서동ㅡ괭이12 」 전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12월호)

 

 

  ‘나’는 다음 생에 “원서동 볕 좋은 이 골목길” 어느 아담한 집에서 “내 괭이와 양지바른 사랑”만 하다 없는 듯 살다 가고 싶다고 거듭 소망한다. ‘나’는 함께했던 대상을 잃고 나서야 늦은 후회와 슬픔으로 다음 생을 기약할 뿐이다. “그늘진 방”에서 한 번도 데리고 나오지 못했던 기억, “괭이라면 어느 괭이라도 다 같으려니” 했던 기억, 마지막일 줄 몰랐던 마지막의 기억들. 그 애틋함은 존재와 부재의 비의에 ‘나’가 꽤 오랜 시간 골몰해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복기해나가는 ‘나’의 역행은 높은 궐 아래 원서동 골목을 지나, 나지막한 지붕의 굴뚝집을 지나, 창덕궁 후원의 부용 연못가에 가서야 비로소 괭이와 다정히 볕을 쬐는 이다음 생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왔던 길의 모퉁이를 되돌아가면서 두리번거리면서 ‘나’는 문득 이 생을 건너가는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이 메커니즘에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술래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하고 눈을 감고 왼 후 “다 숨었니?”하고 물어보면 “응!”하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말았던 어릴 적 순진무구했던 숨바꼭질 놀이에서 술래는 가끔 터무니없이 시시한 이유로 혼자 말없이 집에 가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숨어 있던 ‘혼자’는 어디엔가 남아 있는 또 다른 ‘혼자’들과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

 

 

  3. □

  “선생님, 저랑 게임 하나 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걸어오는 세계는 당신의 불운과 절망으로 기획된 가공할 시나리오를 준비해두었다. 눈이 가려진 채 들어갔던 게임의 세계는 현실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 아니다. 다시 눈이 가려진 채 길가에 버려진 인물들이 이제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와 진짜 현실로 돌아왔다고 믿게 되는 바로 그 지점부터가 메시지의 시작이다. 황당무계한 룰을 노골적으로 극대화한 이 초현실적인 게임 공간은 바깥이 매우 정교하고 합리적인 진짜 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 위한 기제일 뿐이다. 게임의 안과 밖은 결국 똑같다.

  그래서 주인공 기훈은 “원래 사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데스 게임보다 더 잔혹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하고 누군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구슬이랑 딱지를 같이 쓰는 친구인 ‘깐부’는 코흘리개 시절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 어른이 될수록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느슨하게 측정된다. 분을 셀 필요는 절대로 없다. 그들은 “내일 한낮에 만나러 올게, 저녁 전에”라는 식으로 몇 시간이나 여유를 두고 말한다.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나타내는 많은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 “어두워진 다음 잘 때까지”라는 뜻의 ‘공그로트’, “해가 산꼭대기에”라는 뜻의 ‘니체’, “해뜨기 전 새들이 노래하는 아침 시간”을 나타내는 ‘치페-치리트’ 등 모두 너그러운 말들이다.

여러 시간 일을 해야 하는 추수철에도 일이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여든 살의 노인도 어린아이도 함께 일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들의 속도로 웃음과 노래를 곁들이며 한다. 일과 놀이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1996)에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서구 문명이 주도한 무분별한 개발과 문화의 획일화가 수세기 동안 진보해온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도록 했다고 진단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의 대안으로, 이를테면 라다크와 같이 경작할 수 있는 만큼만 땅을 소유하는 식의 환경적 공생 관계 속에서 안정된 공동체들과 관용적인 개인들이 균형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사회를 제시했다.

  이 역설의 회로 안에서 더 이상 놀이판의 말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반동은 일어난다. 체스판의 어떤 말도 혼자서 그 게임을 이기지 못한다. 모두가 같이 움직여서 승리의 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잊은 것은 무엇이었느냐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느냐고, 시인들은 묻는다. 경쟁과 탐욕, 낙오와 좌절, 소외와 부패로 점철된 토너먼트 방식을 지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복원함으로써 우리 자신은 치유될 수 있음을 그들은 태초의 육성으로 전한다. 그 부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비치는 한 줌 볕 사이에 잃어버린 괭이는 앉아 있고 혼자들은 모일 것이다. 떨리고 공명하며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바로 그다음의 세계가 당도하고 있는 현장일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그렇게 개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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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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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