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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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공시사 월평
피에타 곁의 천사와 상(喪) · 상(像)의 중첩
• 신수진
“하늘나라의 심부름꾼인 그대여, 말해주시오. 그대는 죽음이오? 아니면 생명이오?”
그러자 천사가 어둠으로 제 몸을 가렸다. 하지만 천사는 빛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천사가 대답했다.
“나는 사랑이오”
― 빅토르 위고
이탈리아어로 연민, 자비, 동정심을 뜻하는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주제의 도상학적인 근원은 적확하지 않으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다비드상, 모세상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 피에타는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위에서부터 피라미드 구도로 내려오는 마리아의 드레스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 언덕을 연상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는 수호의 옷이라는 사상적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두 팔로 감싸고 있는 마리아의 고요하고 경건한 표정과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제외하고는 죽음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워 보이는 그리스도의 육체 때문에 이 작품은 애도라기보다 부활이라는 종교적인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도로 가져가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영원한 세계에 귀속된다. 여기 피에타를 떠오르게 하는 시들에는 천사의 노래로 중첩되는 죽음[喪]과 형상[像]이 있다.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내려와 사자(使者), 기록자(史官), 전사(戰士)의 역할을 하는 천사들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메시지를 주는 초월적 존재이고 주인공을 응시하는 투명한 시선일 뿐 아니라 고유한 임무를 실현하거나 실현하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들은 언제나 울고 있는 자를 지켜보고 있다가 위로하고 일으키며 나팔 불고 노래한다.
노인은 오늘도 마당 한가운데 앉아
물려줄 사람 없는 볕을 끌어 모으고 있다
굽은 등으로 날아온
날파리들의 발가락이 찌르는 걸까
움찔거리는 등이 울고 있는 것 같다
진물 나도록 무화과는 익어가는데
애인 만나러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중얼거린다
오늘은 운세 좋은 날,
성큼성큼 다가올 것 같은 아들의 발자국 소리
가끔 향과 쌀의 힘을 빌려 아들을 기다린다
말을 잃은 노인의 입에서 곡(哭)과 노래가 뒤섞여 들린다
하늘에서 긴 손이 내려와
노인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라도 할까
질긴 것은 잘라내고
깊은 것은 퍼올려야
물속과 바깥이 하나가 되나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하나의 방향을 틀어
다른 길을 낼 수 있다면
덜덜거리는 트럭을 몰고 아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곁에는 천사가 있다는데
노인이 쓴 마스크가 눈을 가렸기에
천사를 보지 못한다
하나같이 다른 모양을 만들고 사라지는 구름
노인과 플라스틱 의자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있다
― 금란, 「처서」 전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10월호)
노인은 볕이 좋은 마당에 앉아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꼼짝 않고 기다린다. 무화과가 다 익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향과 쌀의 힘을 빌려” 기다리면서 그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간다. 그것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존재하는 아들의 상태와 동일하다. “성큼성큼 다가올 것 같은 아들의 발자국 소리”와 “울고 있는 것 같”이 쓸쓸한 굽은 등의 적막, “말을 잃은 노인의 입에서 곡(哭)과 노래가 뒤섞여 들”리는 이 불일치 사태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정점을 보여준다.
노인의 중얼거림, 노인의 부동자세, 노인의 기도는 ‘중첩’된 두 세계에 가설로 기입되고 있는 노인을 보여준다. 물속과 물 밖,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 존재와 부재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작동할 때 그것은 대립하는 두 차원이 아니라 겹치고 부딪히며 공존하는 가능성으로 성립한다. 노인은 언어와 일상을 잊은 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개의 영역을 영위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하나의 방향을 틀어 다른 길을” 내는 이 중첩의 방식은 기착지를 표류하는 노인의 의식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생명이 없는 조각상처럼 한 자리에 고정되어버린 육체와 환청과 실언으로 점철된 정신을 자식을 잃고 황폐해진 아버지의 착란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이고,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이며, 부모를 잃은 자식은 ‘고아’인데, 자식을 잃은 부모는 가리키는 호칭은 없다. 그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기에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으로 참척(慘慽)이라 부를 뿐이다. 노인에게는 수용 가능한 현실과 수용이 불가능한 현실 모두 명백한 현실로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인물인 천사의 등장 역시 석연찮다. 곁에 있는 천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가 믿는 현실만이 단 하나의 결정론적인 진리라는 확신을 흔들고 무너뜨린다.
여기 노인을 보는 시선이 있다.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곁에” 있다는 ‘천사’다. 그러나 “노인이 쓴 마스크가 눈을 가”려 노인은 천사를 보지 못한다. 천사가 찾아온 자는 정작 천사를 보지 못하지만 천사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다. 천사는 노인을 보지만 노인은 천사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공평한 구도다. 이 기울어진 관계와 일방향적인 시선은 대상화되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타자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거울처럼 다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반영을 통해서만 진정한 주체는 탄생한다. 스스로 눈을 가리운 노인의 모습은 계속해서 역동적인 반사를 일으키며 두 세계에서 공존해야 하는 존재론적 상호 작용이 완전히 차단된 죽음과도 같은 정지를 암시한다.
누가 나에게 천사라고 했는데
나는 그걸 전사로 읽었다
막 싸우러 나가려던 참이었던가
여행지에서 보았던 천사는 거대했고
눈동자가 없었으며
긴 칼을 높이 들고 있었다
전사 같은 천사와
천사 같은 전사는
한쪽은 죽이고
한쪽은 죽는 편
천사와 전사 사이
오독과 오타 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둔다
그건 세상에 악수들이 있는 이유이자
점술가가 운명을 말해주는 방식
당신은 작은 불
차갑고 캄캄한 곳에서 홀로 타는 불
손이 늘 뜨거운 데에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차갑고 캄캄한 것들을 양손에 움켜쥐고
촛농처럼 막무가내로 녹아버렸을 거야
천사도 전사도 싸우도록 태어났으니
뭐하고든 싸워야만 하고
오독과 오타는 발생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왜 모든 차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지
왜 지나온 자리마다 타버린 자국들인지
생각 속에 갇혔던 마음이 조금 떠오른다
기도를 칼처럼 휘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 강은진, 「포춘 텔러」 전문( 《현대시》, 2021년 11월호)
관념 속에서 잉태된 천사의 이미지는 하얗고 눈부신 빛의 형상이다. 그네들은 어느 먼 곳의 이데아를 표상하는 기호로서 응시하고 동경할 수는 있지만 동화되거나 체화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이질성과 거리는 이원론적 세계를 재확인시키며 낯섦과 소외를 낳고 자각과 서글픔으로 자란다. 이 무연한 간극으로부터 불화와 비애는 촉발된다. 천사라고 쓴 말을 전사로 읽으면서 ‘나’는 “막 싸우러 나가려던 참”인 눈동자가 없고 칼을 높이 든 이국의 거대한 천사를 떠올린다.
본질을 넘어 실존하기 위해 ‘나’는 선험적이고 성스러운 기도 대신 경험적이고 불경한 싸움을 택한다. “차갑고 캄캄한 곳에서 홀로 타는 불”이 되고 “기도를 칼처럼 휘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부활하는 ‘나’는 “촛농처럼 막무가내로 녹아버”린 화상의 자리에 유폐되었던 “마음”이 비로소 부상함을 느낀다. 차라리 기도는 긴 칼을 높이 들 때의 마음, 천사이기도 전사이기도 해야 하는 마음, 지나온 자리마다 타버린 자국들을 돌아보는 마음이다. 죽거나 죽이는, 천사와 전사, 오독과 오타라는 중첩된 두 차원 사이에 ‘나’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둔다. 그 중간 지대에는 “악수”라는 화해의 제스처가 있고 “운명”이라는 이해의 전언이 있다.
기도는 상처 입은 누군가의 자위나 자폐 혹은 가상의 판타지가 아니라 준엄한 현실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이다. 시는 내면의 상처를 외연의 훼손으로 전시하는 일반적인 애도의 형식을 거부하고, 존재 가능성이 있는 현실을 중첩시킴으로써 지연되는 불확정성 속에서 역설적으로 존재를 확립해간다. 그때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중첩의 상태를 증거하는 존재로 천사가 등장한다. 천사는 꺼져가는 불씨처럼 희미해진 ‘나’를 주시하는 시선의 출처로서 ‘나’를 깨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투영된 객관화된 ‘나’이기도 한 것이다.
위대한 시인 릴케는 이렇게 노래했다. “몰락조차도 그에겐 존재를 위한 구실, 최후의 탄생에 불과했나니.” 시인의 비통함, 절망, 허무는 불완전한 삶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그것은 싸움의 주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긍정의 수식이다. 자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쓰라린 모욕과 뼈아픈 상실을 체감하면서, 시는 죽음마저 영원한 개선문으로 입성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피에타 곁에 와 그의 크고 흰 날개를 덮어주는 천사는 우리의 비극을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가장 낮게 엎드린 바로 그 밑바닥으로부터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이라는 전언을 상기시킨다. 그 역설의 지평 안에서 생과 사, 열망과 허무, 사랑과 이별, 과잉과 결핍, 나와 너는 비로소 중첩될 것이며 이토록 충만한 상(喪) · 상(像)의 순간들로 말미암아 시는 아름다운 존재론적 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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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