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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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1년 10월 공시사 월평 


 

 

 

 

 

창가의 키아로스쿠로, 예술가의 자화상에 대한 단상들

   

• 신수진

 

 

 

 

 

   화가들은 오랫동안 자화상(自畵像)을 그려왔다. 1493년 서양 최초의 독립 자화상으로 화가의 창조성을 신격화한 뒤러의 자화상, 백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린 17세기 빛의 거장 렘브란트의 자화상, 귀에 붕대를 감은 채 파이프를 물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 일생 동안 개인적 정치적 투쟁을 지속하며 자신의 외상을 작품에 투사한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등을 떠올려보면 미술사에서 자화상은 그 자체로 예술가의 정체성과 고유의 드라마 그리고 그의 시대를 반영하는 가장 핍진한 자기 증언의 장르임을 알 수 있다.

  자화상의 표현 양상에는 최대한 실재에 가깝게 외연을 재현하는 기법도 있고 특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실물을 왜곡하는 기법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진을 찍듯 정교하게 실물을 복원했다 할지라도 애초에 객관적인 자화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배경과 어떤 자세를 어떤 프레임으로 그릴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세팅에서부터 이미 예술가의 목적과 방법과 견해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화상의 대상인 자기 자신은 정물처럼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이를 그리는 화가의 인식과 작용 역시 계속해서 변화한다.

  예컨대 삼십여 점이 넘는 고흐의 자화상들은 그 시기와 주제 및 기법적 특성으로 고흐의 삶과 세계관 그리고 변모 과정의 총체를 증거한다. 다른 작품의 뒷면에 그린 자화상이나 물감 안에 빠진 붓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화상 등은 고흐가 가난해서 모델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스스로의 모습을 많이 그렸고 종이 값이 부족했으며 값싼 붓을 써야 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고흐는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사람이 여러 성격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는 말로 자화상을 통해 내면을 얼마나 내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밝히기도 했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표정이나 자세와 같은 이미지뿐 아니라 구도나 터치 그리고 색채에 있어서 역동적인 변화의 패러다임을 갖는다. 그림 속의 고흐는 그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얼마나 소외되고 어떻게 분리되어갔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또 하나의 자기 세계를 축조한 예술가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섬세한 감수성을 보유한 한 소년이 예술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궤적을 자전적 요소, 의식의 흐름, 당대의 시대상, 신화와 성경의 모티프 등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서술 전략으로 써내려 갔다. 그리고 이 포부는 20세기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한 경지를 개척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고대의 아버지시여, 고대의 명장이시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저를 크게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주인공은 다이달로스가 미궁을 빠져나오듯 가족, 학교, 사회, 신앙, 조국을 떠나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의식을 벼리겠다고 다짐할 때 마침내 위대한 예술의 지평이 자신 앞에 도래했음을 깨닫는다. 이는 제임스 조이스의 삶이 그 자체로 예술의 자화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 자기 자신의 내부를 깊이깊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는 두 편의 시가 있다. 창가에 선 시인은 자신의 실루엣을 명암의 기표로 드러낸다. 가장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걸음을 옮길수록 빛과 멀어지며 점점 어두워지는 시의 저 무연한 내부로 따라 들어가 봐야겠다.

 

 

   그늘에서 그늘로 건너뛰죠 나의 행방은 알 수 없어요 여름은 아직 한창이니까

 

   물속에서 눈을 뜨는 아침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면 햇빛처럼 멀리 갈 텐데 소매를 걷어 올리면 목덜미가 지워져요 목에서 숨을 지우면 매일은 없겠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말의 뼈는 희고 반짝입니다

 

  호루라기를 불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름들 누군가 밟았던 자리에 설 때마다 바닥이 지워져요 바닥 없는 말들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어요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색깔이 되어 부드러운 크림처럼 원을 그리며

 

  내다놓은 갈피 사이에서 이끼가 자라요 갈피 없이도 그늘은 불어나고 불려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죠 스물처럼 깃털을 부풀리면 말도 안 되는 나날 누구의 것도 아닌 입을 막아도 할 말이 남는

 

   질문을 씹으며 꼭꼭

   대답을 숨기는

   나는 이제

   멀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손나팔이 불겠죠

 

   마침내

 

   방금 잠에서 깬 얼굴이 되어

   가늘고 긴 소리가 되어

 

   동풍이 창문을 무너뜨리고 있어요

― 김선재, 「마흔」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9월호)

 

 

  마흔이라는 나이는 아직 여름이 “한창”인 계절이다. 뜨거운 생을 온몸으로 관통하기 위해 ‘나’는 “그늘에서 그늘로” 건너뛴다. 짙푸른 날씨를 견딜 만큼 울창한 시기지만 아이처럼 여전히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인정과 애정은 필요하고 그렇다면 “햇빛처럼 멀리 갈”수도 있을 테지만 “목에서 숨을 지우”는 팍팍한 삶은 반복된다. 목덜미가 지워져가는 ‘나’의 공포와 절망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희고 반짝”이는 “말의 뼈”에서 기인한다.

  내 안에서 반사적으로 호명되는 이름들, 누군가 밟아서 바닥이 지워지는 자리들, 그 상처들은 나와 너의 구분을 지우고 크림처럼 뭉개지기에 하지 못한 말과 듣지 못한 말들은 은폐되고 침수된다. 그 하강의 방향은 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만 깊어져 “이끼”를 자라나게 하고 “그늘”을 불어나게 한다.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 듣고 싶었던 말과 끝내 듣지 못한 말들이, 온통 내부의 소용돌이로만 전도되는 시절. 더 이상 “스물처럼 깃털을 부풀리면” 안 되기에 “입을 막아도 할 말이 남”지만 질문은 “씹”고 대답은 “숨”겨야 하는 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손나팔”을 불어야 하는 아득하고 불가능한 순간. 이 불가역적이고 불가피한 세월의 가속도는 집요하게 ‘나’를 추적하고 압사시킨다.

  순식간에 장면의 인상을 탈환하는 크로키처럼 이 시는 몰아치는 시간의 속도와 비정형인 바람의 운동성을 포착한다. 흔들리고 떨어지고 날아가는 삶의 한 자리를 폭풍의 눈처럼 자화상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방금 잠에서 깬 얼굴”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가늘고 긴 소리”로 소실점에서 잦아들고 멀어지며, “동풍이 창문을 무너뜨리”는 마모와 붕괴의 순간을 자기의 전 생애로 조준하는 이 시위야말로 시의 키아로스쿠로를 완성하기 위한 시인의 신념이자 기획이다. 그는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자주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며 깨어지고 피 흘리는 자신의 깜깜한 삶을 기꺼이 빛의 피사체로 바친다. 예술가의 자화상은 가장 깊은 내부의 어둠까지도 그림의 질료로 내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창 너머에 있을 빛을 짐작케 하고 명암의 윤곽을 부상시킨다.

 

 

  파리의 겨울은 늘 세 번째 전생 같다 결혼식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류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어 결혼식 사진이 나왔는데 누구도 날 찾지 못해 프랑스에 머문 친구들은 그런 말을 자주 했어 갔다 오면 정신병자가 되거나 우울증을 앓게 된대 가보지 않고 앓는 병은 어떤 걸까

 

  하녀방이라 불리는 곳에 살았어 옥탑으로 민트색 바람이 불지 처음엔 소공녀 다락방을 떠올렸어 파리에 동화 같은 건 없는데 거기선 늘 바닷물에 발이 젖는 꿈에 빠져 방 모서리를 타고 들려오던 목소리

창이 그리워 생샤펠 성당에 갔어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굴절된 빛들이 창을 통과하고 갑자기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 오는 일을 그것이 쏟아지는 것을 복원가들은 왜 천사의 한쪽 팔을 방에 숨겨 두었을까

 

  하녀방은 버려진 축사 같아 종종 창을 바라보며 열기구로 탈출하는 건 어떨까 신문을 보고 서독의 부를 부러워한 동독 사람들처럼

  학교에서는 이집트, 터키 애들 틈에서 발표란 걸 했지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카페에서 맥주와 라자냐를 떠먹는 날들

  하루는 흑인 남자가 다가와 남는 라자냐를 줄 수 있냐고 물었고

  식당 주인은 그를 쫓아냈지

  발밑을 걸어 다니는 비둘기 떼

  정오의 눈부신 도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서 있었고 방학에 남부에 놀러가서도 친구 같은 건 사귀지 말자고 결심했지 아니 북부든 남부든 친구란 것을 가진다면

 

  오늘은 소도시 예술 대학에 모티바숑을 제출하고 유화를 샀어 눈코입이 피와 선으로 흘러내리는 초상화 온통 흐르는 피로 가득한 코튼 모스 모스 류, 우리 중 하나가 멈출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이 거리는 자비를 보여주지 않을 테지 내가 죽으면 가난한 새 주인이 올 테고, 떠나는 유학생에게서 산 침대가 놓이고 그 아래 고양이들은 혼자가 되겠지

 

   *불어로 자기소개서.

― 주하림, 「모티바숑(motivation)*」 전문(《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소공녀의 다락방을 연상하게 하는 파리의 어느 옥탑에서 ‘나’는 거주한다. “하녀방”이라고 불리는 곳 “버려진 축사 같”은 그곳에서도 ‘나’는 “늘 바닷물에 발이 젖는 꿈”에 빠지고 “창이 그리워 생샤펠 성당”에 간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과 그 시공간 바깥의 무한한 하늘을 대비시키는 이 시의 구도는 연쇄적으로 가로막힌 겹겹의 벽들을 건축한다. 세 번째 전생처럼 느껴지는 파리부터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결혼식까지, 열기구로 탈출하는 상상을 일으키는 옥탑방에서 빛이 굴절되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남는 음식을 구걸하는 흑인 남자로부터 학교에서의 발표까지, 두 간극은 천상과 지상처럼 멀다.

  어느 소도시 예술대학에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나’는 눈과 코와 입이 온통 피로 흘러내리는 유화를 산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자비가 없는 이 거리에서 ‘나’는 죽을 테고 또 가난한 새 주인은 이곳에 올 것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생산성의 톱니바퀴와 그 틈에서 끝없이 소모되는 존재의 비참성을 전경화하고 있는 이 시에서 예술가의 자화상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우울증을 앓”듯 쇠락해간다. “친구 같은 건 사귀지 말자고 결심”해야 하고, 내가 죽은 뒤에 “고양이들은 혼자가”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고 다짐할 때 예술가의 초상은 계시된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 오는 일” 바로 그 무모하고 절대적인 경배와 헌신이야말로 예술적 자기 세계를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창을 통해 바깥에서 안으로 굴절되는 빛을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창을 부수어버림으로써 온전한 어둠 자체인 바깥으로 진군하는 키아로스쿠로에서 시적 자화상의 원근법은 제 안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다.

  ‘나’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한 유리창 곁에서 자기의 심연에 골몰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배치가 아니다. ‘나’는 견고한 벽이 아닌 투명한 창 앞에서 저 너머의 세계와 언제든 조우할 수 있는 필연적인 위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나’는 피투성의 존재로 무한한 세계에 진입한다. 최후의 보루였던 유리창의 경계마저 깨어지는 이 파열음은 ‘나’가 거주자로서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비로소 내부와 외부가 해제된 예술적 세계를 활공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예술이 비참하고 고독한 생활 속에서도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가는 자기 갱신과 극복의 행위라면 자화상은 그러한 예술적 사명과 본령을 현현하기 위해 자기의 전부를 걸고 자신을 복기한다는 점에서 가장 밀도 있는 자기 탐구과 발견의 과정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윤동주가 시대의 어두운 우물 안에 유폐된 자신을 미워하고 연민하며 돌아서고 되돌아오길 반복했듯이, 서정주가 죄인과 천치의 낙인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맺힌 시의 핏방울을 따라 병든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왔듯이, 시에서 자화상은 가장 순수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계속해서 변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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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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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