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tra Form Output
저자 신수진 

 2021년 9월 공시사 월평 


 

 

 

 

 

금과 틈

  

• 신수진

 

 

 

 

 

  ‘나’와 ‘너’라는 두 항은 시의 조감도에서 입구와 출구다. ‘나’는 ‘너’를 찾아가는 먼 길에 올라 대답 없는 ‘너’를 부르고 멀어지는 ‘너’를 따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므로 ‘나’는 우거진 기억과 대화법의 웅덩이에서 ‘너’와 조우한다. 잘못 든 길에서 돌아 나오거나 길이 아닌 곳을 길로 만들어가는 이 경로에서부터 바야흐로 시는 개시된다. 경로를 이탈하거나 경로가 없는 이 주행 원리는 시가 추구하는 작동 방식이다. 그렇게 움직일 때 금과 틈 사이로 ‘나’와 ‘너’의 만남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여기 “같은 진입로를 향하고 있었”지만 끝내 깨지고 바스라진 거울 앞에서 피 흘리게 된 ‘나’와 ‘너’가 있다.

 

 

   우리는 같은 진입로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의 감정이 조금씩 비껴가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졌는데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 몸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우리가 함께 손잡고 걸어가고 싶던 장소는 분명 리스본의 주황색 지붕 아래였다

   왜곡은 종종 우리의 거리를 멀게 한다

   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우리는 두 갈래의 오솔길처럼 걸었다

 

   나는 리스본에서 페이스트리를 사 들고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향한다

   페이스트리는 겹겹의 표정으로 발효를 끝내고 모든 언어는 묵언에 든다

   보드카의 밤과 페이스트리의 정오가 바스러진다

 

   우리의 순간들이 서로의 손톱을 어루만지다 가벼운 상처로 붉은 꽃이 피고

   꽃잎 사이로 악담이 몰려온다

   꽃이 다 깨질 때까지 우리는 좀 더 피 흘리기로 한다

 

   조금씩 금이 가고 어떤 틈 속에서는 다행히도 무언가 자란다

― 조미희, 「거울이 깨지고 그 틈에서 우리가 자랐다」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8월호)

 

 

  같은 길과 다른 길,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거리, 만나거나 비껴가는 순간들은 ‘나’와 ‘너’가 ‘우리’였을 때로부터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우리’는 분명 함께 손잡고 “리스본의 주황색 지붕 아래” 도착하고 싶었지만 “두 갈래의 오솔길처럼 걸”었고 어느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장소를 거닐게 된다. 그렇게 한때 ‘우리’였던 ‘나’와 ‘너’의 손톱 사이로 붉은 상처가 악담처럼 만개하고 그 꽃이 다 깨질 때까지 서로는 피를 더 흘려야 한다.

  ‘나’와 ‘너’가 불화하고 헤어짐으로써 마음껏 길을 잃도록 안내하는 시의 조감도에는 곧은 길보다 구부러진 골목이 우리를 환대하고 내리막길보다 솟아오르는 오르막길이 우리를 계몽한다. 허물어지고 기울어진 ‘나’가 축조해가는 불완전한 거울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너’의 언어와 감정들을 자기 내부의 깊이와 넓이로 확보하면서 스스로를 기꺼이 봉인한다. ‘나’의 폐허는 ‘너’를 복기하면서 거울 속의 거울 또 거울 속의 거울들로 나아가는 패러다임으로 고안된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금이 간 그 틈 속에서 “다행히도 무언가 자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생명이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듯 금이 가고 틈이 벌어진 곳에서는 한 세계가 태어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처와 출혈을 전제한다. 성장의 문법에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통과의례의 수순이 있듯, 자아와 타자의 프레임에서 결핍과 상실을 횡단하는 ‘나’는 모세처럼 눈물을 건너갈 때만 역설을 딛고 ‘너’를 회복하며 ‘우리’와 만나게 된다. ‘나’와 ‘너’를 초월해 ‘우리’로 향해가는 이 원대한 도약은 고요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통과 파열의 지각변동을 통해서만 이룩된다.

  ‘나’는 온전히 혼자서 존재를 결정하거나 완성할 수 없으며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로 구성되고 규정되어간다. ‘나’는 ‘너’에 비춰볼 때만 비로소 ‘나’의 실루엣을 갖게 되고 ‘너’ 역시 ‘나’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너’ 자신을 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반사체로서 ‘나’는 ‘너’라는 거울 없이 존재를 증명받을 수 없고 ‘나’의 거울에 의해서만 ‘너’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금이 간 거울의 틈에서 ‘우리’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결코 홀로 성립되지 않으며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만 성립되는 자아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만 한다면 타자와의 만남은 불가능하다. ‘나’를 적극적으로 내어주고 ‘너’를 받아들일 때 ‘나’는 존엄과 가치를 지닌 더 크고 충만한 ‘나’로 거듭날 수 있다. 인격적이고 동등한 주체와 주체의 만남을 통해서만 ‘나’와 ‘너’의 존립과 공존은 가능해진다. ‘나’는 끝없이 ‘너’를 부름으로써 ‘너’가 ‘나’에게 오는 길을 만들어간다. ‘너’의 부재는 상실과 절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오는 길을 복원하는 회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너’를 기다림으로써 ‘나’를 맞이하고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너’를 만나게 되는 인정과 포용의 원리만이 ‘나’와 ‘너’의 존재를 ‘우리’로 귀환하게 한다.

 

 

   이 거리에는 동상이 참 많습니다

   검은 몸 위에 빗물 자국이 가득한데요

   나무들이 자라나는 동안

   동상은 동상이고

   낡는 것과 자라는 것의 사이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벤치

   죽은 나무로 만든 기호 위에서

   사람들 이야기를 훔쳐 들었는데요

   새 우는 소리도 듣고

   우는 사람의 하소연 같은 것들에 귀 기울여보았습니다

   분수 앞에서 고민하고

   새파란 잎이 떨어져 있습니다

   구름이 박힌 하늘은

   움직이고 있을까요 무엇이

   낡아가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자라나게 하나요

   나는 시간이 많고

   괘종시계와 손목시계의 일초는 같아요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오늘은 잘 보였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기다리기

   각질이 떨어지고

   마음 한 곳에 사라지지 않는 겨울을 두고

   눈사람을 만들고 녹였습니다

   눈사람과 동상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거

   둘 다 찰나일까요

   가르침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강박합니다

   어깨에 묻은 새똥을 모르고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쉽게 말하고

   사는 일은 어렵네요

   지폐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데

   세계는 풍요롭고

   동상은 번들거려요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낱알들을 눈이라고 불러봅니다

   내 몸속에 있는

   내 몸

   내 몸속에는 내 몸뿐

   당신은 혼돈이 아닙니다

   위태롭지도 않습니다

   음영은 어디에나 있고

   입체를 느끼게 하고

   나는 특별하다고 믿는 정신이 당신을 뻔하게 만들고

   신기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어 보려고

― 전호석, 「학림」 전문(《현대시》, 2021년 8월호)

 

 

  이 시의 무대장치는 동상과 ‘나’의 배치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무들이 자라나는 동안 동상이 낡아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 ‘나’의 곁으로 “사람들 이야기”와 “새 우는 소리”가 지나가고, 분수 앞에 떨어진 “새파란 잎”과 구름과 하늘의 “움직”임이 지나간다. ‘나’는 벤치에 앉아 ‘나’를 둘러싼 세계를 관찰하고 고민한다. “무엇이 낡아가는 것”인지 “무엇이 우리를 자라나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내 부동자세의 이유다.

  사소한 움직임과 시시각각의 변화들을 사색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동상처럼 움직임이 없어지는데 이는 ‘나’ 역시 저 풍경의 일부로 조형되어가는 중임을 보여준다. 서서히 동상이 되어가는 ‘나’도 거리에 가득한 동상처럼 낡아가는 것과 자라는 것 중 어느 쪽에 속하게 될지 결정될 것이다. 그 엄중한 선고를 기다리며 ‘나’는 내가 속한 세계와 ‘나’의 관계를 응시한다.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시간을 초 단위로 감각하는 ‘나’는 외부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내부를 탐구하면서 그 내부가 어떻게 외부로 현현되고 고착될 것인지 숙려하고 예비한다.

그렇게 마음 안에서 계절이 지나갈 때 “눈사람과 동상은 만들어지고 사라”진다는 것, 결국 “둘 다 찰나”일 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 허망함으로 인해 시니컬해진다. 동상들은 배움의 숲인 학림(學林)에서 우상이 된 기념비들인데 그것은 본받고 계승해야 하는 정신의 궤적이기도 하지만 빗물 자국을 얼룩으로 새기며 낡아가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기도 하고 한때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열었지만 새롭게 뜨는 태양에 덧없이 녹아내리는 눈이기도 하다.

  ‘나’는 무한한 차원을 영위하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어깨에 묻은 새똥”처럼 실재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너머 관념적이고 영구적인 “가르침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는 풍요롭지만 개별적인 ‘나’는 “지폐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 처지라서 그 간극을 목도하는 일은 외롭고 고통스럽다.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사태를 조망하는 이 거리감은 계속해서 “내 몸속에 있는” 것은 “내 몸뿐”이라는 사실, 이 즉물적인 육체성과 감각적인 구체성을 환기한다. 그렇게 존재론적 부조리는 ‘나’로 하여금 자라나는 나무의 영원성도 우러러보는 동상의 추상성도 되지 못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일 초씩 움직이는 손목시계의 바늘 같은 유물론의 세계를 배회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없이 배움을 추앙하고 빈곤을 감수하면서 하나의 동상이 되기 위해 학림에 남는 것을 택한다. ‘나’는 이제 ‘당신’을 혼돈이나 위태로움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 음영은 도리어 “특별하다고 믿는 정신”과 “신기한 이야기”를 찾아가기 위한 입체적 경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 풍경 가운데 어느 부분에 어떤 포즈로 자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획으로서, 낡아가거나 자라나는 물질계의 풍화 작용을 견뎌내면서, “뻔하”지 않게 ‘너’에게 다다르기 위한 동선을 구축하면서, ‘나’는 풍경화의 한 모서리가 되어갈 것이다. 그 때에 ‘나’는 나무처럼 자라나는 이 거리의 파수꾼이 될 것이고 동상처럼 시대를 넘어 기억될 것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는 저 90년대의 전언처럼, ‘지금’ ‘여기’ 우리의 시대 또한 금이 가고 틈이 벌어지며 다가오는 발아의 순간을 예고하고 있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바로 전’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개봉되기 바로 직전, 고대하던 시간을 맞닥뜨리기 바로 직전, 모든 것이 환히 펼쳐져서 마침내 전반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바로 직전.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직전에 서 있다.

  작은 씨앗 한 알에 수백 년을 살며 천지 가득 잎사귀를 피워올리고 수많은 도토리들을 떨구어줄 참나무의 위대한 생이 계시되어 있듯, 이 땅 곳곳에서 자라나는 금과 틈은 ‘나’와 ‘너’로부터 피어날 ‘우리’의 출현을 암시하는 가공할 징후다. 여기와 거기에서, 이편과 저편에서, 우리와 너희에서, 시는 꿈틀거리고 들썩이며 솔기의 끝이 뜯기는 고유한 플롯을 보여준다. 그 전도된 불가능성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우리’의 테제를 도출하기 위해 시는 겹치고 어긋나며 번복된다. 언젠가 쓰고 지우길 거듭해온 그 지극한 문장들은 금과 틈으로 깨어지고 부서져 다음 세대에게 기억하고 경배하는 미래가 될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시는 이 자리에서 금을 그리고 틈을 벌리며 찰나를 영겁으로 전회하는 꿈을 꿀 것이다.

 

 

 

 

 

 

 

 

 

 


 

연재-신수진.jpg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ㅡ

202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