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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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1년 7월 공시사 월평 


 

 

 

 

 

테트리스와 프로게이머

  

• 신수진

 

 

 

 

  테트리스 게임은 새로운 모양의 블록이 출현할 때마다 먼저 도착한 블록 가운데 어떤 블록에 결합시킬지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관건이다. 블록은 점점 가속되며 떨어지고, 자기 자리를 찾은 블록은 장벽의 일부가 되고, 빈틈없는 한 단이 축조되면 딱 그만큼의 한 단은 허물어진다. 그렇게 쌓고 부수고 쌓고 부수지만 각이 맞지 않는 모서리의 공백이 누적되어 장벽이 높아지면 아랫단이 가파르게 차올라 결국 게임은 끝난다.

  테트리스의 룰은 삶과 닮아 있다. 날아드는 독촉장처럼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문제들이 위험 수위까지 적재되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해치우면서 매 순간을 쌓고 무너뜨리며 버텨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거나, 병력을 증설하고 기지를 구축하거나, 걸음을 내딛을 때 지뢰가 터지거나, 미로에서 길을 잃는 따위의 판타지는 여기에 없다.

  테트리스와 삶에서 가장 가공할 공포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날마다 태연히 개시되는 숨 막히는 ‘동일성의 반복’과, 잘못 끼워 맞춘 바로 전 순간의 블록 때문에 지금 여기의 어긋남을 적나라하게 직시해야 하는 ‘불가역성의 선고’로부터 기인한다. 이 동일성과 불가역성의 게임은 서서히 빨라지는 시간과 가득 메워지는 공간에 의해 묵시록처럼 죽음에 다가간다.

 

 

   해변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힘을 오므릴 때

   바다는 움찔거리는 파도의 힘으로 견딘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런 것이므로

   서로 살을 맞대는 것이 저런 것이므로

 

   해변이 죽은 남자를 옮기듯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모래를 한 옴큼씩 파내주면서

   죽은 남자의 키를 가늠하면서

   죽을 때의 눈빛까지 생각하듯이 천천히

 

   해변이 잔인해질 때

   죽은 갈매기를 놓고 호륵호륵

   입김 놀이를 하는 것은

   아직 저기 머뭇거리는 영혼들이 어리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을

   이제 좀 알 나이도 되었기에

   바다가 잠시

   해변의 장난을 받아주기도 한다는 것

 

   살아있는 척 않는 하늘이

   날마다 죽은 척 하는 건 아니어서

   대체로 서로의 선에서 토닥거리며

   또 해결하며 사는 것

 

   거품을 문 게 바다인지 해변인지

   의뭉스런 또 하루가 시작된다

   바다가 해변을 놓고 있는 건지 간곡히 붙들고 있는 건지

   생존이라는 말이 잠시 멍해진다

― 천수호, 「생존이라는 말」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6월호)

 

 

  해변과 바다는 “알 수 없는 방향”의 힘을 “오므리”고 “움찔거리”며 간신히 “견디”고 있다. 쌓음으로써 무너뜨리고 무너뜨림으로써 쌓아가는 이 반복과 유지는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리드미컬한 호흡법이다. 달은 차고 기울고, 파도는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해변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모든 것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되돌아온다.

  해변이 제 모래로 장사를 지내듯 “죽은 남자를 옮기”고 “죽을 때의 눈빛까지 생각”할 때 바다는 생사를 관장하는 신이고, 해변이 “죽은 갈매기를 놓고” “입김 놀이를 하”며 유희를 벌일 때 바다는 어린 영혼의 장난을 받아주는 어머니다. 이렇게 신과 인간으로 혹은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로 바다와 해변은 설정되어 있다. 해변으로부터 바다는 언제나 선행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바다는 해변을 창조한 근원이고, 바다에 의해 해변의 운명은 결정된다는 점에서, 바다는 해변을 해변으로 존재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나 신과 어머니는 그 뜻을 다 계시하지도 이루지도 않는다. 바다는 “움찔거리”고 “견디”며 “받아주”고 “해결하”며 거기에 있을 뿐이다. 바다가 해변을 “놓고 있는 건지” “붙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장면은 쌓음으로써 무너뜨리고 무너뜨림으로써 쌓아나가는 테트리스처럼 무엇도 예측할 수 없고 길항 관계 속에서만 지속할 수 있는 생존의 작동 기제를 보여준다.

  삶은 계획대로 착수되거나 명징하게 정의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망망대해의 무연한 안개 속에서 표류한다. 날씨는 변덕스럽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한순간도 예견할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죽음과 함께 항해하고, 부서진 난파선처럼 좌초하면 뜻밖의 우연과 조우해 새로운 항로로 가기도 한다.

  자아나 계획이 완전하게 반영되거나 실현되지 않고 불운과 재난이 잠식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삶은 혹독하고 불공평한 생존이며 게임이다. 그러나 오늘의 태양은 영원토록 한 번뿐이고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너와, 마음도 언제까지나 한 번뿐이라는 점에서 지금 여기는 애틋하고 찬란하다.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과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엇도 결정할 수 있고 무엇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름없는 충만한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을 뜯어먹는 토끼들이 보인다

   바다에는 바다보다 큰 배가 보인다

   시간이 주름 가득한 흰개의 얼굴로 짖는다 내가 지나가는

   모르는 고장의 동맥이 또 끊어진 것 같다

   쏟아지는 피에 거구의 여신이 드레스를 깨끗이 빨고 있는 것 같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3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

   할머니가 발가락처럼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기차바퀴가 끽끽, 마찰음으로 울었다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 진은영,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전문(《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바다보다 큰 배”가 있는 이 초현실적인 바다는 전도된 세계의 전경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프레임 안에서 시간은 “주름 가득한 흰개의 얼굴로 짖”고, ‘나’는 “모르는 고장의 동맥이 또 끊어진 것 같”은 사태를 목도하며 지나간다. 시공간은 불안정하고 위협적이며 위태롭다. 이를테면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같은 박해와 학살의 현장과 사회적 함의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유혈이 낭자한 이 땅보다 “쏟아지는 피”에 “거구의 여신”이 드레스나 빨고 있다는 것에 더 환멸을 느낀다.

  “매일매일 자살”하는 세계를 구원하고 있는 것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 그 자체로 화한 인간이며, 대속하듯 죄를 짊어진 인간의 성스러운 지옥도에 기생해 이미지를 세탁하고 있는 것은 고도로 비대해진 신이다.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 “3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은 인간에게 오직 절망, 끝없는 절망만을 선사함으로써 인간을 질문하는 존재, 그리하여 고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은 “끽끽, 마찰음으로 우”는 “기차바퀴”처럼 스스로 죽음이라는 제동을 걸음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마지막을 간구하기에 이른 인간이 흘린 숭고한 피의 제의를 보여준다. 신과 인간이, 천국과 지옥이, 삶과 죽음이 모두 뒤집혀 있는 이 시는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을 뜯어먹는 토끼 우화를 통해 세계의 비의와 존재의 비극을 역설한다. 여기에는 불의로 정의를 배우는 절망과, 죽음으로 살고자 하는 결기와, 고통으로 슬픔을 이해하는 사랑이 함께 있다.

  떨어지고 쌓이고, 밀고 돌리며, 하나의 세계가 세워지고 몰락하기를 반복하는 테트리스는, 부당하게 던져진 채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시공간의 압박에 맞서 분투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자신의 결승선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공평한 우리의 삶과 흡사하다. 매 순간 총탄처럼 날아오는 블록들을 끼워 맞추며 각고의 노력으로 버티지만 궁극엔 누구나 뒤죽박죽 차오른 도형 속에서 삶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유한함과 유일무이성 때문에 삶은 모든 순간이 완전하고 아름답다. 하루하루가 세상의 첫날이기에, 모든 우연과 필연이 어떻게 역사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게임은 또 시작된다.

  관중도 함성도 없는 이 구석진 자리에 주저 없이 출전하는 자는 프로게이머다. “거품을 문 게 바다인지 해변인지” 모를지라도,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을지라도, 텅 빈 화면을 결연하게 주시하는 기사는 삶을 빼곡하게 기입하고 또 지우며 마지막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형벌처럼 아니 훈장처럼 예정된 패배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그 성실한 무모함이 바로 테트리스의 룰이며 삶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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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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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