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
2021년 6월 공시사 월평
봉인된 연대기를 복기하는 흙과 나무의 계몽주의
• 신수진
자연은 시적 자아에 영감을 주고 세계를 개시한다. 자연은 시학의 계보에서 육체의 기원이자 정신의 결정체로 건재해왔다. 어떤 시인들에게 자연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이데아다. 자연은 생명이며 생산이고 순환이자 재생의 의미로 쓰이며 그 대립항인 인공은 죽음과 파괴 그리고 소모와 폐기로 전도된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불모의 기아로 변질되는 패러다임의 문명비판 시들은 공존의 가치를 역설한다. 식물의 고유한 생태가 물활론적 세계관과 조응해 인식론적 깨달음을 주고 동화와 지향의 대상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생계 목록들
어느 연대기 속에서 시작되어 지금껏
봉인된 씨앗과 알몸들
몽상을 즐기던 여린 싹은 실핏줄 같은 뿌리를 내리고
단단한 근육을 만드는 중이다
발길에 밟혀 죽은 지렁이의 비릿한 향이 스미고
야생 고양이 턱에 묻은 비둘기의 피를 부드러운 흙에 비벼대던 영역
손금 같은 샛길 사이를
속도 느린 달팽이의 끈적한 흔적을 따라
생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갸륵해 하던 시간
당신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어
미완의 문장으로 영원히 남겨놓고 싶던 곳
한 계절 위장하기 좋은 눈(雪)의 독경을 들으며
은밀하게 행방을 감추며
마디마디 이력을 쓰고 있었을 신분들이
봄기운으로 발아되기 전
단단한 표면을 부수는 치명타*에
찢고 가르고 흔들어 놓는다
아랫배 안에 감추고 있던 천 개의 비밀들이
파헤쳐지고 있다
*굴착기
― 신새벽, 「파헤친 흙에서 신상 털기」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6월호)
이 시는 자연을 인간적 사유로 해석하는 물활론에 의해 작동된다. “봉인된 씨앗”과 “몽상을 즐기던 여린 싹”은 흙 속에 실핏줄을 내려 단단한 근육을 만드는 중이다. 흙, 씨앗, 뿌리, 줄기는 과학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자아의 육화된 내면이다. 시적 자아가 사물에 이입되어 사물의 언어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가 전제되어야 한다.
흙은 그 자리를 횡단했던 하나의 연대기를 복원한다. 그곳은 발길에 밟힌 지렁이의 비릿한 죽음이 있는 곳이고 야생 고양이가 턱에 묻은 비둘기의 피를 비비던 곳이다. 시적 자아는 달팽이의 느린 흔적을 따라 흙의 손금 사이를 되짚어간다. 그것은 흙을 통해 “생을 골똘히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눈(雪)의 독경을 들으며” “마디마디 이력을 쓰고 있었을 신분들”은 봄을 맞기 전 “찢고 가르고 흔들어”지면서 발굴된다. 흙은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기계 문명의 거침없는 작업에 그만 내밀한 가계의 내력을 발각당하고, “미완의 문장으로 영원히 남겨놓고 싶던 곳”은 부정과 반동의 신호에 의해 해체된다. 굴착기가 땅을 열고 흙을 파헤치면 이곳은 더 이상 “천 개의 비밀들”을 간직한 요람이 아닐 것이며 건축 사업이 성행하는 개발 지역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봄의 조감도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은 흙에 대한 보존 의식에서 자연에 대한 수호로 확대된다.
시는 흙 속의 “생계 목록들”을 시적인 순간으로 고양시키는 착상 능력을 전시한다. 흙을 바탕으로 영위되는 자연물들의 운동은 문학에서 인격화된 모델로 추앙된다. 시에서 온 세상을 덮는 흙이나 눈은 압도적인 자연 현상 자체이기도 하지만 삶을 통찰하도록 하는 기제다. 그래서 연대기를 보유하고 있는 흙과 그것을 훼손하는 굴착기의 구도는 자연과 대결하는 문명을 닮았다.
최대의 효율성과 생산성 도출을 위한 현대 문명의 시스템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공존의 룰을 깨뜨리는 위험한 방식으로 인간을 비롯한 생태계 전체를 잠식해가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과 그것을 추동하는 자본주의 모델은 미래 세대에 대한 죄책감 없는 잉여 생산과 과잉 소비를 연료로 가속화된다. 이 브레이크 없는 열차는 결코 멈추거나 회귀할 수 없기에 소외와 상실・차별과 배제・착취와 지배 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메커니즘을 더욱 공고히 한다.
현대인들은 기계적인 리듬에 길들여져 사회 내부를 톱니바퀴처럼 돌고 돈다. 획일적인 과정을 거쳐 체계 속에 편입되므로 통섭적 사고가 어렵고 경제적으로 환산될 수 없는 영역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된다. 자연을 미학적 관념이나 수사가 아니라 핍진한 삶에 대한 응답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이 시는 공존의 테제를 재고하도록 계몽한다.
극락전이 건너다보이는 발치에서
백여 년을 훌쩍 보낸
표지가 낡은 책
백운봉과 함왕봉의 갈피에 꽂힌
그의 저서를 펼쳐 본다
가파른 기슭의 첫 단락을 시작으로
젖은 둥치의 다음을 읽다가
어둠에서 일어서는 횃불을 마주한다
바람이 거셀수록 번져가던 불길은
함성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외마디 한 줄을 적어놓았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장대비가 지나간 아침
끊긴 행렬처럼 하나둘 사라지고 돌아온 기록들은
사나사* 깊은 골에
꽃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사나사는 고려 전기(923년)에 지어진 사찰로 1907년 양평 의병의 근거지였다. 당시 의병과 관군의 충돌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 안진영, 「나무 한 권이 서 있다」 전문(《문학의오늘》, 2021년 여름호)
시에서 자연은 기계 문명과 대립하는 기호로 표상되기도 하고, 역사적 지역이나 사건과 연루되어 그 의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때 자연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좌표로 현현되는 것이다. 여기 특정 시대 인물과 배경을 상징하는 천년 사찰의 나무는 식물적 상상력과 조우해 시적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
“백여 년을 훌쩍 보낸 표지가 낡은 책”은 “백운봉과 함왕봉의 갈피에 꽂”혀 있다. 한 세기가 넘도록 그 자리를 횡단해간 바람의 내력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 몸에 기록해왔던 이 장엄한 직립의 자세는 그 자체로 시적 자아를 계몽한다. 나무는 자기 삶을 거짓 없는 페이지로 씀으로써 하나의 연대기를 증거한다. 그 책은 “가파른 기슭의 첫 단락”과 “젖은 둥치”로 전개되다가 마침내 “어둠에서 일어서는 횃불”로 클라이막스에 이른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라는 외마디 한 줄의 배경은 이렇다. 당시 고종 황제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고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뒤 일제에 의해 퇴위당했고 대한제국 군대 역시 해산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봉기했다. 1907년 10월 27일,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양평 의병은 격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은 용문사와 상원사 그리고 사나사까지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폭력과 광기의 악천후를 관통하는 함성이고 기도였던 횃불은 꽃과 나무로 피어 그 시간을 증언한다. 이 땅은 무한한 싸움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궐기했던 숭고한 정신, 망설임 없이 다시 벼랑 끝으로 향했던 활공의 정신이 지켜낸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최후의 보루에서 흔들리며 핀 꽃은 이제 한 권의 아름다운 경전이 되어 나부낀다.
침략과 약탈에 굴하지 않는 자존과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이 행렬은 죽음의 땅을 개간하는 유일한 기적이 된다. 온 대지에 울리는 나무의 만종이 마른 잎들을 살려내고 찬란한 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거짓과 불의에 맞서 생명과 존엄을 깨우쳐준 의병의 생애를 나무의 서사로 치환함으로써 역사적 사상과 실천은 형상화된다.
앞의 시가 문명 세계의 역기능들을 해부되는 흙으로 보여주었다면, 뒤의 시는 역사적 비극에 응전했던 위대한 신념을 피의 나무로 조형했다. 흙과 나무라는 자연의 기호로 문명과 역사를 회복하고 전망을 타전해가는 것이다. 식물적 상상력과 물활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자연 모티프의 시에서 봄은 새로운 탄생과 시작을 알리는 르네상스의 서문이다. 두 시에서 봄이라는 말이 이토록 눈부신 이유는 어린 새잎으로 기어코 새 시대를 개막하기 때문이다.
흙과 나무가 뿌리내린 세상은 광포한 지각변동으로 비틀리고 이지러지면서 이들을 몰락시킨다. 그러나 그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만 공중의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으므로 흙과 나무는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를 때라야 봄을 명중할 수 있게 된다. 봉인된 연대기를 복기하는 흙과 나무의 계몽주의는 그렇게 시적 사명과 극기로 반자연주의 사태를 봄기운이 만연한 화양연화의 시절로 전복한다.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ㅡ
2021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