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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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1년 5월 공시사 월평 


 

 

 

 

 

착한 꿈의 트랙을 배회하는 어른아이

 

• 신수진

 

 

 

 

 

  영화 〈친구〉(2001)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내는 니 시다바리가?”, “니가 가라, 하와이”, “마이 뭈다 아이가. 고마해라” 등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대사들을 남기며 유례없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긴장감 넘치고 갈등이 고조되는 그 유명한 장면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가 나눈 대화다.

 

  상주가 된 준석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수야, 인자 내는…… 고아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니는…… 어른아이가.”

 

  맨몸의 소년들을 키워준 반짝이는 바다와,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부산항의 비린내와, 의리와 치기로 뒤범벅된 학창시절과, 칼부림으로 치닫는 음모와 파국을 모두 압도할 수 있었던 이 짧은 대화는 이상하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란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 알아간다는 것. 그것은 부모를 여의는 거대한 슬픔과도 같다.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것인지.

 

 

   찬송가를 들으면서 나는 멀리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척 곁에 앉아 찬송가를 따라 부르다가 나는 도무지 모르는 마음이 되어

 

   잠깐 갔다 올게. 흔들흔들 친척의 손을 잡고 따라간다. 내가 모르는 산책길 희뿌연 먼지와 해 질 무렵 담벼락, 후미진 골목 재 따위로 얼굴을 부지런히 더럽히면서

 

   아주 잠깐이면 돼, 어느새 친척은 재봉틀 앞에 앉아 희미한 빛을 들들 박아 모자를 만든다. 기다릴 수 있지? 모자가 완성될 때까지

 

   얘야, 내 어머니는 가난한 모자 장수였지. 반쯤 잘려나간 말을 꿰매어서 만든 얼룩덜룩한 이야기, 무질서하게 이어지는 조각보 같은 이야기를 뒤집어 쓴 채 엄마는 나를 낳았단다.

 

   나는 듣는다, 스며든 빛이 제법 환해서 다시 눈이 감길 때까지. 하루 중 가장 길다는 그림자의 길이를 생각하면서

 

   아주 잠깐인 것 같았어. 삶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구나. 친척은 내게 모자를 깊이 눌러 씌운다. 검푸르게 상해가는 저녁, 저무는 이파리와 제법 좋은 냄새를 풍기는 불행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듯

 

   나는 반짝 눈을 뜬다. 어제보다 더 하얗게 늙은 모자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꿈이 사라지면 안 될 텐데, 걱정한다.

― 김경인, 「낮잠」 전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5월호)

 

 

  “찬송가를 들으면서 나는 멀리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 검은 튜브를 타고 바다 위에서 놀던 네 명의 소년들도 어느 순간 자신들이 너무 멀리 왔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 전반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준석과 동수의 운명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잘못 지나온 궤적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정신없이 헤매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난 듯 자신의 낯선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다.

  “희뿌연 먼지”와 “후미진 골목 재” 따위로 “얼굴을 부지런히 더럽히면서” 당도한 곳은 “희미한 빛을 들들 박아 모자를 만드”는 친척의 재봉틀 앞이다. 살아온 날들은 손상되고 무질서한 조각들을 꿰매놓은 조각보처럼 불완전하게 복원되고 ‘나’는 환한 빛 속에서 하루 중 가장 긴 그림자를 생각하면서 혼곤한 낮잠에 빠진다.

  삶과 죽음이, 잠과 꿈이, 어제와 오늘이 온통 전도되어 있는 이 시에서 ‘나’는 “저무는 이파리와 제법 좋은 냄새를 풍기는 불행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듯” 검푸르게 부패하는 저녁을 목도한다. 찬송가를 듣고, 어디론가 따라가고, 모자를 기다리고, 잠이 들고, 모자가 씌워질 때까지 피동형으로만 쓰여지는 이 행렬 속에서도 ‘나’는 꿈이 깰까 걱정한다. 얼룩덜룩한 이야기를 깁던 가난한 모자 장수처럼 지금 여기를 또렷이 인지하거나 주도하지 못하는 ‘나’는 역설적으로 그런 가수면 상태에서만 꿈 밖의 현실이 본래 어떻게 직립해야 하는지를 복기시킨다.

  순순히 타협하거나 쉽게 구원받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나’는 이제 그 무엇도 지렛대가 될 수 없는 가파른 꿈의 경사에 기꺼이 제 삶을 건다. 그렇게 ‘나’는 필연적으로 길을 잃으며 낮잠이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잠든 시간이 도래했을 때만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역설의 배후를 드러낸다. 이 어른아이는 낮잠에서 깨어난 뒤 하얗게 늙어버린다.

 

 

   여자는 나무 꼬치로 은행 알을 꿰고 있다

   과도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랫배를 찔렀다는 기사가 거실바닥에

   깔려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앞자리의 급우를 지독하게도 괴롭혔던 H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양계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어둠의 세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보스가 될 줄 알았다

 

   (중략)

 

   뭔가가 지금 나를 알뜰살뜰 꿰고 있다

   티브이는 현재 발리에서 생긴 일을 재방송 중이다

   진지하게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괴롭고 슬퍼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드라마는 되도록 더 허황되며 상투적이고 과장되게 만들어야한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날마다 잊어버려야 한다

   뭔가 좋은 것이 그 안에 약간은 담겨 있었다 해도

― 박판식,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전문(《현대시》, 2021년 4월호)

 

 

  은행 알을 꼬치에 꿰고 있는 평범한 거실에는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칼로 찔렀다는 기사의 신문이 깔려 있다. 무심코 그것을 본 ‘나’는 “앞자리의 급우를 지독하게도 괴롭혔던 H”를 떠올린다.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거나 “어둠의 세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보스”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그가 양계장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에서 준석의 아버지가 지역을 장악한 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툇마루 소반에서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를 내며 밥을 먹고 잘 닫히지도 않는 녹슨 대문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은 마초적 환상이 극대화된 조직의 생리보다 누추하고 끈질긴 생활이 선행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거한다.

  1947년 미국 심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흑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형 실험을 했다. 3세에서 7세의 흑인 아이들에게 백인 인형 두 개와 흑인 인형 두 개를 번갈아 놓고 갖고 놀고 싶은 인형을 물었다. 67%가 백인 인형을 택했다. 착한 인형은 어느 것인지 묻자 59%가 백인 인형이라고 했고, 나쁜 인형은 어느 것인지 묻자 59%가 흑인 인형이라고 했다. 색깔이 예쁜 인형을 물어봤을 때는 60%가 백인 인형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닮은 인형이 무엇인지 묻자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얼굴이 그을어 엉망이 되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이 실험은 미국의 인종분리정책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흑인은 열등하고 추악하다는 편견을 주입하고 강화시켜 흑인 아이들 스스로 흑인 인형을 부정하고 백인 인형을 선호하도록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흑인 혼혈아가 되어 있는 꿈”을 꾸었는데 “백인이 되고 싶어서 한참을 울었다”는 구절은 세기가 바뀌어도 건재한 차별과 배제의 세계를 재현한다.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 심리 기제는 백인 혼혈은 연예계에 데뷔하고, 흑인 혼혈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현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독촉 고지서처럼 어김없이 날아드는 한 장 한 장의 시간은 약자들에게 기어코 생활의 부채와 파산을 선고하고 “옥상의 포대기 속”으로 “정화조 속”으로 “혼자 방치된 안방”으로 “일산대교 아래”로 끝내 세상 밖으로 떨어뜨린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울고” 있기에 “눈물마저 마른 사람이 울고” 있기에 “고개를 숙이고 걸어”갈 수밖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생활의 압류 앞에 ‘나’는 꼼짝없이 꿰어지고 있다.

  준석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동수를 조직에 영입하면서 ‘칼자국’은 말한다. “단지 내가 원하는 거는 항상 1등만 있으면 썩으니까 내가 2등이 되가꼬 1등 정신도 좀 차리게 하고 또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우리 세계를 이끌어나가야 된다 이긴기라. 원래 건달의 역할이 뭐꼬? 그거는 바로 자신들은 비록 음지에 살면서도 양지를 더욱 밝고 환하게 해주는 게 건달 아이가? 안 그렇나?” 1등을 빛나게 하기 위해 2등의 어둠을 자처하고 있다는 이 살신성인의 대사처럼 기만적인 세상은 ‘나’를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마차와 말로 보이”는 중세인으로 회귀시킨다. 나아가 “신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신을 배신할 용기를 지닌 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

  비열하고 초라하고 부정한 광야의 현실은 픽션보다 더 슬프기 때문에 “드라마는 되도록 더 허황되며 상투적이고 과장되게 만들어야” 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재벌인 조인성은 한 여자를 갖지 못해서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오열하는데 “장기말에 치여 세상 밖으로 떨어진”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절망과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날마다 잊어버려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모르는 척해야 한다.

  핍박 속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부는 바람에도 고개를 떨구고 마는 시인은 그 결벽적인 자기 검열과 착한 천성 때문에 스스로를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판결한다. 그 고백은 선을 추구할 수도 없고 신을 저버리지도 못하는 시인의 현실이 폭력과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소환하고 환멸로 점철된 아이덴티티를 부상시키는 시적 반동 장치로 작동한다.

  조직폭력배들이 팔뚝에 새겨넣는 문구에는 대개 웅비하는 용처럼 대의적인 포부가 담겨 있다. ‘차카게 살자’를 표방하는 그 마음은 비록 맞춤법이 틀렸을지언정 새 삶에 대한 각오가 있다. 또 타인에게는 무력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은 착하게 살고 싶은 이율배반의 무지도 거기에는 있다. 사실 착하게 살자는 어린아이 같은 다짐을 시커먼 문신으로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활보하는 것은 대다수 선량한 시민에게 현재는 안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과시와 위협이기에 혐오스럽고 불편하다.

  영화 〈친구〉의 마지막에 준석은 말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어도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다고. 우리는 시키는대로 하고 사는 놈들 아니냐고. 조폭에게도 생활이 있고 인내가 있고 이해가 있다. 다만 거기에는 더 이상 조오련과 바다 거북이가 수영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인지 궁금해하는 순수는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프고 아득한 일이다. 착하게 살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이 말이 꿈과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편의 시는 “분하고 억울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을 만큼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나’를 통해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꿈의 트랙을 배회하는 그 존재 자체가 이 폐허의 산물임을 현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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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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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