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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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수진 

 2021년 4월 공시사 월평 


 

 

 

 

 

시뮬라크르의 정물화

 

• 신수진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 브레히트

 

 

  인상주의가 순간순간의 찰나를 빛으로 현현하고자 몰두했다면 세잔은 실체의 질감을 색채와 형태로 실현하고자 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거부하고 다각도에서 투사된 기하학적 형태를 한 장면에 완성하는 그의 회화는 현대 미술을 개시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포비즘과 큐비즘으로 계승된다.

  추상적 이미지는 구체적 현실에서 비롯한 반영물이므로 원본과 복제라는 대립 구도를 지닌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은 실체 없는 이미지를 산출함으로써 실제 대상이 도리어 만들어진 이미지를 따라야 하는 전도된 위상을 보여준다. 20세기 철학사의 한 장을 저술한 장 보드리야르의 대표 저서이자 핵심 개념인 ‘시뮬라시옹’은 모의실험을 일컫는 말이었다가 표상이 실재를 잠식하는 사태를 이르는 말로 확대되었다. 책에 따르면 사실성의 반영으로서 이미지는 사실성을 감출 뿐 아니라 사실성의 부재마저 감춤으로써 어떤 사실성과도 무관해지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주체가 대상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서 똑같은 실체를 여러 각도와 여러 순간들로 고정하고자 했던 것이 세잔의 저 유명한 사과였다면, 여기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케이크와 정물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시뮬라크르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있다.

 

 

   흰빛은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두워진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찾아오는 빛은 뚱뚱한 미소를 좋아한다

   둥근 탁자에 앉아서 오래된 날짜를 세며 물개박수를 친다

   구석에서 달콤하고 푹신하게 일어나는 보푸라기 짝꿍들

   축하해 너의 생일은 깊은 수면에서 떠오르는 거울과 어울린다

   오늘은 생크림 케이크가 찾아와서 외투를 벗고 머리에 촛불을 꽂는다

   식탁보의 착한 무늬를 풀어서 잉잉 타오르는 노래를 묶는다

   귀여운 샴페인 코르크 마개가 터트려놓은 황홀한 기분처럼

   너의 이름에 묻은 생크림을 눈썹에도 어둡게 발라놓는다

   검은 지느러미를 찾으러 간 밤하늘의 별들은 촛농처럼 굳어가고

   창문에 부딪친 폭죽 소리는 지우개 똥처럼 지워진다

   그렇게 뭉개진 구름처럼 흰빛이 감싸는 탁자가 웅크린다

   생크림 케이크에는 안개꽃의 부스럭거림이 혼자 숨어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사라지지 않는 파도의 우스운 생일

   손가락으로 하얀 케이크에 구멍을 숭숭 뚫어준다

   기울어진 빛이 흘리는 설탕가루 같은 표정들

   흰빛은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케이크의 볼과 눈꺼풀은 망가지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 이기인, 「우스운 오늘의 케이크」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3월호)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도 모르”는 흰빛은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두워진”다. 말은 존재의 증명인데 실체가 없는 흰빛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되면 신데렐라의 빛나는 마차가 호박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케이크, 생크림, 별, 구름, 안개꽃, 파도, 설탕가루로 이어지는 흰빛의 행렬은 거기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폭죽처럼 자신을 터뜨린다. 마치 스스로 존재하는 양 “시간이 흘러 비로소 찾아오는 빛”은 시뮬라크르의 비대한 이미지인 “뚱뚱한 미소”를 지향한다. “달콤하고 푹신하게 일어나는 보푸라기 짝꿍들”도 재생산되는 복제물들이다. 그것은 돋아나는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나야 할 것이 아니라 삭제의 운명을 타고난 낡은 미래의 정물들이다.

  “너의 생일은 깊은 수면에서 떠오르는 거울”처럼 원본이 아니다. 이미지로서 생일은 각도를 기울여 말없는 흰빛들을 반사할 뿐이다. “식탁보의 착한 무늬”로 “타오르는 노래를 묶고”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가 “황홀한 기분”을 터뜨려놓는 생일 축하의 제스처들은 존재의 성립을 위한 생일의 시뮬레이션을 충실히 재현한다. “머리에 촛불”을 꽂고 “너의 이름”에 묻은 생크림을 눈썹에 바르는 것은 가상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나이와 시간의 축적을 알리는 ‘촛불’과 존재를 명명하고 규정하는 ‘이름’은 필수불가결한 생일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끝내 ‘너’는 오지 않기에 “밤하늘의 별들은 촛농처럼 굳어가고”, “폭죽 소리는 지우개 똥처럼 지워지”고, “구름처럼 흰빛이 감싸는 탁자가 웅크리”고, “생크림 케이크에는 안개꽃의 부스럭거림이 혼자 숨어 있”다. 굳어가고, 지워지고, 웅크리고, 숨어 있는 이 정지와 위축과 은폐와 소멸의 기제는 생일 케이크를 비롯해 흰빛으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자아가 실체 없는 허구의 이미지들로 공명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손가락으로 하얀 케이크에 구멍을 숭숭 뚫”는 ‘나’는 “기울어진 빛이 흘리는 설탕가루 같은 표정들”을 응시한다. 하얀 케이크의 존재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어둠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나타난다. 나의 생일은 내가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날이지만 나의 의사결정권이 없다는 점에서 인과적으로 나와 전혀 무관한 타의적인 사건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축하를 받지만 내가 한 일은 거기에 없다. 우리는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 우연하고 유일하고 유한한 생을 경험한다. 나 없이 나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나와 같은 너 실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기다림으로써 필사적으로 한계와 결핍을 보상받고자 한다.

  세잔이 복수 시점의 다면체적 사과를 그려냄으로써 원본을 이미지로 전환했다면, 이제 시뮬라시옹의 정물은 실재의 허구를 전복적으로 재생하기 위해 설치된 ‘저지 기계’로 작동한다. 생일 케이크의 흰빛이라는 원본 없는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생일의 아이러니를 감추고 자신이 실재이며 주인공이라고 믿게 해주기 때문이다. 생일 케이크가 누락되고 배제된 채 덩그러니 내던져진 현실의 나라면, 오지 않은 너는 어긋나고 멀어지는 그래서 아직 오지 않은 진짜 나의 모습이다.

  시의 정물들은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허구와 실체의 싸움이다. 다음 시에서는 도처에서 출현하고 중복되는 너와 나가 등장한다. 어디에도 내가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것이다.

 

 

   밤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행간을 헤매는 근천맞은 중년이었다

 

   빽빽한 눈발이었는데 발 디딜 틈 없는 마지막 버스의 냄새가 났다

 

   햇살이었다가 폭우였고 밥을 먹고 돌아와 다시 밥을 짓고 있다

 

   조금 울었는지, 환호였는지 저 소리들만 낡은 표정으로 남았다 나는

 

   태어났던 건가, 너무 일찍 떠나온 건가 기억나지 않는 기억으로

 

   이젠 내려놓자고, 전화기를 들었을 대 당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어떻게든 잠이 들었는데, 깨어서 나를 기다리는 건 결국 나였다

 

   일어나 겨우 촛불을 들었고 겨울의 냄새가 가득했고,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똑같은 나를 알고 있다 밥이었다가 다시 긴긴 밤일 것이다

― 천서봉, 「조생」 전문(《현대시》, 2021년 3월호)

 

 

  “밤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책 속에서 길을 잃은 “근천맞은 중년이었다”는 화자는 무한한 시공간을 홀로 유영한다. 그곳은 불확실하지만 반복적이고 아름답지만 사라지는 세계다. 조금 걸었는데 어느덧 한 생의 클라이막스를 뒤로 한 자신을 생경하게 맞닥뜨리는 이 문제적인 첫 장면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간이 유일성도 방향성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로 전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단 하나의 진리로 통용되어온 시간에 지배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각자의 위치나 속도 등에 따라 상대적인 시간을 운행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일직선상의 시간관 역시 중첩되어 역동적인 장으로 변모한다.

  본다는 개념은 피사체에 반사된 빛이 돌아와 인지되는 것인데 그 거리와 속도에 의해 보는 시점과 보이는 시점은 결정된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은 별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이 거기 있음을 내포한다. 예컨대 빛은 초속 약 30만km인데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약 1억 5천만km이므로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 8분 전의 태양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138억 광년 떨어진 별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태초의 우주를 조우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눈에 비친 세계는 빛에 의해 감각되고 빛의 속도는 유한하므로 우리는 언제나 찰나일지라도 실재보다 늦은 과거만을 보게 된다. 지구에서 50세가 된 시인을 곁에서 보면 그는 “근천맞은 중년”이지만, 50광년쯤 떨어진 별에서 시인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눈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보일 것이다. 그렇게 ‘나’의 모든 모습은 빛의 거리에 따라서 계속해서 존재하고 중첩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당신 또한 당신이 아니”며 “나를 기다리는 건 결국 나”이고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똑같은 나를 알고 있다”는 구절들은 촛불처럼 어른거린다.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서사는 문학에서 자주 연출된다. ‘현실-꿈-현실’의 환몽구조 소설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했던 한평생은 깨어보니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고 비로소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태어났던 건가” “너무 일찍 떠나온 건가”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화자의 고백은 삶을 바깥에서 조망하는 시야를 확보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시간을 가동한다. “발 디딜 틈 없는 마지막 버스”처럼 숨 가쁘게 부대끼다가 “낡은 표정”으로 남겨진 ‘나’의 긴긴 겨울밤은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고 마는 생을 점멸하는 빛으로 타전한다.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유영하는 시들은 실체 없는 이미지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실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는 동그랗고 빛나는 사과를 그려놓고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것이 이미지의 배반이다. 아무리 탐스럽게 그려진 사과일지라도 그것은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물의 대상이 실체냐 정물화가 실체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물화는 실제 사과와 무관한 실체 없는 이미지로서 우리의 실체를 투영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똑같은 나”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수많은 사과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입체인데 평면의 캔버스에 그려질 것이며, 보이지 않는 밑바닥이나 뒷모습은 편집될 것이다. 나라는 실체는 정물화의 정물처럼 끊임없이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시뮬라크르로서의 나다.

  자, 이제 리어왕의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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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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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