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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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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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11월을 “겨우 버텨선 나무들의 계절”이라고 쓴 글을 보았다. 어쩌면 내가 쓰고 싶은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조촐하고 정겨운 연말 모임이 끝나고 얼큰한 술기운과 가슴에서 자꾸 차오르는 어떤 벅참을 좀 더 붙드느라 시청에서 종각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던 적이 있었다. 낯설지 않았고, 과장하자면 무척 생경한 길이었지만 11월의 비감(悲感)이 고스란히 뜨겁게 살아 있었다. 어두운 허공으로 치솟은 빌딩들은 인공적인 그 무엇 이전에 비참과 희망을 버무려 세운 사람의 숲, 헐벗음으로 인해 당당해지는 현실의 이미지로 잠깐이나마 끝없이 펼쳐졌다. 자연의 숲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나는 셀 수 없는 아파트 단지들과 온갖 종류의 빌딩들을 ‘나무’라 차마 호명할 수 없었다. 그랬다. 전제 조건을 수락하고 기본을 지키면 우리는 동질적 자아로 불온과 불순의 ‘바깥’에 갇혀 함께 뛰놀 수 있다.
아차, 내가 그토록 이해하고 제대로 살아내고자 애썼던 순간들을 ‘지난 세기’라 호칭해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그것도 벌써 기왕에 그랬어야 했는데, 어쩌자고 나는 지난 이십여 년을 낡은 어휘와 문법에 기대 성립할 수 없는 ‘기대’를 끌어 붙이려 애썼을까. 이 밤은 새 세기의 가장 늦은 출발선을 분명하게 그어준다. 백 년의 오분의 일을 이미 탕진했지만, 아직 약간의 시간과 우울은 남아 있을 터, 늦가을 낙엽 더미에 바스락대는 햇볕인 양 웃기로 한다.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들이라면 그 도주를 가로막을 수 있다.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들은 하나의 철책처럼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수평으로, 도주의 방향으로 누워 있다.”
재귀(再歸)하지 않는 말, M. 피카르트는 『신으로부터의 도주』 중에서 오늘날의 말들은 계속 달아나기 위해서만 발화된다고 보았다. ‘신’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제 사유가 ‘니힐’하다고 믿는 나는 ‘영성을 깃들게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해석한다. 즉, 말이 신이라는 절대 대상으로부터 도주하는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세운 모든 성전이 기둥으로 둘러싸인 것은 구속자가 풀어낸 참회와 희원(希願)의 ‘말’이 다 회오리처럼 치솟았다가 결국 저 자신의 영혼에 내리꽂히기를 바란 지혜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수직보다 수평의 세기에 살고 있다. 고비를 넘나들기보다는 더 빨리 잘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도주의 방향’은 결국 자기가 산포(散布)하는 형상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상황에서 무화(無化)되는 것을 염려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지난 세기말, “정신적인 삶도 문화적인 삶도 없는 권태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문화적 삶이 없는 노인들의 권태 이상으로 비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문화적인 삶이 없고 오로지 폭력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젊은이들의 권태 이상으로 비극적인 것도 없다”라고 한 M. 라공의 한탄은 시대 조류를 경계하는 빛나는 지시봉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낡은 ‘헛소리’일 뿐이다.
2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시인지 시작 메모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1월의 나무는 없다. 한 그루는 오직 한 우주를 견디고, 다른 모든 나무는 또 그럴 뿐” 물론 나는 ‘11월’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여럿 썼다. 그중에는 ‘성 마르티노 축일’을 모티프로 한 것도 있다. 죽은 자들이 일 년에 딱 한 번 부르지도 않는데 방문하겠다면 그걸 싫어할 산 자가 얼마나 될까. 나는 대환영이다. 무슨 날을 손꼽아 구태여 차가운 땅바닥에 머리 조아리는 것도 한없이 슬프고 처절한 행위지만 나는 죽은 자들이 11월의 나무처럼 꽃도 잎도 잊은 채 헐벗은 모습 그대로 찾아왔으면 더 좋겠다. 그것은 나의 미래이며 어둡지 않은 희망이 될 테니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ㅡ 「시(詩)」 부분
최근 어느 시집에서 본 작품이다. 제목이 ‘시’니 작품을 지칭할 리는 없고, 시관(詩觀)이나 시작 태도, 혹은 시적 지향을 작품의 형태로 드러낸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모든 행에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특히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란 행에서 숨이 멎을 듯하게 긴장했다. 왜 아니겠는가, 어쩌면 나는 여기서 지난 세기형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신’을 버렸거나 도주했거나 죽었다고 선언했거나 어쨌든 대칭적이든 대위상이든 ‘신’이라는 그물이 허공과 지하에 펼쳐져 있음, 그 전제 아래서 기본 소양 삼아 자신을 혹독하게 키워낸 것이다. 리깡 이론에 대한 뛰어난 한 연구자는 긴 연구의 소회를 “인간은 결코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일방적인 길을 걷기에 언제나 상실과 결여라는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다”라는 걸 깨달았다고 썼다.
3
고독은 존재론적 사태일 뿐 감정 소여(所與)가 불필요하다. 고독은 이유가 없다. 고독은 세계와 투쟁하려는 의지의 과정일 뿐, 어떤 원인의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고독보다 외로움을 선호한다. 외로움은 형성의 원인이 분명한 만큼 결과적 해소가 쉽다. 외롭게 선 상태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는 고독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만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고독한 자들은 그 모습 그대로 연대한다. 즉 숲을 이룬다. 숲은 늘 비밀처럼 생명의 탄생과 생장과 쇠락의 드라마를 다시, 또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외롭게 헐벗은 그저 서 있고, 간격을 맞춰 서 있는 저 11월의 나무들은 제 생의 윤회 이상을 희망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술은 불행의 의식이지 불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 예술의 목적은 몽상의 건설도 아니다. 그렇다고 예술이 진실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진실은 알려질 필요도, 묘사될 필요도 없다. 진실은 자기 스스로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지상의 구원이란 것은 성취될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 그것이 가능한지 질문을 던지거나 그 형상을 그려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고독은 고독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M. 블량쇼를 인용했다. 나는 굳이 예술가라는 호칭이 불필요하게 모든 창조자는 고독 속에서 연대를 통해 희망을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타자가 만든 희망은 그의 것, 혹은 그의 상황의 부산물이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의심하며, 특히 자기를 의심하며 타자의 희망과 연대해야만 한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