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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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시작’인 종말
ㅡ 세상의 유일한 기쁨은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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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부고(訃告)가 잦을 때가 있다. 아니, 사실 그럴 리는 없다. 누가 때를 맞춰 계획적으로 죽을 수 있나. 자살마저도 그 실행에는 계획보다 우연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일 년 내내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너른 ‘지구촌’에서 숱한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와 사건으로 죽는다. 그 모든 이들의 부고를 받거나 신경 쓸 처지도 아니고 여력도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특정한 시점의 부고들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점이다. 이상 한파나 폭우처럼 기상 이변이 심할 때,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 기간에, 또 지극히 개인적으로 여러 번 마감을 미룬 원고의 막바지가 한참일 때나 부의금 마련이 막막할 때 날아온 부고의 무게는 예전의 것과 같지 않다. 거기에 곤란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오히려 더 정확하고 끈질기게 움켜쥐는 이놈의 ‘뇌’의 기억작용이 더해진 결과, ‘유독 부고가 잦을 때’가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일 어떤 신이, 당신이 내일이 아니면 모레에는 틀림없이 죽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아주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죽음이 내일이든지 모레이든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정말 그 차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그러므로 당신은 내일 죽든지 몇 년 후에 죽든지 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끝자락을 통치했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적힌 내용이다. 최근에는 ‘철인(哲人) 황제’라는 그에 대한 평가가 약화하고, 오히려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행한 여러 정벌과 반란 진압 전쟁 등의 통치술이 부각되어 책의 내용마저 현학적이고 맹목적인 고대 귀족적 허영과 수사로 치부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그의 사유와 생활의 기조로서 ‘금욕주의(Stoicism)’는 그의 시대와 지위를 고려할 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스토이시즘은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에 근거한 인생과 세계의 경영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에 비춰보면, 앞의 인용한 글귀의 내용은 우리가 필멸(必滅)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각인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욕망의 추동(推動)에 내맡기라는 유혹이나 권고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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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동기나 목적 없이, 심지어 ‘시간 죽이기’도 아닌 어떤 멍한 상태로 현대의 시그니처, 정보의 매혹적인 터미널인 모니터(당시에는 최신형이었던)에 흐르는 영상과 소리와 자막의 총합으로 <토리노의 말(The Turin Hors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꽤 길었고 지루했고(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146분의 러닝 타임에 10분씩이나 지속하는 롱테이크 기법을 적용한 쇼트(sequence shot)들, 게다가 흑백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그 음울한 화면에 멈추었고 니체를 언뜻 본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했다. 영화는 2012년에 개봉했고, 헝가리 태생의 벨라 타르 감독의 묵시록적인 종말적 세계관이 투영된 은퇴 작품이라 한다. 별로 흥행에 성공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영화 자체를 스포일(spoil)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니체가 마지막으로 발병하기 직전의 일화가 필요했을 뿐이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트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6번 문밖으로 나선다. 산책하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를 헤치고 나가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의 잔혹한 행동을 말린다. 니체는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건장한 체구를 숙여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 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0년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얌전하게 정신 나간 상태로 누워 있게 된다.”
역사적 사실 또는 기록에 의지했을 것이라 믿지만, 앞의 내용은 인터넷에 등장하는 토리노에서의 일화를 다룬 글 중에서 가장 간략한 것을 다시 발췌한 것이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최후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역시나 해석자의 세계관에 따라 양극단으로 갈라진다. 그렇지만 그런 사태 또한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하다”고 외친 니체의 주장이 실현되는 것이므로 니체 자신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채찍질당하는 ‘말’과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의 긴장 속에서 니체가 ‘성찰’한 내용은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는 그의 장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도덕 의지는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적으로 운명을 맡긴 동물에 대한 태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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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공업 도시 토리노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였다. 바다에 접해 해양의 기질을 통해 발전한 여타의 산업 도시들과는 달리 산, 유럽의 지붕이라는 알프스산맥에 접해 있다. 즉, 토리노는 반도 이탈리아가 유럽 대륙과 연결되는 지점에 자리해서 대륙의 사상, 문화에 민감했다. 가 본 적도 없는 도시를 예찬하거나, 니체도 두 번 방문했을 뿐인 도시를 여행안내서처럼 소개하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토리노 대학이 배출한 지난 세기의 어떤 이들이 갑자기 검푸른 기억의 수면 위로 솟구쳐 오래 부유했기 때문에 길게 에둘러 온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이 우리의 바람과 일치 하게 만들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피하도록 서로 힘을 모으고 함께 노력하는 것뿐이다.” 193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한 구절이다. 그람시보다 연배는 좀 늦지만, 토리노 대학의 양심적 지성 중 하나였던 시인 체사레 파베세는 어렵게 피워올리는 반파시즘의 불꽃과 자기 운명의 암울한 예감 속에서도 “세상에 유일한 기쁨은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불우했던 이 두 토리노인의 말을 종합하면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위해 당장 기대하는 바대로 시작하라’가 아닐까? 토리노를 사랑한 니체지만 "삶, 그것은 자연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삶은 평가하고, 선택하고, 불공평하고, 제한하고,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며 딴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운명이 인간의 다음 세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투쟁 속에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는가! 찾아내려는 노력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그는 그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 대하여 점점 더 모르게 되었다. 그가 알고 있고, 살고 있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그에게 선사한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세계가 목사나 신부에 의하면 그가 머리로 생각해 낸 것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태어난 날부터 그는 세상에 안녕이라고 말하도록 충고받고 명령받았다. 아, 우리는 이 멋진 세계를 너무나도 학대해 왔다.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슬픈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오두막, 단순한 옷가지, 단순한 음식물에 백합과 장미, 사과와 배밖에 더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 또는 죽지 않는 인간에게 알맞은 보금자리일 것이다”
아일랜드 극작가 숀 오케이시는 묻는다.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세계’를 현재 누리고 있으면서 어쩌면 필멸이거나 불멸일 수도 있는 이 ‘보금자리’를 어떻게 만들려 하는가? 다시 신에게 돌려주려는가,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삶을 선택했다는 핑계로 아무도 향유(享有)할 수 없는 황무지로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이탈리아 시인 체사레 파베세의 말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