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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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백인덕 

 

 

 

귀향의 팡파르가 끝난 후

 

 

 

 

 

  1

  서울 촌놈인 나는 종종 나이 먹는다는 증거로 고향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옅어지는 걸 들곤 한다. 태어난 동네에서 삼십칠 년을 살았으니 복이라 해야 할지, 단점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하게 우스웠던 건, 옛날 주민등록표엔 이사로 바뀐 집 주소보다 행정명령이 훨씬 길게 찍혀 나왔다는 것이다. 성동구에서 시작해서 강남구를 거쳐 강동구였다가 송파구가 되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는 사실 신도시도 아니고 특별히 개발된 그 무엇도 없었다. 주변의 변화, 발전에 따라 제 이름을 바꿔 불러야 했던 소수자, 혹은 가난한 지역의 설움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여름비와 강바람으로 상징되는 그 동네에서 태어나 실컷 유년의 언덕을 넘나들었고 학교를 제도가 허락하는 한 다 다녔고, 군대를 다녀와 취직도 했었고 양친을 여의었고, 열 번쯤 첫사랑을 거듭 실패하기도 했다.

 

  “이제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고향을 잃은 일은 없으나 이 세계 깊은 심연으로의 탐닉이 나를 고향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이 황망한 세상이 지닌 훤소(喧騷) 속에서 고향을 잃은 외로운 사내의 감정에 걸맞은 일이다.”(『검은 고양이』, 민음사)

 

  오스트리아 태생인 시인 릴케는 두 번의 러시아 여행을 마친 후 그의 정신의 고향이 러시아라고 종종 밝히곤 했다. 왜 그랬을까? 논구(論究)하지 않고 릴케의 작품 몇 편을 떠올리며 그냥 유추(類推)해 보기로 한다. 그의 당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은 산업혁명의 물결이 이미 전 유럽을 휩쓴 시기였다. 시인은 거기서 광폭하게 자행되는 대지의 수탈을 보았고, 재편되는 도시의 근거 없음, 혹은 넘쳐나는 무정체성의 폭주를 경험했다. 따라서 ‘고향’을 “이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에 묶어두려는 시인의 의지는 결국 대지를 자본의 하나가 아니라 영성(靈性)이 깃든 기원으로 인식하는 장원(莊園) 상태에 경도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 원어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번역에 등장하는 ‘훤소’는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결 다른 어휘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전적 정의는 “왁자하게 마구 떠들어 소란함”이지만 나는 항상 수레와 마차가 다니는 큰길의 번잡을 떠올린다. 발음이 그럴싸해 쉽게 기억하게도 되었거니와 우연히 알게 된 중국 남조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유명한 「잡시(雜詩)」 덕분이기도 하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초막을 얽어 인경에 사니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나 말의 훤소가 없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능히 그런고,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세속에서 머니 사는 땅이 절로 궁벽하기 때문이라.

 

 낭만주의야 원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며 ‘본향’을 회억하는 거라 하고, 노장(老壯)이야말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 세상 그 어디에 머리를 눕힌들 거기가 고향이 아닐 리 없을 것이다.

 

 

 

  2

  시인에게 고향은 어떤 것이고, 무슨 의미일까? 간혹 간곡하면서도 필수 사항인 것처럼 약력에 출생지와 출생 연도를 꼭 밝히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뭐, 서슴없이 쓰기도 하고 어디서는 아예 싹 지우기도 하지만, 그런 사실을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출생지와 연도를 통해 해당 시인에게 특정한 좌표를 첨가하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나는 이미 아재를 넘어 ‘꼰대’의 차원에 깊숙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별 유감은 없지만, 별로 큰 의미가 만들어지는 작업 같지도 않은 게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ㅡ 죽음의 세계 ㅡ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고, 이 두 세계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 때문에 말은 이중의 반향을 가지고 있다. 말이 나왔던 그곳으로부터의 반향과 죽음이 있는 그곳으로부터의 반향을.”(『침묵의 세계』, 까치)

 

  시를 쓴답시고, 또 시간을 경영한다는 오만한 생각에 참 많은 곳에 끼어들고 나서기도 했었다. M. 피카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번역은 최승자라 하고 싶지만 그러면 내 시의 자산이 너무 얄팍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기에 시인 최승자를 숨긴다. 어쨌든 “말은 이중의 반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가 주무하고자 그토록 애쓰는 오늘도 이중의 반향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나왔던 침묵으로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침묵으로. 만약에 내가 나왔던 곳과 만드는 곳을 다르다고 생각하고 늘 그 차이를 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거기 근원으로부터 비롯한 말들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에둘러 길게 돌아왔다. ‘희망’을 말하는 자는 결코 내일이나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니다. 그는 모든 희망이 본래 자기가 있던 그곳에서 함께 출발한 것임을, ‘말’이라면 지향만큼 귀향의 열정을 표출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자이어야 한다.

 

 

 

  3

  고백하면, 햄릿의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를 가지고 원고 마감일이 지나도록 망설였다. 그 내용을 알긴 아는데, 그게 고전(누구나 아는데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보니 독백 전체를 본 기억은 없다. 아니, 실은 봤으나 잊었다가 최근에 다시 찾았다. 모든 희망은 바로 이 ‘사느냐, 죽느냐’의 결단을 기본 전제로 형성된다. 하지만, 햄릿의 독백을 들어보면 참 복잡한 층위를 정말 단순하게 요약 환원할 필요성도 알게 된다.

 

이승의 번뇌를 벗어나 영원한 잠이 들었을 때

 

그때 어떤 꿈을 꿀 것인지 그게 망설임을 준단 말이다.

 

그러니까 고해 같은 인생에 집착이 남는 법.

 

그렇지 않다면야 누가 이 세상의 사나운 비난의 채찍을 견디며

 

폭군의 횡포와 우쭐대는 자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민이며 재판의 지연

 

관리들의 오만, 덕 있는 인사에게 가해지는 소인배들의 불손,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것인가?

 

한 자루의 단도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인데.

 

누가 이 지루한 인생길을 무거운 짐에 눌려 진땀을 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죽은 다음의 불안이 있으니까 문제지.

 

 

  중세인 햄릿에게 초현대인인 내가 이제 ‘죽은 다음의 불안’은 산 채로 걱정해 본들 아무 변화가 없음이 잘 증명되었으니, 깔끔하게 죽기 이전의 문제들만 잘 정리하라고 하면 B급 코미디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시인에게 이승이 고향인 것은 묻지 않아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말은 나온 침묵에 반향하되 스스로 만드는 침묵에도 반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락가락했지만 어쨌든, 소환된 유령들만 가득한 이곳은 누구의 고향인가? 죽은 ‘말’이 산 ‘나’를 마구 찌르는 끔찍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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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