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
아귀가 튼 ‘창(窓)’에 기대어
1
하릴없이 단상에 젖는다. ‘지리한 장마’라는 표현은 더는 불가능한 걸까. 왜 유년의 장마 기억에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크고 무서운 비가 검게 박혀 있을까. 사실 나는 ‘용띠’인데 물을 극도로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트라우마의 기원은 밝힐 수 없지만, 헤엄도 칠 줄 모르고 심지어 스케이트도 타지 못한다. 씻는 것조차 꺼릴 지경이다. 오죽했으면 일찍 여읜 어머니가 생전에 ‘용’이 아니라 ‘토룡(지렁이)’을 낳았다고 한탄했을까?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에 비가 아니라 땀에 절어 가뜩이나 짧은 생각이 불량 메밀을 사용한 국수 가락처럼 간단없이 끊어진다. 하릴없이 단상에 젖을 밖에 도리가 없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미국 문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이다. 정확히는 이레출판사의 1993년 판 『월든(WALDEN)』의 표4의 본문에서 빼낸 광고용 문구다. 물론, 본문 중에서 발췌한 것이므로 또 내가 본문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앞 인용은 편집자가 번역자가 아닌 소로의 글이 확실하다. 미뤄 짐작하는 것으로 충분한 경우에 구절구절 설명을 덧대고 있는 것은 지금이 무더운 칠월의 한낮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터진 말문이니 2절도 마저 해야겠다. 소로가 말한 바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가까이서 들리는 익숙한 음률이 아닌 것으로 정의하면 ‘어떤 사람’의 의도가 명확해진다. 하지만 이런 이해에서 더 나아가 그 ‘북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내적 성숙의 지향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요즘 방송에서 핫한 아이템 중 하나가 대상을 교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있나 보다. 아이든, 반려동물이든, 철부지 남편이든 대상은 가깝고 이른바 애정을 더 많이 쏟는 상대일 때 시청률도 높아지나 보다. 세태에 밥숟가락 얹어 왈가왈부하기는 싫다. 하지만 시작한 2절이니 꼭 한마디만 하자. “내버려 두라.” 특히 아이는 자기 본성의 우뚝한 봉우리를 찾아 끝내는 제 길을, 제 음률에 맞춰 걸어가리라. 염려보다 격려가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글은 왜 항상 이 모양인가?
2
신축년 하반기 들어 처음으로 책을 한 권 샀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메리 올리버의 시집은 담백하고 조촐했다. 그중에서 「세상의 이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귀뚜라미를 잡아먹는 닭, 닭을 잡아먹는 여우를 지켜보는 시인, 시인은 여우를 잡아먹지는 않아도 친구가 건네준 물고기를 먹는다. ‘경이롭기 그지없는 물고기’지만 말려서 장식으로 쓰기보다는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는 게 더 낫다. 물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다른 작품에서 세상의 선순환에 대해 줄기차게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고기를 먹고 적당한 때에는 썩은 그루터기 아래 묻혀 자라나는 나무의 자양분이 될 테니까 말이다. (영어 원제가 「THE WAY OF THE WORLD」인데 ‘WAY’를 ‘이치’로 번역한 안목에서 잠시 서성였다. 요 며칠 한동안 입안을 맴돌던 멜로디, <500 Miles>의 가사 중 “go a home this a-way”는 어떻게 번역되나, ‘away’를 ‘a way’로 이해해 ‘이 처지’로 하면 안 될까, 이 또한 장마가 쉬는 탓이다) 어쨌든 메리 올리버의 시 전문을 인용할 수 없기에 답답하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우화 중에 ‘당랑규선(螳螂窺蟬)’이 있다.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데 참새는 그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엿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어디 중국뿐이랴, 좋은 이야기일수록 줄기와 가지도 여러 갈래고 잎도 무성하기 마련이다.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그 참새를 잡기 위해 서둘러 활시위를 당겼다가 중심을 잃고 개울에 빠졌다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장자는 “이익과 손해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인다”라는 의미, 즉 ‘세상의 이치’에선 ‘빛과 그늘’이 한 뿌리라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가 자만에 빠져 간신배에게 놀아나서 충신 오자서(伍子胥)를 죽이고, 월나라 구천이 헌상한 미인 서시(西施)에게 빠져 유락 생활에 탐닉하자 태자 우(友)가 충고하기 위해 들었던 예화라는 주석이 붙고, 다시 중국 삼국시대 말 위나라 문제(조조의 아들 조비)가 아우 조식을 죽이려 하자 스승이자 책사인 사마의가 사용하면서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명확하게 자리 잡는다.
재미없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또한 ‘지루한 장마’가 비 대신 빛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귀뚜라미를 잡아먹는 닭, 그 닭을 잡아먹는 여우를 보며 세상의 이치를 긍정한다. 잡아먹는 행위에 그 어떤 ‘희생이나 숭고’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을 극도로 경계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가 거처를 잃은 것은 아니다, 대자연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더 광활하고 황량하게 살기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우리는 일상의 많은 시간을 ‘노리고/엿보’는 데 허비한다. 분명 자기 목숨보다, 자기 본성보다, 자기 자유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없음을 잘 알지만, 이익과 편리를 ‘노리고/엿보’는 습관이 순수한 허비임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남들이 다 그런 나도 그래야 한다. 아니, 최소한 참새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3
많은 시인이 고향의 상실과 회복을 노래했다. 어떤 이는 작품보다 훨씬 울림이 큰 산문을 남겨주었다. 날이 더위, 나이 든다는 것이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거라고는 도저히 쓰지 못하겠고 그저 고향을, 고향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다시 되살리는 것이라고 쓴다.
“난 이미 그곳에 있어 보았다. 고향의 바위는 아직도 내 발자국을 머금고 있다. 바다는 친숙하다. 저 별은 언젠가 내 오른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난 네 눈을, 네 머리칼의 무게를, 네 뺨의 체온을, 네 침묵으로 인도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너의 생각은 투명하다. 네 생각 속에서 네 모습과 겹쳐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윽고 그 모습들이 천 번 만 번 겹쳐지다가 백열(白熱)에 이르는 것을 본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인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인이며 나 자신인 이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1990년대, 관철동의 작은 골목을 돌아 돌아 찾아가곤 하던 월간 시 전문 잡지사가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꽤 의미 있는 작업이 기획되고는 했는데, 그중 하나가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를 번역, 연재하는 것이었다. 편역을 맡은 건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젊은 평론가였는데 부러 이름을 명기하지는 않겠다. 앞의 인용문은 “《현대시학》 1997년 2월호”는 부기(附記)로 미루어 볼 때 책이 아니라 잡지에서 발췌한 것이 분명하다. 다른 의미의 ‘백열’에 시달리는 한낮이 고향 집들의 허술한 담장 아래로 숨어든다.
오래 고향을 잃었던 자로서, 그래서 너, 우리를 결국 이것과 저것에 대한 깊은 관여를 거부했던 습성을 반성하면서, 개입할 수 없는 날씨 탓을 또 덧붙여 글을 맺는다. 모순이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