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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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백인덕 

 

 

 

 

 

 

바보의 ‘꿈’과 ‘꽃길’의 함정

 

 

 

 

 

  1

  덜 아문 상처의 피딱지 아래엔 항상 나른한 가려움과 치솟는 뜨거움이 도사린다. 상처 가장자리를 살살 긁으며 약에 취한 듯 비실비실 웃는 건 즉각적으로 세계를 개진하지 못하는 몽상가의 확실한 표지다. 몽상은 상태와 내용, 그 어디에서 ‘가치’가 결정되는가. 심도와 경지라 할까, 어쩌면 몽상은 어쩔 수 없는 이 세상과의 절연 정도에 따라, 계산 불가능성 혹은 무용(無用)의 심각성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감명받았다고 ‘기억’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불행히도 ‘사실’이 아니었다. 헤세의 사랑과 망명도 그랬고, 이상의 죽음과 유언도, 페소아의 실종과 행방불명이나 채만식의 독설과 유산까지 일종의 과장이거나 왜곡이었다. 차츰 전기적 사실을 접하고, 소위 투명한 진실을 위해 뒤로 물러설수록 ‘피로’ 이상의 기분을 느끼기 어려웠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피로에 젖지 않은 어휘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다만, 이제 이 이야기는 순전히 ‘픽션(fiction)’이다. 누구에게 들었더라, 어디서 보았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의 내용을 그대로 전사(傳寫)한다. 사실 전사는 불가능하고, 어쩌면 이 이야기를 만든 게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본 그는 마르크스의 초상과 흡사했다. 물, 불, 바람(공기), 대지의 상상력을 우리 나이로 환갑이 넘은 다음부터 저서로 출간한 G. 바슐라르 이야기다. 그는 프랑스의 고교 과학 선생이었고, 자연 철학자로서도 조금씩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예술’, 정확하게는 ‘창조적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회갑에 얻은 딸 때문이라고. 시나브로 자신은 늙어 쇠퇴와 쇠망을 거듭할 텐데 반대로 자연히 아이가 자라 유년이 되고 또 소녀가 될 딸에게 계산과 인과를 넘어선 ‘세계’가 엄연히 실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내가 몇 할을 꾸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바슐라르에게 빠져들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사연이었다.

  바슐라르의 숱한 속삭임 중에 가장 먼저 이 구절이 살아온다. “세계의 규모와 차원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꿈을 정말로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를 확대하지 못하는 꿈을 시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공기와 꿈』, 민음사) 하이데거식 이해에서 ‘죽을 자들’ 중에서 상처받음을 숨기지 않고, 노래하고, 떠돌고 그래서 자기의 무용으로 세계의 풍요를 염원하는 자의 이름으로 ‘시인’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런데 바슐라르는 ‘시인의 꿈’의 방향을 정확하게 짚는다. 그것은 ‘세계의 규모와 차원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 땅의 오월은 여러 가지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지만, 짙어 오는 신록의 그늘에 눈 돌려보기로 한다. 변화 자체를 찬양하지 말자. 이 세상에 아이가 많음과 그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에 집중하지도 말자. 오늘도 세상, 일만 킬로 이상 떨어진 먼 중동의 가자 지구에선 쏜살같이 날아든 미사일에 아이들이 죽는다. 그 미사일이 아이들을 겨냥했을 리 없다. 인도 아대륙에선 코로나에 감염되어 격리된 부모 탓에 굶어 죽은 아이들이 발견된다. 어디쯤 딴 세상에선 굳이 사랑하겠다 입양하고 귀찮다고 때려죽인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은 일어난 사태의 총합을 지칭하고, 내가 관여하기 힘든 사태들을 약간은 비양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구성한 ‘개념’이다. 즉, 세상은 늘 그랬다. 낙원은 고사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게 ‘세상’이다. 당위적 개념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기도하고, 기부하고, 더 일반적으로는 무시한다. 접촉 때문에 당연히 어떤 감각과 기억과 인식이 작동할 것 같은데 우리 대부분은 어느 결정적 순간에 멈춰 서버린다. 사실은 나의 ‘꿈’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을 다루는 뉴스는 유독 희생자인 ‘아이’를 강조한다. 미얀마의 야만적 상황에서 최소한 이 땅의 언론은 ‘시인’ 명칭에 집착한다. 같은 비중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고통받는 이슬람을 공정하게 쓴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세상은 이렇게 자기 민낯을 시시각각 보여주지만 나는 결코 그 얼굴을 만나지 못한다. 여기 있다 싶으면 저기로 옮겨 있고, 저기로 가면 또 다른 차원에서 내려보고 비웃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인드라망’이다. 구원할 그 무엇도, 아니 구원을 기도하거나 바랄 그 기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라는 명제는 반드시 모순된 의미를 함축한다. 참을 단순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근거를 무력화하는 부정의 부정 논리가 있다.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채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民間人)」 제2연이다. 어줍게도 이 작품을 제대로 읽으려면 1연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생략했다, 이유는 생각하기에 따라(1연을 역으로 유추해서) 서로의 이해를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1947년 해방 정국에서 북에서 남으로 생활 터전을 옮기려 했던 젊은 가족의 비극을 모티프로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제목이 ‘민간인’이라는 점이다. 이 단어의 함의를 한동안 생각하고 먹먹했다. 김종삼 시인은 세상의 비극을 통해 자기 ‘세계’의 지향을 벼렸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모른 척하는) 그 수심(水深)을 차갑고 아프게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행한 것이다. 내 해석으로 여기서 민간인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작용인이다. 결연하게 세계를 건설하지 못하면 세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세계는 자기 가치로 건설하는 생의 모든 구축이다. 반면에 세상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 자기를 대체하려는 타자 욕망의 화신이다. 왜 나는 ‘나’가 되려 할수록 ‘남’처럼 느껴질까?

 

 

  3

  김종삼 시인이 증거로 남기고자 했던 ‘수심’은 이제 오직 ‘수심(愁心, sorge)’으로만 남았다. 변경이 아니라 뚜렷한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을 영위하는 삶은 안전하면서 단조롭다. 나는 어떤 비심리적 혈연과 문화와 정서적 공동체 일원으로서 견디기 힘든 압력을 느낀다. 특히 5월이면 아침마다 깊고 깊은 심호흡을 거듭해야 할 정도로 숨쉬기가 어렵다. 나는 지극히, 지독하게 개인이지만 내 ’세계‘의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중심이므로 나의 호흡 곤란은 곧바로 세계가 초미세먼지에 휩싸인 채 병들어 간다는 사실의 반증이 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바보는 자기만족의 환원적 정의가 아니다. 시를 생각하는 그 영혼과 마음에서 바보란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어떻든 색과 질이 어떻게 이해되든 ‘자기가 스스로 빚는’ 것이라는 걸 인식한 존재일 뿐이다.

  바보에겐 ‘꽃길’이 없다. 많은 이들이 “꽃길만 걸으세요” 축복한다. 난 그 축복 뒤에 도사린 음험한 저의를 안다, 느낀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진정한 바보가 되세요. 나는 이 오월에 어떤 감사도 수신을 거부하고 발신을 자제할 것이다. 내 부모와 스승은 다 이승의 존재가 아니니 가을 서리 뒤에 찾아가도 ‘꽃’처럼 화사하지 못하다 나무라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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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