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권현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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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순간의 빛
초록이 아닌 연두가 좋다. 깊은 사랑에 대한 강박 없이, 울창에 대한 강요 없이 그저 말간 연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의 순간적인 빛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연두의 생활이 시작되는 봄의 초입, 양재천까지 걸으며 높다란 아파트 끝에 매달린 구름 구경하는 재미로 산다. 구름이 없었다면 멀미 때문에 아파트를 올려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두부 모양으로 된 단순한 큐브 조각의 끝없는 탑재 방식이 더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오늘 구름은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하늘을 내내 올려다보고 걸어가며 비가 잔뜩 고인 먹구름을 만날 때도 있고 운 좋게 싱싱한 물고기 구름을 만날 때도 있다. 시간과 행적을 천천히 기록하며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다. 유년의 그늘로부터 겨우 몇 걸음 옮겨왔을 뿐 여전히 어리석은 마음을 다독이며 가까스로 살아 있을 빛에 경배한다. 이마 부근까지만 짧게 머물다 사라지는 고요를 따라 날마다 요가를 하며 노래하듯 “나마스떼”를 읊는다. 타인과 내 안에 있는 빛에 (빛이 있길 바라며) 좁은 이마를 수그린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구름이 더 싱싱해 보인다. 역경을 많이 겪은 인생이 싱싱해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구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진심으로 되뇔 때도 있다. 다만 순간적인 빛에 의지해 산다. 머리에 늘 유랑 구름 화관을 쓰고 다니지 않는다면 생은 돌보다 단단할 것이고 가죽보다 질길 것이고 하품보다 지리멸렬할 것이다.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나 반복되지 않는 구름과 노래를 따라 빛에서 빛으로 흘러가게 된다.
2017년에 처음 듣기 시작한 Syml의 노래 “Where’s My Love”를 반복해서 듣게 되는 이유는 해마다 다른 버전으로 노래가 녹음되어서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2016년에 음반이 나온 <내게 상처가 되는 것들(Hurt For Me)>의 두 번째 트랙에 수록된 이후, 2022년에 이르기까지 어쿠스틱 버전, 피아노 버전, 듀엣, 리믹스, 얼터네이트(Alternate), 슬로우드(slowed) 버전에 이르기까지 같은 노래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마다 새롭게 녹음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전자 음향 장치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어쿠스틱 버전이 여전히 좋다.
여전히 상처가 되는 사랑을 혹은
빛이라고 불러도 될 그것을
누구나 반복적으로 찾아 헤매게 된다
새롭게 반복되는 구름의 정처처럼 반복해서 가수가 새롭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갈망과 고통이 새롭게 지속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년에도 2017년에도 2018년에도 2019년에도 2020년에도 2021년에도 2022년에도 여전히 사랑은 그에게 상처가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상처 받으면서도 계속 찾아 헤매게 되는 사랑을 똑같은 곡이 다시 녹음되는 형식을 통해 가수는 노래한다. 그리하여 Where is my love, 나의 사랑은 어디에, 좋아하는 노래라면 각기 다른 버전을 찾아 듣는 것을 즐기는 개인적 취향을 통해 그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된다. 갑자기 슬퍼진다. 여전히 상처가 되는 사랑을 혹은 빛이라고 불러도 될 그것을 누구나 반복적으로 찾아 헤매게 된다.
순간의 빛을 혹은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몇만 톤의 고통과 같다. 현에 가하는 몇만 톤의 힘으로 음향이 생긴다는 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첫 언어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사랑 이전, 미움 이전의 언어라고 말해도 될 근원의 언어가 리듬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은 음악과 함께 있다. 모든 기억을 잃어 사물처럼 정지해 있는 치매 환자가 젊은 날 좋아했던 음악에 반응하고 미 소지으며 따라 부르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속에서 본 적 있다. 돌보다도 가죽보다도 꽃보다도 질기고 강한 사랑의 순간이 기억 속에 있다가 음악과 함께 살아나는지도 모르겠다.
작업실에 가지런히 깎은 연필과 맹물 한 잔이 놓여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만하지 않은가.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사라지는 사람이 음악 속에 살아 있다. “이 소리 참 좋네”, 그의 작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비 오는 소리, 버려진 사물, 해일에서 그는 소리를 길어 올린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화석이 있는 마을을 찾아가서 기원이 되는 음악은 지독히 단순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병중인 그는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웃으며 말한다. 손가락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더 연습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층에서 일층에서 내려가는 뒷모습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순간이다. 편도암을 앓고 있는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영상을 보는 동안 잠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영상 속의 사람을 잠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말이다.
성당의 종소리가 한 시간마다 들리는 오래된 마을에서 종소리는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이었다. 여행자였던 새벽 네 시와 네 시 반 사이, 자꾸 통화음이 끊어지는 새벽의 국경 너머 종소리를 함께 듣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불필요한 감정의 지방이 연소되었을 때 어리석게도 늘 나를 향해 달려가거나 달려오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리움이 더 진해지는 경험을 했다. 비 오는 날은 나무 향이 더 짙은 것처럼,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오지 않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기다렸던 기다림의 흑백 색감이 그림자 없이 기억 속에서 넘실거렸다.
통신이 닿지 않는 별에서 어느 날 기별이 오듯 국경 너머, 우주의 테두리 너머 살아나는 감정을 순간의 빛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지구와 비슷한 크기의 별이라 지구 2.0으로도 불리우는 캐플러-452b는 지구와의 거리가 1400광년이나 된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해도 도달하는 데 약 2천 6백만 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별 452b가 그리운 순간이 있다. 지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꿈에 본 날이다. 그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사주지 못해 안달이 났다. 꿈에서 깬 후 2천 6백만 년 동안 날아가도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그럴 때는 숫자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등이 시리면 진심 이라는데 순간을 살게 될 때 어떤 기억은 벼락처럼 빛처럼 와서 바다의 등만큼이나 오래 시릴 때가 있다. ♦

권현형 l
1995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2013년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아마도 빛은 위로』, 편저 『김영태 시선 초판본』, 공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ㅡ 김수영 50주기 기념시 해설집』 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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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