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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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야누스와 아수라
ㅡ 상처가 썩으면 독화살도 뽑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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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과 홍목련이 어울려 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누가 나란히 심어놓았나, 그 심사(心思)를 헤아릴 길 없다. 뜻밖에 아름답고 그래서 곤혹스럽다. 불과 재작년만 해도 사월이 되면 강의 PPT 사이에 슬쩍 동영상을 하나 끼워 넣었다. 이즈음 교정엔 드문드문 하얀 목련이 만개했고, 비록 건물마다 수는 많지 않았어도 시선을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끼워 넣은 영상은 박목월의 시를 가곡으로 옮긴 것이었는데, 테너 오현명의 곡보다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의 것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오현명의 영상은 가사가 틀린 부분이 있는데 그대로 버젓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4분 정도, 불행한 수강생들은 경제적 손해와 경쟁에서의 불이익을 어쩔 수 없이 참으며 느닷없이 강의실을 휘감는 <4월의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사실 나는 학기가 지날 때마다 이렇다 할 불만이 접수되지 않는 것도 놀라웠지만, 단 한 번도 ‘베르테르’가 누구냐는 볼멘 질문이 없었다는 것이 더 기이하게 슬펐다.
세계는, 그러니까 ‘인생과 우주’는(이 셋은 무엇을 주어로 내세워도 같은 경로를 향한다) 본질상 아무 경향도 없다. 방향과 목적과 그것마저 초월하는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그것은 나의 감각과 사유의 작용일 뿐, 원래 그런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마다 되돌아오는 사월, 목련꽃 그늘에서 히페리온의 편지를 읽는 디오티마를 상상하는 것은 단지 나의 낭만적 기질이 드러난 양상일 뿐이고, 노란 리본을 책가방에 달고 흔들릴까 두려워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까지의 짧은 거리를 웅크려 걷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또 다른 의식의 숨은 표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삶은 총체적이고 온전히 자기에게로 향하기만 한다면 모든 ‘화살’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가 이미 명료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아는 세 주인에게 의존하는 빈약한 창조물이기에 결국 그 세 주인에 의해 위협받는다. 세 주인이란 외부 세계, 원아(id)의 리비도, 혹독한 초자아(superego)이다”라고. 이제 이 땅의 사월은 불안의 모든 ‘정념(affection)’을 뭉뚱그려 오직 초자아의 이상적 도덕적 불안에 휩싸여만 하는 계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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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몰랐던 때가 있었다. 당연히 일 년 열두 달이 지극한 의미를 내장한 채 순환하는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몇 세, 몇 학년으로 빗금 칠 수는 없지만, 오직 ‘하루’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새벽 한기가 겨울이라면 아침밥을 먹은 만족감이 봄, 부질없이 무엇엔가 열중하던 여름을 지나 언제나 꾸지람과 마주해야 했던 저녁은 가을, 그리고 다시 내일에 대한 회의도 기대도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겨울. 그렇게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겪었을 땐 오히려 시간은 생활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가을을 풍요롭게 해준 것은 다리가 달린 귀한 TV에서 방영한 <마징가Z>라는 만화 연속극이었다. (일본 애니라든가, 동심파괴의 원흉 따위의 평가는 성인(?)이 된 이후의 사태일 뿐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슈퍼 영웅, ‘마징가Z’와 그걸 조정하는 강쇠돌에게 열광했겠지만, 마음 한 편에 ‘아수라 백작’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 같은 것이 있었다. 멋있지는 않아도 끌리는 캐릭터임엔 분명했다. 아수라는 얼굴이 좌우로 반반 나뉘었는데 언제나 호기롭게 승리를 장담하는 얼굴은 남성의 오른쪽, 패배를 인정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얼굴은 왼쪽 여성의 모습을 보였다. 즉 내 유년의 아수라는 ‘이중성’을 내포한 것은 맞지만 전혀 애매하지 않은 채 자기 분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누스를 알게 된 건 훨씬 더 자란 뒤였다. 일단 영어를 알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 영어란(최소한 내 계층에선) 교복을 입고 난 후, 알파벳을 익히기 위한 철자 연습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1월의 영어식 표기인 ‘January’의 어원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고대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비롯해서 그 기원이 비교적 명확하다거나 지금도 이탈리아의 도시 로마를 방문하면 그 이름이 붙은 거리를 걸어볼 수 있다거나, 전쟁과 평화라는 양면성을 상징한다거나 나아가 밀정(密偵)과 파수꾼의 두 얼굴의 가졌다는 이야기들은 길게 하지 않겠다. 1월의 표기가 된 것이 아마 한 얼굴로는 과거를 성찰하고 다른 쪽 얼굴로는 미래를 지향하라는 의미였다지, 아마. 어쨌든 현대의 일상 심리에서 야누스는 곧바로 ‘이중인격’으로 해석되고 만다.
이 땅의 사월은 내게 ‘야누스냐 아수라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어디를 가리키든 굽은 손가락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는데, ‘진정성(authenticity)’이 마치 자기 외부에 외따로 존재하는 정언명령인 것처럼 은밀한 강요를 서슴지 않는다. 분열 고착화한 자아든, 이중인격이든 일반적 궤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고통은 상처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상처가 고통을 빚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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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모든 전시적인 몸짓과 음성을 경계한다. 이 땅에서 사월은 너무나 많은 의례적 자기치장을 강요한다. 엘리어트 같은 현대주의자의 면모가 아니라 오히려 감상에 빠져 ‘4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울부짖는 딜레탕트(dilettante)가 너무 많다. 결국, 비약이겠지만, 다른 둥지에 알을 숨기고 빈터에서 우짖는 바닷새의 형국이다.
하지만 나는 침묵보다 소란이 상처를 봉합하는 게 아니라 썩게 하는 데 더 효과적임을 잘 알고 있다. 썩어 문드러져야 거름도 되고 다른 형질이 될 수 있다. 괜히 억울한 사월의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니체에게 기댄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극이 ‘분분한 낙화’보다 더 애절한 이 땅의 사월을 지나며 더 울부짖고 이중인격으로 자기를 물어뜯자 서글픈 다짐을 다시 해본다. “상처가 썩으면 독화살도 뽑혀나간다”라고 최승호 시인이 말했다. 그리고 “모든 상처가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 최승호의 시, 「조개껍질 같은 방에서」 중에서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