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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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과 희망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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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아래 살짝 핀 ‘영춘화(迎春化)’ 사진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봄기운은 일상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내 경우 각종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중에서 세대 감각에 걸맞게(?) ‘페이스북’을 주로 이용하는 편인데, 원래 이 서비스는 글을 게시하는 위주였지만 요즘은 사진과 동영상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록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 페이스북의 친구들 덕분에 지난 몇 년은 봄의 전신(前信)이라는 홍매화부터 영춘화를 거쳐 여름의 능소화까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고화질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잠시나마 일상의 무료함을 달랬고, 그보다 몇 배는 철마다 적시적소(適時適所)에 얼굴을 내미는 이들의 활동력에 놀라기도 했다. 최근에는 무엇보다 코로나19와는 무관하게 때를 맞춰 피어나는 각양각색 꽃들의 황홀한 향연이 게시 정도가 아니라 생중계된다. 이 ‘웃픈’ 상황이 사실은 꽃이 피는 이유가 꼭 그걸 지켜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란 점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에, 내 궤변이 어쩌다 맞아 떨어진 것 같아 씁쓸하게 좋았다.
예상했던 그대로 올해 봄은 ‘비대면(언택트, Untact)’이란 꼬리표와 함께 왔다. 자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순환하는데, 인간은 각종 행동 강령과 기술상의 지시에 따라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봄을 맞으라는 압박 속에 던져져 있다. 굳이 빅데이터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지난해의 사태를 조금만 유의해서 살피고 좀 더 깊게 생각해보았다면 우리의 일상이 이 봄에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의 상태, 그러니까 대면 상태에서 인간의 제반 행위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표준이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도 한다. ‘뉴노멀(New normal)’이란 용어가 불시에 시대를 정의하는 중요 개념이 되어버렸다. 아뿔싸!
나는 왜 최소한으로 제한해도,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겪는 이 미증유 ‘사태’의 불편과 불안에 예민한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있는가. 사실 적응하면 그만이다. 시수가 많지는 않지만, 강의는 학교의 시스템이 워낙 잘 갖춰져 있어서 매뉴얼(Manual)만 잘 따르면 크게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런저런 원고를 주고받는 것도 모두 디지털 전자 기기를 이용하면 되니 실은 심술을 부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정말 왜, 나는 ‘비대면’이라는 행위 조건에 극렬한 반감이 드는 것일까?
19세기의 이단아, 프랑스 시인 S.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는 “인간의 얼굴보다 더한 유혹은 없다. 인간의 얼굴이란 순수한 인류를 그의 가장 초라한 표현 속에 축소한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안다, 보들레르의 당대를 지배하던 사조(思潮)가 형식적 낭만주의라는 것을, 또한 그가 거기서마저 외설을 일삼는 아류이며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최소한 ‘인간의 얼굴’이란 상징을 직관을 넘어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존재였다. 그것이 시인 보들레르를 19세기가 아닌 20세기의 개척자로 인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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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이라는 조건을 전염병 탓에 발생한 특수한 상황이라고 정말 믿거나 기술 발달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쉽게 용인하는 것은 말 그대로 순진한 사고다. 뉴노멀로 본래 의미를 숨긴 새로운 기준은 인간관계를 확실한 계산 가능성과 투명성 아래 위치시킬 것이다. 그 결과는 자본에 대한 모든 인간적 가치의 종속, 노동권조차 쉽게 부정되고 개별 사업마다 가능한 소비능력으로 환원되어 핵심 가치가 아니라 종속 변수로의 인간 전락이다.
이 근거 없는 비약과 우울한 전망은 나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부동산 투기 사태 이전에 내 삶을 강타한 어휘는 ‘영끌하다’라는 신조어다.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심정“으로 자본을 확충해 부동산이나 주식 등에 투자하는 세태를 빗댄 표현이라 한다. 완벽한 전도(轉倒)다. 대낮의 밝은 이성이 아니면 결코 행할 수 없는 판단력과 예지력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역동적으로 희망적인가?
주지의 사실이지만, 희망에 관해서라면 판도라의 상자(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고려하면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가 옳다고 하는데, 귀에 솔깃했지만 이런 데서마저 정착된 용어를 바꿀 필요가 없다 생각되어 그냥 ‘상자’로 간다.)처럼 유명한 ‘우화(fable)’도 없다. 서양 문화에서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함의 대신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이면에 끝까지 남는 어떤 초월적 존재의 도움, 혹은 기회(계기)의 도래를 증거 하는 의미가 되었다.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기독교의 구원과 관련해서 그런 변형이 일어난 것이라고 짐작은 할 수 있다.
이를 고전, 즉 고대 그리스식으로 다시 읽자고 주장하고 나선 이는 F. 니체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 ‘우화’의 해석을 달리 한다. “판도라는 재앙들로 가득 찬 상자를 가져와서 열었다. 이것은 신들이 인간에게 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선물이었고 '행복한 상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때 상자에서는 날개를 단 살아 있는 온갖 재앙이 튀어나왔다. 재앙들은 그때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밤낮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쳤다.”는 발단 부분은 기존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상자에서 단 하나의 재앙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그때 판도라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뚜껑을 닫았고, 그래서 그 재앙은 상자 속에 남게 되었다. 인간은 영원히 행복의 상자를 집안에 두고 어떤 보물이 그 속에 들었는지 신기해한다. 인간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욕심이 날 때면 거기에 손을 뻗쳐보기도 한다. 인간은 판도라가 가져온 상자가 재앙의 상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재앙이 행복의 최대 보물인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전개 부분에서 확연히 달라진다. 재앙이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게 ‘희망’이라는 일반적 이해와는 달리 마지막에 남은 ‘희망’이야 말로 인간 최대의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재앙을 잔뜩 담은 상자에 그것과 정반대 성질의 무엇을 하나 감추는 ‘위트(wit)’가 과연 ‘신’에게 가능한 자질인가. 어쨌든 니체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오지 못한 ‘희망’을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으로 판단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단지 연장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이야,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니 굳이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판도라의 상자’는 ‘파블(fable)’이다, 즉 상상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이때 ‘상상’은 ‘사실이나 실제’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음, 즉 언제나 뒤틀리거나 모호해지는 어떤 성질을 함유한 자질에 적용될 뿐, 자명한 사실에는 사용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희망이 인간의 최악의 재앙’이라면 ‘판도라의 상자’라는 상상의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물그릇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라.
어른대는 굴곡의 바람과 아픔이 바로 인간이고 희망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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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최악의 조건이 ‘인간’이라면, 최선의 상태도 ‘인간’에게서 비롯하는 것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류라는 추상적 관념으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물그릇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라. 어른대는 굴곡의 바람과 아픔이 바로 인간이고 희망의 얼굴이다. 우리는 이 전제 아래서만 시를 쓰는 참된 이유와 후세대 교육의 기준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카프카는 한 편의 시 같은 장편(掌篇) 산문집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의 예술이란 진실에 의해 눈이 부신 상태이니 뒤로 물러서는 찡그린 얼굴 위에 내린 그 빛이 진실하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그렇지 않다”는 날카로운 판단의 한 획을 남겼다. 어쩌면 인생이란, 얼굴 위에 쏟아지는 햇빛, 살아 있음을 단 한마디도 없이 증명하는 진실한 빛 아래 비록 ‘찡그린 얼굴’일지라도 또 주춤 물러서는 자세일지라도 그 순간을 진실하게 맞이하는 것 아닐까? 또 그것이 ‘희망’이고 생기(生氣)의 ‘도약(跳躍)이 아니겠는가?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