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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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백인덕 

 

 

 

Dum Spiro Spero,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1

  아름답다고 다 존재하는 게 아니듯이 바람직하다고,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늘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매 순간 보충되거나 새로 생겨나지도 않는다. 삶이란 결국 결핍을 알아차리고 수긍하고 적응하는 상대 없는 경주와 같다. 두 번 다시 그 거리가, 구간이, 트랙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의 최종 기록 따윈 아무 의미가 없다. ‘희망’도 그렇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매 순간을 살아가자면 그것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은 자기 얼굴이 ‘결핍’이라는 것을 여실히 매섭게 보여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희망 에스프리’를 쓸 수 있을까, 한 번도 아니고 연재를. 코로나 3차 대유행으로 긴장의 강도가 높아만 가는 겨울밤, 나는 벌써 내가 판 묘혈(墓穴)에 반쯤 떨어진 상황이다. 그러므로 아직 지상(地上)에 남은 몸의 반쪽과 지하로 미끄러진 몸의 반쪽을 동시에 의식하며 글을 쓴다. ‘희망 에스프리’에서 ‘희망’에 대한 기대를 허공에 날려버리면 이제 ‘에스프리’가 남는다. 정신의 정수(精髓)라고 할까. 그냥 시 정신이라 할까. 아포리아(aporia)의 오기라 우겨 볼 가. 정공법으로 가자. 에스프리는 담보하고 있는 그 무엇을 지시하지 않는다. 낙숫물이 단번에 바위를 뚫는 것은 아니다. 수천만 번, 아니 거기 다시 10승을 더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에스프리를 ‘벼락’과 같은 의미로 쓴다. 번쩍 희망이 왔다. 깨어나니 원래 그대로더라 일 순 없다. 희망을 늘 품고, 에스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의 이 더럽게 낡은 비늘부터 벗어야 한다. 벼락처럼 매 순간 번쩍번쩍 ‘희망의 에스프리’에 찌릿찌릿 감전되면 그뿐 아닌가, 그것도 한 생의 전략이다.

 

 

  2

  고백하건대, 나는 라틴어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그래도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를 ‘둠 스피로 스페로’로 발음하면 좀 어떤가? 내 바람은 이미 사실들의 경계를 뚫고 새 지평에서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는데.

  빅토르 위고의 고전 명작,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1831)를 읽은 바 없다.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우스개처럼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KBS <명화극장>에서 방영한 영화, <노틀담의 꼽추>(1956)를 본 기억만은 선명하다. 결코 확인되지 않겠지만, 중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후 에스메랄다 역이 지나 롤로브리지다, 콰지모도 역이 안소니 퀸이었다는 정보만 추가되었을 뿐, 비극으로 끝난 청순한 사랑에 대한 애석함은 내내 남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올 때까지, 아니 시그널 음악과 함께 <명화극장>의 ‘끝’ 타이틀이 뜰 때까지도 하늘에서 하얀 날개의 천사가 내려와 종소리와 함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하늘로 데려가길 간절히 희망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 희망이 좌절로 변하는 순간, 영상이 아니라 글로 내가 바라는 대로 결말지을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길 꿈꾸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사족이지만, 1983년에 같은 <명화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안소니 홉킨스와 레슬리 앤 다운이 주연한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다. 영어 원제로 <The Hunchback Of Notre Dame>인데, 물론 감동적이었지만 커진 스케일만큼 감동이 커진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Spiro Spero’는 ‘나는 숨 쉰다, 나는 희망한다’의 라틴어다. 소통하는 것 자체, 즉 호명-응답하는 반복으로 존재가 성립하는 인간에게 언어는 가장 보편적인 도구이면서 동시에 광범위한 장애다. 인류의 뇌는 언어 습득과 사용에 필요한 같은 구조를 가졌지만 거기 착상하는 개별 언어에 따라 천차만별의 뉘앙스를 만들어 낸다.

  라틴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 외국어에 무지한 탓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러 자료를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Spiro, spero."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 나오는 말인 것은 확실하다. 2005년에 초판 발매된 민음사판 한글 번역에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다. "연금술에 쓰인 풀무의 위쪽 판자에는 다음과 같이 구리 글자가 박혀 있다. ‘Spira, Spera. 불어라, 바람아.’ " 영문판에는 이것이 "Spiro, spero"로 되어 있다. "Beside it lay a pair of bellows equally dusty, the upper side of which bore in letters of copper the motto: Spiro, spero." ‘Dum Spiro Spero.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라는 의미이다. "불어라, 바람아"는 연금술에 쓰이는 풀무를 돌릴 때의 간절함을 드러낸다. 소설에서는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비천하고 남루한 인생이 바람에 의해, 그러니까 거센 불길에 의해 정화되어 고귀한 어떤 것으로 변모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의 상징으로 쓰인 셈이다.

 

  여기서 두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바람’에 관한 것. 묘하게도 우리말 바람은 ‘바람(希)’과 ‘바람(風)’의 음성 표기가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 더 나가 상징으로 해석하자면 바람의 변화무쌍함과 시종(始終)의 불명확성이 차용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연금술과 관련한 것이다. 며칠 전 페이스북 친구께서 ‘야금(冶金)’과 ‘연금(鍊金)’의 차이에 대해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언급한 바 있다. 야금은 철광석처럼 원래 함유한 성분 중에서 요긴한 것을 따로 추출해서 쓰는 기술이다. 즉 그것은 화학적으로 분리, 배제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달리 연금술은 각 원소의 창조적 융합, 재구성을 통해 배제되는 부분 없이 전체를 보다 귀중한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 시대는 희망을 야금하고 있는가, 아니면 연금하고 있는가? 물론 희망이 늘 나의 결핍과 동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가로놓인 곤란과 어둠을 걷어내고 희망을 건져내는 손쉬운 야금술을 발휘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날이 지옥이고 시대와 사회와 문화와 환경이 다 지옥으로 향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지옥문 입구의 경고, "Lasciate Ogni Speranza(모든 희망을 버려라)."를 가슴에 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3

  김수영 시인은 갑오년 11월 24일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필자의 서툰 셈으로 계산해보니 1954년이고, 시인이 만 33살이 되던 해다.) “누가 무엇이라고 비웃든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애인이, 벗들이 무엇이라고 비웃고 백안시하든 그것이 문제일 까닭이 없다.” 시인에게 희망은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외곬의 의지에서 스스로 빚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일기와 관련이 있다고 회자(回刺)되는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이 땅의 여느 시인처럼 김수영 시인의 유명한 개인사도 읽어 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활도 정신도 다 제대로 추스르기 어려웠으리라. 그 시대의 궁핍이란 ‘베이비부머’ 세대의 끝자락에 자리한 필자가 ‘꼰대’ 소리 감수하며 떠드는 가난을 가뿐히 뛰어넘을 것이다. 우리는 안다. 김수영 시인이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어떤 결핍에 시달렸는지, 그래서 또 어떤 희망의 에스프리를 우리에게 빗금 쳐주었는지.

 

  인의 절망과 희망의 드라마는 언제나 존재로서 ‘자기(The Self)’에게 귀환하지만 단순한 환원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지금’이란 이름의 진공 상태는 ‘죽음’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에. 시인은 늘 결핍과 동행하며 희망의 향과 소리와 빛깔을 빚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인간과 생명의 층위에서 시인은 늘 헐벗은 자이기에 희망의 경계에 늘 맞닿아 있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 시인의 ‘에스프리’를 통해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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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제11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21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