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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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진임 

 

 

 

 

 

두 줄은 너무 짧고 네 줄은 너무 길어

 

 

 

 

능선 너머 또 능선 극락을 보라는가

파도 앞에 또 파도 고해를 보라는가

이 순간 내게 오시는

물결은

부처신가

 

ㅡ 김일연, 「불이; 부석사 안양루에서」 전문

 

 

  극락과 고해가 시인의 눈앞에 동시에 펼쳐져 있다. 게다가 능선 너머 또 능선이라니……. 시적 화자는 첩첩한 산중에 들어 망루에 올라 있다. 저 멀리 눈을 두고 마음도 그리 멀리 둔 채 멀고 또 가까운 산의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다. 능선은 일견 극락을 보여주는 듯도 한데, 능선이 곧 집채만 한 파도와 그 파도를 뒤따라오는 또 다른 파도로도 보인다. 능선의 이미지가 파도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능선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다시 능선이다. 그러하니 극락이 곧 고해의 사바 세계이고 사바 세계가 또 마음 바꾸면 극락이기도 할 것이다.

 

  흔히 시조의 삼장 형식 속에서 시인은 자연의 모습을 변주하여 보여주면서 그것으로 첫 두 장, 즉 초장과 중장을 이루곤 했다. 그러다 종장에 이르면 돌연 눈길을 내면으로 돌려서 서정적 주체의 삶을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그래서 초, 중장과 종장의 결합은 이질적인 두 형식의 강제적 통합으로 이해하여 마땅하다고 주장해 왔다. 조창환 교수 등이 그런 주장의 근거를 살펴 제공해 왔다. 종장에서만 유독 3,4 음절의 반복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3,5,4,3 이라는 변형과 파격을 주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김일연 시인은 초, 중장의 기본 성격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동일한 소재, 즉 능선을 노래하면서 먼저 능선을 능선이라 했다가 다시 파도라고 읽는다. 초장에 꽃을 그리고 중장에서 나비를 그리던 전통으로부터 조용히 멀어져 간다. 그래서 극락과 고해가 나란히 초, 중장에 등장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진다. 능선을 능선이라 칭하지 않고 곧장 파도의 이미지를 들이대었더라면 독자는 시인이 파도로 형상화한 것이 사실은 능선이리라 짐작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먼저 능선을 능선이라 했기에, 그 능선이 파도가 되어도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다. 사실상 산이 지닌 흙의 이미지와 파도가 지닌 물의 이미지는 매우 상이하여 서로 간의 거리가 꽤나 멀다. 그들은 금성과 화성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준비과정 없이 들이댄다면 무리한 상상력의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련한 시조의 마에스트로(maestro)는 무엇을 배치하고 무엇을 제거해야 하는지 생래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설명은 잉여를 낳을 것이므로 시조 시인들은 설명을 가장 경계한다. 그러나 지나친 함축은 마찬가지로 독자를 힘들게 한다. 겨우 세 줄이 시조의 몸을 이룬다. 삼장의 형식 속에 셋 이상의 심상을 부려 놓으면 빽빽해져 간결한 우아미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짐짓 여백을 남기듯 일상어를 하나쯤 배치해두어야 한다. 사봉 장순하 시인은 “허자(虛字) 한 자 시귀와 얼려 관주비점 하는 그것”이라 일렀다. 허자 한 자 부러 부리듯 김일연 시인은 능선을 그저 능선이라 이를 줄 안다. 그러므로 능선이 파도가 되는 변화가 완만하고도 자연스러워진다. 더구나 시인은 극락과 고해를 그 능선에서 동시에 읽으려 한다. 그러니 더욱 단순하고도 담담하게 능선을 능선이라 이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능선에서 곧 극락과 고해라는 엄청난 실존과 초월의 함의를 동시에 읽을 것이니 그러하다. 능선이라는 자연의 일부가 곧장 종교적 현현의 장면을 향해 돌진할 것인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폭포처럼 직방으로 날아내릴 것이다. 그러나 종장에 드러나듯 시인의 내면에서는 형이상학적 초월의 순간이 이미 생겨나고 있다. 내면의 그 폭포는 지구의 중력에 맞서는 반역의 폭포이다. 거꾸로 떨어지는, 아니 거꾸로 솟구치는 물줄기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순간 내게 오시는 물결은 부처신가” 종장에서 시인은 우리 현대 시조의 한 전범을 이루어내는 역사(役事)를 마침내 완성하고 있는 듯하다. 극락이면서 고해인, 극락도 고해도 아닌, 극락과 고해 너머, 극락과 고해의 경계가 없는, 극락과 고해를 함께하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부처의 가르침이 묵언의 물결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능선 너머 또 능선이 있고 파도 너머 또 파도가 있듯, 삶의 고해는 끝없이 연속될 것이다. 극락은 어디에 있는가? 고해의 바다에 이는 파도에서 찰나의 극락을 볼 수도 있으려나? 부석사 안양루 망루에 올라 능선 너머 능선을, 파도 너머 파도를 망연자실 바라보리라. 그러노라면 고해와 극락을 동시에 잠시 느낄 듯도 하리라. 미국 시인 헨리 코울(Henri Cole)의 「부처와 일곱 호랑이 새끼(Buddha and the Seven Tiger Cubs)」가 생각난다. 목숨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부처의 마음이라면 욕망에 몸부림치는 우리 삶의 고뇌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금 묻게 된다. 먼 산을 보면서 삶의 고락을 되새기고 그 삶을 넘어서는 종교적 체험까지 녹여내는 것이 김일연 시인의 텍스트이다. 그것이 단 세 줄로 가능하다니 시조는 참으로 세련된 문학 양식이다.

 

  문득 일본의 하이쿠를 생각해본다. 에즈라 파운드가 그토록 심취하여 「지하철 역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라는 이미지즘의 시학을 수립하게 만든 하이쿠. 하이쿠는 17음절, 단 두 줄이다. 그래서 무심한 듯 자연을 그리는 데 한 줄, 180도 방향을 전환하여 유심하게 마음을 그리는 데 또 한 줄을 바친다. 파운드도 그 양식을 빌어 먼저 비에 검게 젖은 나뭇가지를 그렸다. 그런 다음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하이쿠 시인이라면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 이렇게 읊었겠다.

 

 

능선 너머 또 능선 극락을 보라는가

이 순간 내게 오시는 물결은 부처신가

 

 

  이러한 하이쿠라면 그것도 그럴싸하겠다. 능선 너머 또 능선, 능선의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독자로 하여금 그들 마음의 풍경화에 능선들을 그려 넣게 만든다. 그리고 다음 줄에서는 마음에 이는 물결을 감지하며 극락과 부처를 생각하게 만든다. 산을 그렸는데 초월이 주제가 된다. 그것이 하이쿠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김일연 시인은 극락과 고해를 함께 본다. 시조 형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아니, 어쩌면 시조 형식이 먼저 요구하였을 수도 있다. 능선은 곧 극락이지만 그 능선은 또한 파도이기도 하니 극락은 바로 고해라는 사실을 시조는 적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부처가 더욱 부처다워진다. 그때 부처는 비로소 부처의 부처됨을 드러내게 된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에, 이항대립의 사유를 일찌기 넘어선 곳에 부처의 마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이쿠에서는 흑백의 판화를 보듯 두 가지 이미지가 지배한다. 능선과 부처. 김일연 시인의 시조에서는 그 흑백조차 선명하지 않다. 흑인지 백인지, 흑이 백이 되는지, 백이 흑이 되는지 분별할 길도 없고 구별할 뜻조차 없어진다. 양자를 모두 아우르며 양자를 동시에 부정하고 넘어서는……. 아, 부처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리라, 알 것도 같고 모르는 듯도 하다.

  일본은 두 줄의 하이쿠(俳句)로, 중국은 네 줄의 사언절구(四言絶句)로, 우리는 우리대로 세 줄의 시조(時調)로, 쓴다. 하이쿠는 제시하고 곧장 마무리하는 간결한 일본 미학을 드러낸다. 절구는 기, 승, 전, 결의 네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서서히 이미지를 펼쳐간다. 그런 다음 방향을 틀어 복합성을 도입하고 마침내 마무리에 이른다. 시조는 하이쿠의 제시와 마무리 사이에 변주의 공간을 마련한다. 시조는 절구의 전과 결을 한 줄, 종장에 압축한다. 그러므로 시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문학 장르이다.

 

  먼 산을 마주하면서 석양의 빛에 젖은 소나무와 더불어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는 선비의 전통을 우리 민족은 지녀왔다. 한 폭의 그림같이 다가오는 먼 산을 그려낸 고시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巖花 春晩한데 松岸에 夕陽이라

平蕪의 내거드니 遠山이 如畵ㅣ로다

潚酒한 水邊亭子의 待月吟風하리라 

 

바위 새에 핀 꽃에 봄이 기울어 가는데 소나무의 언덕에는 석양이라

평평한 언덕에 먼산이 그림과 같도다

기운이 맑고 깨끗한 수변정자에 달을 맞아 시를 읊으리라.

 

 

  선조들이 깃들어 살았던 이 땅, 그 소나무, 그 달, 그 바람은 오늘도 그대로이다. 그처럼 아득히 우리를 둘러싼 그 산들을 물려받아 오늘날 현대 시조 시인들은 이제 그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동일한 자연 속에서 聖과 俗을 함께 읽는다.

 

  다시 김일연 시인의 텍스트에 각운처럼 매 장 끝에 등장하는 ‘는가’ 혹은 ‘신가’ 종결 어미에 주목한다. 시의 애매성(ambiguity)이란 이렇게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로구나 한다. 우리 말로 번역해 놓으면 참으로 맵시 없는 말이 영어의 ambiguity이다. 애매하다니, 모호하다니……. 뜻이 흐릿하다는 것밖에 더 될 것인가? 시로 하여금 시이게 하는 것, 시의 요체가 바로 애매성인데. 복합성이라 할까, 풍요로움이라 할까, 중층성이라 할까. 단정하지 않는 것, 주장하지 않는 것, 강요하지 않는 것. 우리가 시적이라 일컷는 것은 바로 그 언어의 유연성, 함축성, 복합성이다. 영어로 시적이라는 뜻의 poetic, 프랑스어로 poetique는 극찬의 어휘이다. 문화의 정수가 거기 담겨 있을 때에만 형용된 대상은 그 표현에 값한다. 필자는 그래서 시의 언어를 두겹의 언어라 불렀다.

  처음 욀 때 무딘 마음에 ‘이것이 극락인가’로 잘못 입력되었다. 고쳐 외면서 시적 언어의 값어치를 다시금 확인한다.“극락을 보라는가”, “파도를 보라는가”, 그리고 마침내 “물결은 부처신가.” 그리고 텍스트의 마감은 선행하는 한마디가 있어 완벽해진다. “이 순간”.

 

 

 

[참고 문헌]

김천택 편, 홍문표 강중탁 역주, 『청구영언(하)』, 명지대학교 출판부, 1995, 36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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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임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202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