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진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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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내 뜻이오”
시조의 발전에는 수려한 언어 감각을 지닌 여성 시인들의 기여가 크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조선 시대 황진이는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준 여성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황진이는 여성인 자신을 청산과 명월로 표현하곤 했다. 호명의 대상이 되는 남성은 녹수 혹은 벽계수라고 불렀다. 산은 크고 정적이고 고요하고 넉넉하다. 달은 하늘 높이 솟아 천하만물을 굽어보는 존재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적인 것은 흔히 작고 가볍고 연약하고 부드럽고 유동적인 것으로 재현되곤 한다. 산이 남성성의 상징이라면 물은 여성성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황진이는 참으로 대단하다. 자신이 산이 되고 달이 되어 남성 주체로 그 자신을 상정하고, 상대를 물이라 부르며 여성의 이미지를 오히려 남성에게 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산리 벽계수야」와 「청산은 내 뜻이오」를 살펴보자.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니저 우러 녜어 가는고
시인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신분을 지닌 여성이었으니 유교 사회의 질서에서 보자면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당당하기만 하다. 누구에게도 의지를 굽히거나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다. 남성은 산, 여성은 물로 정형화된 비유의 질서를 교란시키며 자신의 위치를 홀로 자유로이 설정한다. 견고하고 자신감 넘치며 타자의 힘에 의해 조종되거나 구속받지 않는 여성 주체를 그려낸 것이다.
오늘 우리의 여성 시인들은 더욱 호방하고 단호한 어휘와 심상을 채용하며 자신의 삶을 그려나간다. 이 지구상에서 여성에게 호의적인 사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문화권에서도 그 점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여성 시인들은 외부의 호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여성 시인의 상상력에는 경계가 없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텍스트에 부린다. 텍스트 내부에서 여성 주체들은 기성 의 질서에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외롭게 홀로 서서 내면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선택한다. 삶이 만만해 보여서 그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엄청나서 힘들다고 느낄 때에도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꼿꼿이 선 채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기개를 지켜간다. 겉으로는 강인한 듯 말이 없다. 언제나 단정하고 결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으로는 매일 내적 출혈을 견뎌가고 있을 것이다. 혼자 울음을 삼키는 날도 많을 것이다. 정수자 시인은 “오라, 같이 울만한 사막의 권속이여!”하고 선언한다. 「사막풀」을 보자.
둥글게 몸을 말며 결전에 든 건기의 풀들
칼바람 칠 때마다 날을 물고 구른다
필생의 맞장을 뜨듯 위리(圍籬)로 먹을 갈듯
멀리서도 살을 찢는 잉걸불의 혓바닥들
오라, 같이 울 만한 사막의 권속이여
가시도 오래 씹으면 비백(飛白)으로 솟을지니
ㅡ 정수자, 「사막풀」 전문
인고의 날들은 많은 여성이 공유하는 것이다. 결코 한 사람에게만 사막과도 같은 삶의 자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제 몫의 아픔과 슬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니 삶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날, 나직히 읊어볼 만하지 않은가? “오라, 같이 울 만한 사막의 권속이여!”하고. 「사막풀」을 읽으면 정수자 시인의 「언송」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삭풍 장히 칠수록 흰 수염 펄펄나는”의 노옹의 모습이 생각난다. 겨울, 흰 눈이 천지를 덮고 찬 바람이 거칠게 부는 날, 오히려 흰 수염을 펄펄 날리며 당당함을 과시하는 존재가 있다. 옆으로 누운 소나무에서 시인은 그런 노옹의 이미지를 읽어낸다. 오히려 꼿꼿이 선 금강송보다도 지혜롭고 성숙한 삶을 시인은 언송에서 발견한 것이다. 언송이 보여주는 것은 성숙한 삶을 이루어 내면이 풍요롭기에 강인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현실을 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시인은 여성 주체에게도 그런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가시를 피해 가지 말라고 이른다. 오히려 그 가시를 오래 씹어 그것으로 상승과 초월의 힘을 얻자고 권유한다. 가시가 비백으로 솟을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맞고 보내자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삶은 힘들지라도 결코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고 또한 이른다. 사막의 권속은 다 오라고 한다. 와서 같이 울자고 청한다. 함께 울 만한 권속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어두운 세상의 등대 구실을 한다. 그 등대가 보내는 빛은 우리로 하여금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신호이다.
사랑과 자유를 노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선 여성 시인들의 목소리는 나날이 더욱 낭랑해지고 있다. 류미야 시인의 「호접」을 보자.
강철 돛을 매달라 누군가 말했지만
무엇과도 못 바꿀 이것이
나의 생시
날개는 쉬 찢겼어도
다디단 꿈 맛보았지
나는 슬프지도 나약하지도 않아
대낮의 조롱(鳥籠)은 날 가둘 수 없네
바람의 궁륭을 타고
죄의 눈썹
떨구며
가벼이 허물 벗고 죽도록
살다가는
사랑 속에 죽겠네, 이것은 나의 방식
그림자 죄 다 지우고
꿈속이듯 아니듯
ㅡ 류미야, 「호접(胡蝶)」 전문
류미야 시인은 자유롭게 꿈꾸고 살아가는 영혼의 한량없는 가벼움을 노래한다. 그 가벼움을 강조하기 위해 강철 돛과 대낮의 조롱이 배경에 등장한다. 찢긴 날개, 죄의 눈썹, 허물……. 사회적 제약의 틀을 벗어나는 과정의 몸부림들은 그런 어휘들이 담보하고 있다. 떨구고, 지우고, 바람의 궁륭을 타고……. 자유의 이미지는 그런 언어 속에서 떠오른다. 이것이 나의 생시, 이것은 나의 방식. ‘이것이’ 가 ‘이것은’이 될 때까지, ‘나의 생시’가 ‘나의 방식’이 될 때까지, 그 변화의 궤적이 곧 나비의 여로라 할 수 있다. 나비의 여로를 따라가노라면 우리 시대 여성의 삶의 방식을 찾게 된다. 경계를 지우고, 강철의 무게를 조롱하고 조롱의 한계를 비웃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와 사랑을 찾아가는 여성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그 일회성의 삶을 값지게 누리고자 하는 갸륵한 의지를 본다.
사족 하나 달아야겠다. 황진이 텍스트를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청산인지 어찌 아느뇨? 녹수가 그대를 그리워 하여 울고 가노라고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지…….’ 하나의 언술이 발화자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화자와 청자가 의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코헨이라는 학자는 지적한 바 있다. 의미의 공동체 안에서는 부가적인 설명과 해석이 덧붙여지지 않더라도 한마디의 말이 특별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대상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언술은 발화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청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 황진이와 벽계수의 시대, 그 둘은 시를 사랑하기에 시를 통해 달과 물을 희롱하며 기꺼이 그 언어 유희를 즐겼을 것이다. 코헨이 이르는 대로 그들은 의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황진이는 벽계수에게 쉬어 가라 자유로이 이를 수 있었고 흘러가는 녹수를 두고 님 그리어 그러노라 말할 수 있었겠다. 이제 발화자의 진실이 상대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우리는 상대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며 발화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황진이 시는 이 시대에는 위태로운 텍스트일 수 있겠다. 녹수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녹수에게는 발화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녹수가 청산을 못니저 우러 녠다고 이르고 있으니. 우리는 의미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지, 이즈음 자주 의심하게 된다. 곳곳에서 오해와 대립의 소식이 들려오는 시절에 오래된 고전을 읽노라니 문득 드는 생각이다.

박진임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2021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