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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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동억 

  2024년 3월 공시사 월평 


  

 

 

 

 

아홉 번째 걸음. 동물성

 

● 박동억

 

 

 

 

— 동물에 관한 한 윤리와 미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윤리보다 앞서는 것은 미학이다.

 

 에버랜드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린 판다 푸바오는 귀엽다. 푸바오의 외양은 몽글몽글 하고 앙증맞으며 부드러워 보인다. 하지만 최근 우리는 푸바오의 귀여움을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의 판다는 중국 정부의 소유이고 친교의 사절로서 다른 나라에 보내진다. 그리고 푸바오는 중국 정부에 2024년 4월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푸바오의 생활을 공개할 수 있는 기한은 2024년 3월 3일까지 였다. 이 때문에 이 마지막 날에는 푸바오를 보기 위해 새벽 여섯 시에 입장한 사람도 있었고, 여섯 시간의 대기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보도기사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 한다. “푸바오는 떠나지만 엄마, 아빠 판다인 아이바오와 러바오, 그리고 쌍둥이 동생들인 루이바오와 후이바오는 남아 있어 판다월드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1)

 한편으로 푸바오는 동물이 사람에 의해 거래되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모든 판다는 중국 정부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푸바오는 다른 나라에 임대되고 반환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중국 정부와 다른 국가 사이의 친교를 상징하는 이데올로기적 상징물이 된다. 한편 인용한 뉴스 보도처럼 푸바오는 다른 판다에 의해 금세 대체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대체’와는 사뭇 다르다. 직장에서 한 직원은 그의 능력이나 성품, 혹은 자본의 흐름과 같은 실용적 맥락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 반면 푸바오가 다른 판다로 대리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귀여움이라는 비실용적 맥락 때문이다.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판다는 모두 귀엽다. 푸바오는 중국으로 떠나더라도 그 가족의 귀여움은 한국에서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숙고해볼 것은 동물을 비롯한 자연물을 대하는 ‘미학적’ 판단의 본질이다. 동물에 관한 한 윤리와 미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윤리보다 앞서는 것은 미학이다. 귀여움은 현대사회의 동물 윤리에서 가장 강력한 잣대이기도 하다. 귀여운 동물은 선호되고 그렇지 않은 동물은 배제된다. 그렇다면 귀여움은 아름다움인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로젠크란츠에 따르면 귀여움은 오히려 추(醜)의 한 양상인데, 그것이 추함인 이유는 열등함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나 동물이 귀여운 이유는 바라보는 사람보다 대상이 열등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측면에서 동물은 인간보다 똑똑하지 않고, 인간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으며, 인간보다 왜소하기 때문에 귀여울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해야 할 것은 미적 판단에 내포한 권력의 역학이다. 우리는 감상 대상보다 강하거나 최소한 대등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반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반대로 대상이 ‘나’를 압도하거나 지배할 수 있다면, 예컨대 창살을 빠져나온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 이와 달리 귀여움은 감상 가능한 것이고 관리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귀여움의 범주는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 능력과 비례하여 커진다. 이 때문에 귀여움은 외양에 대한 판단만은 아니다. 귀여움은 자연 속에서 ‘순한 고양이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을 발견하는 우리의 직관적 능력을 뜻하면서도, 다른 생명을 인간 아래 귀속하는 권력의 역학이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동물을 귀엽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만화 <포켓몬스터>에서 귀여운 포켓몬과 그것에 대한 지배를 명확히 하는 포켓볼 사이의 관계처럼, 사육사가 길들인다면 야생 호랑이조차 귀여운 것이 될 수 있다.2)

 

 

— 오히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을 모색하는 탐구이다.

 

 인류학자 하마노 지히로의 석사 학위 논문이자 도발적인 문제작 『성스러운 동물 성애자』(연림서가, 2022)에서 다루는 것은 제목 그대로 ‘동물 성애(Zoophilia)’, 즉 사람과 동물 사이의 사랑이다. 이 책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서 동물과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는 스물두 사람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물을 반려자 혹은 연인으로 호명하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이들을 연구하며 저자는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동물성애는 동물의 성을 착취하는 ‘수간(bestiality)’과도 다르고, 동물을 단지 야생 동물(beast)로 간주하거나 미성숙한 애완동물(pet)로 간주하는 태도와도 구분된다. 오히려 동물 성애자는 동물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대등한 타자로서 받아들이며, 동물의 영역을 섣불리 침범하지 않으며 성스럽게(saint) 대하는 자세로까지 이행한다는 것이다.3)

 그런데 왜 그녀는 동물 성애를 탐구한 것일까. 실은 이 연구는 동물 성애자나 동물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을 모색하는 탐구이다. 하마노 지히노는 줄곧 섹슈얼리티를 연구 주제로 삼아왔는데, 여기에는 저자의 사적 경험이 얽혀 있다. 하마노 지히로는 젊은 시절 만나게 된 연애 상대에게 10년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폭력을 당했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맞고 발로 차이는 구타 속에서 ‘갈기갈기 분리된 신체와 정신 상태’에 처했고 저항할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줄곧 섹스를 당했다. 그녀는 상대를 어르고 달래려는 목적으로 섹스를 받아들였다. 우리가 그녀의 처지에 놓이지 않는 한 우리는 폭력의 경험자가 처한 정신의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 곤경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남자와 결혼했다. 폭력의 증거를 모아서 가정법원에 그를 기소하기 위해서였다.

하마노 지히로는 이렇게 묻는다. “말에 의한 합의가 있었다면 성폭력이 아니라는 논리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언어를 중시할수록 덫에 빠진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라는 전제를 부정하면서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는 동물로서의 인간과 개와 말과 같은 다른 동물 사이의 육체적 대화를 탐구한다. 하나의 몸이 또 다른 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물음은 두 가지 의미로 인간성을 확장한다. 첫째로 그것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인간이라는 전제가 지닌 모순, 실상은 인간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육체적 폭력을 반복하여 자행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정신적 삶만을 인간적인 생활로 치부하면서 진실을 은폐하는 모순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둘째로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동물성으로 격하했던 관계 방식, 몸짓과 성애를 통해 교감하는 그 대화의 방식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무엇인지 성찰하게끔 한다.

 

 공감은 무엇인가. 이 개념을 정초하기 위한 현대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이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기 위해서 인간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성이 곧 인간이 관계 맺는 총체라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를 도외시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인간다움이란 어떻게 정초할 수 있는지 논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지배 질서의 재편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열을 가리는 비교의 형식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타자와 하나의 타자가 대등하게 관계하는 공감의 형식이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인간이?  붉으락 푸르락하다.  인간은 몹시 화가 난 것 같다.  어떻게, 울부짖는 인간은 아름답다. 쪼그라든 입을 가진 인간은 종일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벌거벗은 아이들, 복숭아와 물고기. 아수라장이 된 시장, 부서진 시멘트 벽돌 아랑곳하지 않고, 굴러떨어진 사과, 사과를 총총 따라가는 강아지, 빈 목줄 잡고 질질 끌려가는 맨발의 노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게, 어떻게, 인간입니다. 드럼통에서 검은 것이 계속 검게 타고 있잖아요

ㅡ 이기성, 「식인의 세계」 전문(《현대문학》, 2024년 1월호)

 

 인간 본성의 끔찍함은 어느 정도인가. 이기성 시인의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 심연이지만, 섣부르게 표현하기를 주저하는 대상 또한 그 심연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기보다 독자가 현실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떠올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반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시의 제목처럼 현실은 ‘식인의 세계’, 즉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로 암시된다. 하지만 작품에서 식인의 이미지가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폭력의 정황이 재현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아수라장이 된 시장” “부서진 시멘트 벽돌” “굴러떨어진 사과” 등의 쉼표로 분절된 시어에서 자행된 폭력의 규모를 연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에 제시된 드럼통에 갇혀 ‘검게 불타는 것’은 시인이 연상하는 폭력이 형상이 곧 구속과 파괴임을 유추하게 한다.

 왜 이기성 시인은 폭력의 이미지를 전면화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을 그만큼 잔인한 존재 라고 단언하지 않으려는 태도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시 안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어떻게, 울부짖는 인간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은 역설적이다. 그런데 이 시구 그대로 이 작품이 아름답게 간직하려는 것은 ‘울부짖는 인간’, 즉 약자이다. 이 작품은 약자를 들여다보며, 약자의 곁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흔적을 묘사한다. “쪼그라든 입을 가진 인간”과 “벌거벗은 아이들”과 “빈 목줄 잡고 질질 끌려가는 맨발의 노파”는 약자의 전형이다. 그것은 증언할 수 없는 자, 소외된 아이와 노인을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들을 조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망하지 않기. 이 시가 준수하고 있는 원칙은 의미심장하다. 매스컴과 학자는 폭력의 원인과 규모를 조사하고 권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 한다. 반면 이기성 시인의 시는 체험을 그려낼 뿐이다. 울부짖는 자의 곁에 다가갈 뿐이다. “어떻게”라는 물음은 세계를 조망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에 갇혀있는 자의 물음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시인의 시선은 ‘드럼통을 바라보는 위치’가 아니라 ‘드럼통에 갇혀 있는 위치’까지 포개어질 수 있기를 욕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음미할 것은 폭력에 대한 이미지보다 그러한 폭력을 그려내는 위치이다. “어떻게”라는 반문의 반복 속에서 세계는 형언할 수 없는 것, 공포스러운 것, 그러나 우리의 삶을 옭매는 굴레가 된다.

 

너의 몸 어디든 손을 올려놓으면,

순간 내 손이 물에 잠기는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느낌

그동안 그렇게 무심결에 잠긴 무수한 내 손들을 싣고

밀물이 지구 끝에서부터 밀려와서 텅 빈 해변을 텅 텅 때리는 소리!

그리고 썰물이 빠져나간 해변처럼 텅 텅

너의 몸이 빠져나간 너에 대한 기억 위에 쓴다

 

선잠 위에 떠 있는

눈꺼풀에 달라붙은 얇은 햇빛의 무게만큼 지구는 매일 야위어가고 있어. 그 햇빛의 무게가 한 계절 동안 빠진 만큼 너는 꼭 십이 킬로그램쯤 야위었어. 죽은 아이의 몸무게만큼 빠져나갔어. 그것이 네 영혼의 무게였어.

 

바다는

내던져도 깨지는 일 없이, 물결처럼 우그러진 거울이며

보풀 같은 포말이 쉼 없이 피어나는 지구가 걸친 코트이며

코트 안쪽 주머니 속에 꽂힌, 파도를 모두 묶어 만든 시집이며

 

지구 반대편 전쟁 폭음처럼 파도 소리가 먼저 덮쳐오는데

나는 무모하게 무방비로 햇볕의 끝단과 바다의 끝단을 기워 붙인 곳까지 너를 업고 달려갔다가

먼저 온 파도 소리의 꼬리를 잡고, 진짜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

 

사실 파도가 밀려오는 게 아니라

육지가 나만 그 자리에 남겨두고 눈 깜짝할 사이,

내 걸음으로 한 열두 발자국쯤 뒷걸음치며 밀려가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그 깨달음의 무게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신발이 다 젖었다

 

그래도 너의 신발이 젖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데 지구가 자꾸 야위어서 걱정이다

너는 영혼처럼 너무 가벼워서 밀려온 파도를

옷자락처럼 실수인 듯 밟으면 어쩌면 파도도 그 핑계로 이제 그만 멈추지 않을까, 물속 같은 상념에 잠겨

호젓한 해변의 소나무 숲에 해먹을 걸고 누워만 있어도

나와 너는 바다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처럼 기억처럼

ㅡ 김중일, 「매일 네가 야위어가는 지구 과학적 이유」 후반부(《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2월호)

 

 김중일 시인의 최근작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상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식인의 세계」와 나란히 읽어볼 수 있다. 우선 “너의 몸이 빠져나간 너에 대한 기억 위에 쓴다”라는 시구처럼, 이 작품은 애도를 주제로 삼고 있는 듯하다. 다만 ‘너’의 존재는 “지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죽은 아이”를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어떤 의미로는 사람의 죽음과 지구의 황폐화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것이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구 반대편 전쟁 폭음처럼”과 같은 직유는 이 작품이 애도하는 ‘너’가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으로 연상하게끔 유도하는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에 그려진 시선은 어느 곳에 놓이는가. 「식인의 세계」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은 조망하는 위치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조망하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 ‘물’과 ‘파도’는 “내 손”을 적시는 것, 무엇보다 “파도처럼 기억처럼” 밀려오는 것으로서 ‘너’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을 짊어질수록 ‘나’의 존재는 무겁다. 전쟁 폭음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파도가 밀려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신발이 다 젖었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기억, 누군가를 애도하는 마음을 짊어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여기서 조망하는 것은 애도의 역학이다. 지구 반대편의 불행조차 사람의 마음은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김중일 시인의 시는 적극적인 애도로, 요컨대 이기성 시인처럼 울부짖는 자의 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김중일의 시에 그려진 시적 태도는 수동적인 애도이자 머뭇거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밀려오는 파도로부터 때론 달아나고 때론 그 흐름이 멈춰버리기를 바란다. 이는 저 상실의 기억이 쉽게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임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호젓한 해변의 소나무 숲에 해먹을 걸고 누워만 있어도” 끝내 사람의 물기는 전해져오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물가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간직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는 셈이다.

 

깨어난 아침이 여섯 시 사 분일 때

대단한 위인이 몸속에 스민 기분이 들어요

 

어젯밤 썼던 일기장에 선을 직직 긋고 침대를 정리해요

이런 흥건한 문장들은 아무래도 안 어울리죠, 그러니까 나한테는 말예요

오늘은 머리를 감아야겠어요. 고개 숙인 동안 시대는 바뀌고

창문을 열고 코를 홍, 풀면

동네 개들이 내 머리 끝에 경건히 입 맞춰요

기분 좋게 인사 나눠요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는 사람

있으면 뒤에 서서 몰래 엿듣고 싶어요

이 세상에

감히 선으로 전달되는 목소리가 있다는 거

이상하죠, 끊고 싶어요

 

대통령탄핵취소를취소하라다이어트의성

지이사인칠칠팔팔축부처님오신날일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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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세요주님그대곁에                 

 

버스를 타면 아무거나 봐요

서울은 글자가 많은 도시

 

신호 대기가 길어요, 다 읽어버렸죠

오늘의 독서 목표

 

생각해 보면 멋대로 여기 놓인 것 같아요

살아 있다는 게 영. 오늘은 기분이 별로군요

 

군중들은 일렬로 행진해요. 저긴 어지러우니 여긴 평온할 거란 착각

글쎄요…… 사람들이 너무 거대한 거 같죠

걸어 다니는 한 개의 연약한 세계 곱하기 백만 천만

그거 잘 몰라서 자꾸만 섬뜩해져요

 

사라질 만한 세상이군요. 그렇죠?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어디에 있나요.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군요

 

어라, 달아났나요

나 오늘을 위해 일어났는데……

ㅡ 이지은, 「일어나서 만나요」 전문(《문학사상》, 2024년 2월호)

 

 이지은 시인의 작품은 세계감을 상실한 세대에 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주제와 더불어 도심에서 발견하는 문안을 인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지우의 「심인」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나’는 징후적이다. “고개 숙인 동안 시대는 바뀌고” 라는 표현이나 “버스를 타면 아무거나 봐요”라는 표현처럼, ‘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묵인하고 스쳐갈 뿐이다. ‘나’는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크게 관심 없을뿐더러 심지어 사람과의 관계에도 불안을 느낀다. “감히 선으로 전달되는 목소리가 있다는 거 / 이상하죠, 끊고 싶어요” 라는 시구에서는 그러한 불안이 타인의 대화에 훼방을 놓고 싶은 뒤틀린 마음으로도 전이되는 것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세계감의 상실, 관계의 부정, ‘나’의 방향 상실이라는 내용을 순서대로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세계감의 상실이라는 징후가 젊은 시인들에게 동세대적인 것이지만, 이 작품이 고백적 이기보다 잘 만들어진 풍자시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풍자적 성격은 자기 성찰적인 진술에서 묻어  나온다. “이런 흥건한 문장들은 아무래도 안 어울리죠, 그러니까 나한테는 말예요”라는 자기 인식을 드러 내거나 “이상하죠, 끊고 싶어요”에서 자신의 마음 가짐이 ‘이상하다’ 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대목은 이 작품이 ‘나’에 독자가 감정 이입하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들이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반성적인 작품으로 읽게 된다. 메시지는 “일어나서 만나요”라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그 무엇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조롱인 셈이다.

 

 

                                         

   1) 위유섭 기자, 「"잘가, 푸바오"…일반공개 마지막 날 관람객 '북적'」, <연합뉴스 TV> 2024년 3월 3일자.

   2) 「집에서 키우는 야생 호랑이? 고양이보다 순하고 강아지만큼 귀여운 인도네시아 반려동물 #Shorts」, EBS Documentary(EBS 다큐), https://www.youtube.com/shorts/hwSrWb4xqwY?feature=share

   3) 하마노 지히로, 최재혁 역,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연립서가, 2022, 23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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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평론집 『침묵과 쟁론』,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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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