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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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진임 

 

 

 

 

어긋난 인연의 노래

 

 

 

 

  사랑과 그리움은 마르지 않는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리라. 결핍 없이는 욕망도 없는 것인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노래는 부단히 생산된다. 동서고금의 사랑시가 그러하듯 어긋난 인연을 그린 노래도 이미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온갖 짐승들처럼 암수 한 쌍 짝을 지어 나란히 나아가면 세상은 마냥 아름다울까? 오히려 좌절된 사랑과 끊어진 관계로 인해 삶이 더 역동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인지……. 적절하지 못한 욕망의 대상을 향한 내면의 혼란과 고통, 그리고 영혼의 내적 출혈은 다양한 문학의 질료가 되어왔다. 영문학의 『가윈 경과 초록의 기사』를 위시하여 말이다. 시를 읽는 일은 ‘엿듣기’ 행위라는데 욕망의 서사를 읽는 일은 ‘엿보기’ 같다. 시는 일인칭 서술자의 내면적 독백에 해당하고 독자는 그 독백을 엿듣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서사 장르에서는 욕망의 은밀한 전개 과정을 엿보는 독서가 가능해진다. 가윈 경의 이야기에서 성주의 부인이 밤을 도와 가윈경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시의 독자와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된다. 사적 영역에 틈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사와 시의 독자가 매한가지이다.

  대답 없는 대상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의 고백은 당연히 인간사의 가장 근원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고 그를 재현하는 텍스트는 지구상에 산재해 있다. 영어로는 “unrequited”라는 표현이 ‘응답해주지 않는’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응답 없는 사랑은 인류의 깊은 비극의 원천으로 기능해 왔다. 욕망은 주체가 갖는 결핍의 느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월해 보이는 타자를 모방”하는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응답하지 않는 대상은 실제 가치보다 더욱 우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일 것이고 주체는 그 대상의 욕망조차 모방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옛시조 중에서 송이의 노래는 결핍, 욕망, 모방의 상관관계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님 둔 님’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 진주 기생으로 알려진 송이의 텍스트를 보자.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앉아

전전반측하야 님 둔 님 그리는고

차라리 내 몬져 죽어서 제 그리게 하리라

그 님도 님 둔 님이니 생각할 줄이 있으랴

 

 

  송이의 시조는 시조의 전형적인 형식적 틀에서는 벗어나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텍스트는 초, 중, 종장의 삼 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장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깊은 밤 홀로 앉아 님을 그린다. 전전반측하며 님을 그린다. 차라리 먼저 죽으면 님이 자신을 그리워하게 될 것인가 생각기도 한다. 애틋한 마음은 ‘그 님’이 하필 ‘님 둔 님’이라는 데에서 연유한다. 주체는 타자인 님을 향하고 있는데 그 타자는 타자의 타자인 다른 님을 향하고 있다. 사랑이 깊으면 그 사랑의 슬픔이 죽음을 벗처럼도 부르는 것인지……. 시적 화자가 님을 그려 전전반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진정으로 욕망의 대상인 ‘님’으로 드러난 타자를 향한 욕망을 지닌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님’이 님이라서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인지, 그 님이 또 다른 님을 향한 에로스적인 욕망을 지닌 까닭에 더욱 그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 욕망의 정체가 모호해진다. 송이는 에로스의 삼각형, 그 한 각을 차지한 까닭에 괴로워한다. 스스로 그 각을 허물어볼 생각을 한다. 님이 ‘생각할 줄이 있을’ 그 한 찰나를 궁리한다. 그냥 ‘님’이라는 어휘가 안정적 관계의 느낌을 환기할 것이라면 “님 둔 님”과 “그 님도 님 둔 님이니”이란 표현에서는 안정은 사라지고 불안한 관계 양상이 드러난다. ‘님’이 그냥 ‘님’이 아니라 ‘님 둔 님’이어서 생겨나는 삶의 아이러니가 재치 있게 그려져 있다.

  현대시조의 장에 이르면 ‘님’ 그리는 슬픈 노래가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주제에만 멈추어 있지 않는다. 그 주제는 삶과 운명의 본질을 묻는 심오한 것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이운 시인의 텍스트가 그 한 예이다. 시인은 강렬한 상징성을 텍스트에서 구현한다.

 

 

매미만 한 바퀴벌레 벌렁 나자빠져 죽어 있다

살아서는 올려다볼 꿈도 못 꾼 푸른 하늘

 

한 번도 눈 맞추지 못한 그런 연(緣)도 있는 거다.

 

ㅡ 백이운, 「반하거나 홀리거나: 연(緣)」

 

 

  백이운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텍스트는 시인을 주체의 자리에서 제외해둔 채 우선 정경의 묘사를 보여준다. 초장과 중장에서 시인은 무심히 눈에 든 장면을 스케치하듯 그려낼 뿐이다. 그런 다음, 시침 떼고 그 정경이 야기하는 정서를 감추었다가 종장에서 집약하여 보여준다. 종장을 살펴보자. “한 번도 눈 맞추지 못한 그런 연(緣)도 있는 거다”라는 종장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정경의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두 겹, 세 겹의 사연이 감추어져 있다. 초, 중, 종장의 세 줄짜리 문학 양식이 얼마나 보배로울 수 있는지 정확히 드러낸다.

  바퀴벌레는 살아서는 하늘을 등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생명이 다하게 되면 땅에 등을 댄 채 드러눕게 된다. “벌렁 나자빠져 죽어 있다”라는 구절은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이며 그래서 정확한 묘사이다. 그 구절은 그러므로 가장 비시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데 가장 시적인 표현이 거기에서 완성된다. 바퀴벌레의 죽음에 걸맞는 표현으로 “벌렁 나자빠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언어를 오랫동안 연마해온 시인만이 제대로 집어낼 수 있는 적확한 표현이다. 시조 삼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초장은 바퀴벌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에 바쳐진다. 중장에서는 그 죽음의 주체인 바퀴벌레의 한 생애가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다. 바퀴벌레의 대척점에 하늘의 존재가 놓여 있다. 그것도 “꿈도 못 꾼 푸른 하늘”인지라 바퀴벌레와의 현격한 거리를 강조할 만한 하늘이다. 가장 비루한 생명체, 그리고 그와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하늘이 암시하는 바는 중장에서는 아직 드러나서는 안된다. 종장에 이를 때까지 중장의 의미는 감추어지고 그 해석은 유보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시조의 시조다움을 이루는 각 삼 장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난다. 초장에서는 장면의 소개, 중장에서는 초장으로부터의 이행과 전환, 그리고 마침내 종장에 이르러서 시인이 발견한 바가 마지못해 그 본질을 현현해야만 시조 미학이 완성되는 것이다.

  종장에 이르러서 시인은 바퀴벌레의 죽은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연(緣)’의 의미를 확인한다. “벌렁 나자빠져” 가장 바퀴벌레다운 죽음을 맞은 바퀴벌레를 두 줄에 걸쳐 열심히 치밀하게 묘사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독자는 그제서야 자각하게 된다. 죽어서야 이루어지는 연을 노래하기 위해서 바퀴벌레를 시적 소재로 선택한 저 탁월한 감수성을 보라! 초,중장으로부터 종장으로의 전환이 너무나 급격하여 어지러울 정도이다. 급격한 유턴(U turn)에 준비 안 된 독자들은 차창 밖으로 튕겨나갈 수도 있겠다. 그 점을 강조하느라 시인은 초, 중장과 종장 사이에 휴지의 공간을 예비해둔다. 끊어 읽기와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 형식적 장치를 통해 드러낸다.

  삶과 죽음, 그리고 연(緣)! 가장 철학적인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소재, 바퀴벌레를 채택하는 혜안은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바퀴벌레와 인연 사이, 그 거리가 너무나 멀다. 그러나 한편으론 너무나 긴밀하게 둘이 엮일 수 있는 것임을 알겠다. 어긋난 인연도 한 편 시를 이룬다. 어쩌면 어긋난 인연 앞에서만 깊어진 삶과 시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절하거나 정갈한 것은 어긋난 것에서 싹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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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임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202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