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진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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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은유를 기다리며
은유에는 직유(simile)와 은유(metaphor)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conceit라는 이름의 은유가 있는데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발한 은유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어렵고 도전적이고 심지어 도발적인 은유를 일러 conceit라고 한다. “극도로 상호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그런 은유를 설명한다. 영시의 전통에서는 17세기의 형이상파 시인들이 기발한 은유를 구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시인이 존 던(John Donne)이고 대표작은 “별사: 애도 금지(Valediction: Forbidding Mourning)”라고 한다.
Our two souls therefore, which are one,
Though I must go, endure not yet
A breach, but an expansion,
Like gold to airy thinness beat.
If they be two, they are two so
As stiff twin compasses are two,
Thy soul the fixt foot, makes no show
To move, but doth, if th’other do.
And though in the center sit,
Yet when the other far doth roam,
It leans and hearkens after it,
And grows erect as that comes home.
Such wilt thou be to me who must,
Like th’other foot, obliquely run;
Thy firmness makes my circle just,
And makes me end where I begun.
*
그러므로 우리의 두 영혼은, 사실은 하나인데
내가 떠나야 할지라도 그건 이별이 아닌 연장이 될 것이다.
아주 얇게 펼친 금박처럼.
우리 영혼이 둘이라고 한다면
컴퍼스의 두 다리처럼 견고한 것일 텐데
그대 영혼은 고정된 컴퍼스 다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다른 다리가 움직이면 그를 따르지.
중심에 머물러 있다가도
다른 한 다리가 멀리 움직이면
몸을 기울여 그 뒤를 따르지.
다른 한 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다시 똑바로 서지.
나도 컴퍼스의 다리처럼 기울여 움직이니
그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오.
그대의 견고함으로 나는 똑바른 원을 그릴 수 있고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니.
ㅡ 졸역
우리 현대 시조단에서 박성민 시인을 기발한 은유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될듯하다. 시조단의 기라성 같은 많은 시인들이 모두 빼어난 은유를 보여주고 있으나 특히 박성민 시인이 conceit, 기발한 은유의 개념을 떠올릴 때 생각난다.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소재들 사이에서 그 속성의 공유항을 찾아 양자를 연결하고 있다. 박성민 시인의 「청사과 깎는 여자」를 보자.
그녀는 칼날로 북극 먼저 도려낸다
지구의 기울기인 23.5도로 사과를 눕혀
돌리며 깎아나간다
북반구가 하얘진다
푸른 지구 속살에서 흘러나온 과즙 향기
끊길 듯 이어지며 남극까지 깎이는
청사과 엷은 껍질에
매달린 빌딩들
사과를 기울여 한 바퀴 돌릴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에 낮과 밤이 지나가고
사랑의 기울기 끝에
빙하가 다 녹는다
ㅡ 박성민, 「청사과 깎는 여자」 전문(《정형시학》, 2020년 가을호)
사과와 지구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물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만유인력의 존재를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사과 깎는 일에서 지구의 자전을 찾아내는 일이란 신기하지 않은가? 지구가 한 개의 별이라면 사과는 한 알의 지구일 수도 있겠다. 사과를 기울여 돌려 깎기 하노라면 낮도 지나가고 밤도 지나가고 하루가 그렇게 다가왔다 물러나서 인생이 또 한 걸음 마지막 날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겠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산다. 지구는 평평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무르지 못하고 유랑하는 존재들, 떠돌이들은 낮과 밤이 지나가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하루 해가 넘어가면 그 밤을 어디서 지새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리라. 이국땅을 떠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의 고적한 마음을 생각하면 유치환의 시 「고향」이 생각난다. 일제 치하 만주 벌판을 유랑하는 이주민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 시에 담겨 있다. 저녁이면 산새들도 둥지를 찾아가는데, 유치환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노래했다.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하고. 저녁 산새의 마음으로 돌아갈 고향을 그려 노래하는 이, 해가 저무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는 이, 그들은 시인이다. 지구가 기울어진 채 돌고, 사과 깎는 일에서 지구의 자전을 찾는 마음을 지닌 이, 그는 시인이다. 기발한 은유의 시인이다. 컴퍼스 다리 두 개로 사랑의 구심력과 원심력을 노래한 존 던이 기발한 은유의 시인이라면 오늘날 사과를 깎으며 지구가 스스로 돌아가는 이치를 궁구하는 박성민 시인 또한 기발한 은유의 시인이리라. 지구가 도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는 소설가도 있다. 김숨 소설가는 『떠도는 땅』에서 지구의 한구석, 자리 잡고 머물 곳을 찾아다니는 이주민의 삶에 대해 글을 쓴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축출되어 이주 열차를 타고 떠나는 유민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통해서 지구가 자전하는 일과 떠도는 목숨과 정착하지 못하는 운명의 삶을 그린다.
“지구가 돌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지구 안에서 살고 있고요. 우리 모두 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돌고 있었어요. 걸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쉼 없이 돌고 있지요…”
“지구가 돌고 있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어요. 내 아들이 알려주더군요. 태양을 중심으로 1년에 한 바퀴를 돈다면서요.”
“겨우 한 바퀴요?”
“온갖 걸 품고 돌려니 힘이 드는가 보지요.” (김숨, 『떠도는 땅』, 239면)
문학은 늘 새롭게 꿈꾸고 낯선 발화의 방식으로 그 꿈을 드러내는 예술 장치이다. 그러므로 기발한 상상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장르일 것이다. 사과 한 알 깎는 일이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야 크게 새롭겠는가? 박인로의 「조홍시가」에서 홍시 한 알 부모께 드리고픈 마음으로 이미 나타난 적이 있었으니…. 사과 한 알과 지구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보는 시도는 낯설고도 새롭다. 사과도 지구도 둥글다. 가늘고 여린 둘 사이, 그 관계의 실 끄트머리를 찾아 묶인 상상력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장면이 눈부시다.
어쩌면 박인로 또한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조를 지은 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조홍시가」의 추가분 중에서 부모께 바치는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는 텍스트가 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을 막아 부모님이 연로해지는 것을 막아 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이 어이없는 상상력을 낳게 된다. 쇠로 만든 노를 꼬아 해를 붙잡아 매고자 한다.
만균(萬鈞)을 늘여 내여 길게길게 노를 꼬아
구만 리 장천(長天)에 가는 해를 잡아매어
북당에 학발쌍친(鶴髮雙親)을 더디 늙게 하리라
ㅡ 박인로, 「조홍시가」, 『진본 청구영언』*
해가 지면 또 날이 가고 세월이 가면 부모는 떠나리니, 해가 서산 너머 지지 못하게 붙들어 매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그 또한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구가 한 바퀴 도는 사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또 한 바퀴 도는 사이 새로운 역사가 태어나고 기록된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가고 상상력의 폭과 깊이도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토록 기발해 보였던 상상력도 어느날 문득 익숙해지고 진부해진다. conceit로 탄생하여 cliché가 되어 사라진다. conceit와 cliché 사이, 그것이 시적 상상력의 생애라 할 것이다. 문단의 말석에서 필자는 오늘도 conceit, 기발한 상상력을 기다린다.
* 임채성, 「칼과 붓으로 불멸의 시를 쓴 노계문학의 산실」, 『정형시학』 (2020년 겨울호) 212~3면에서 재인용.

박진임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2021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