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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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동억 

  2024년 2월 공시사 월평 


  

 

 

 

 

여덟 번째 걸음. 지혜롭게 불화하기

 

● 박동억

 

 

 

ㅡ 시적 공감은 공동체의 한계선을 새로 긋는 방식이다.

  

 일상적 의미의 공감과 시적 공감을 구분해야 한다. 이 사실을 몇 번이고 강조해도 좋다. 최초의 눈 맞춤으로부터, 부드러운 접촉으로, 그리고 때론 속삭이고 때론 생각을 나누며,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일상적 의미의 공감이 인도하는 방향이다. 따라서 공감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지속이라는 목적지로 우리를 향하게 만든다. 한편 시적 공감은 그러한 공감의 능력을 가없이 수많은 대상에 적용한다. 어떤 시인이 제시하는 사랑의 범주는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다. 따라서 공감하고자 하는 태도는 시인과 평범한 사람이 다를 바 없지만, 시인이 공감하고자 하는 대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읽는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시련처럼 주어진다. 시는 공감하지 못한 것,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감을 시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적 공감은 공동체의 한계선을 새로 긋는 방식이다. 어디까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가. 시인은 기존에는 공감의 대상이 아니었던 존재에게 시선을 향한다. 그 대상은 추악하거나 졸렬하다고 여겼던 욕망일 수도 있고, 사소하게 취급하던 타인이나 자연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로 무절제하기까지 한 시인의 공감 능력은 오랫동안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시인들은 지혜가 아니라 일종의 소질이나 영감으로 시를” 지으며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예언가나 신탁을 들려주는 사람들의 영감과 같다는 것” 때문에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1) 심지어 그는 시인을 올바른 정치 체제를 갖춘 나라에서 추방해야 할 계급으로 여겼다.

 이와는 달리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이 다른 사람이 지닌 비범한 능력을 지닌 천재 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시인이 남들보다 효과적으로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에서는 시인의 말 짓는 능력, 특히 ‘은유’가 지닌 탁월함이 설명된다. 은유의 원리는 익숙한 말과 낯선 말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익숙한 말이란 그가 살았던 도시국가 아테네의 말을 뜻하고 이색적인 말이란 외래어나 신의 목소리를 뜻했다. 시인은 새로운 지식이나 대상을 익숙한 말로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지식을 전파한다. 요컨대 시인은 공동체 바깥의 지혜를 공동체 내의 시민에게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여기서 두 철학자의 공통된 전제는 시인이 공동체의 변경에 있다는 생각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시인은 공동체 질서나 문화의 한계 지점에 있다. 시인은 공동체의 가장자리에서 낯선 바깥을 향해 자기 존재를 열어둔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그는 공동체 내부와 외부를 중개하기도 한다. 그렇게 공동체가 수용하는 문화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놓인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시인은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추방한 자, 즉 이방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우리가 지닌 이해와 공감의 지평을 넓히는 탐험자로 인식되기도 했다.

 

 

─ 시는 더 큰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불화하는 능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시인이 지닌 역할을 ‘공감의 영토를 넓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공감의 영토를 공고히 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오랫동안 시인은 불온한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불쾌한 것, 섬뜩한 것,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공감의 영토를 공고히 하는 것과 공감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나는 상품과 예술을 가로지르는 경계라고 생각한다. 상품은 유용하고 편안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공동체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익숙한 공동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시인은 공동체와 불화할 줄 알아야 했다. 예컨대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1956)는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 정권을 비판했고 결국 덴마크로 망명을 택했다. 괴벨스의 선동으로 브레히트의 책이 전국에서 불태워지는 분서(焚書)가 일어났을 때 브레히트는 오히려 자신의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하는 시를 썼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정치 영역만을 향하지 않는다. 젊은 고아 마리 파라가 자신이 낳은 신생아를 살해했을 때, 그는 그 근친 살해에 대해서도 옹호하며 시를 쓰기도 했다. “인간은 모두 같은 인간끼리 도와야 하니까요”(「마리 파라의 신생아 살인에 관하여」)라고 그가 인류애를 강조할 때 이는 근친 살해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벗어난다.2)

 이처럼 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입안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도덕을 벗어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는 더 큰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불화하는 능력이다. 그것을 독자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시는 우리에게 더 큰 시야를 제시한다. 간단히 말해 시는 더 많은 것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같은 민족, 그리고 애완동물을 사랑하기는 쉽다. 하지만 적(敵), 이방인과 다른 민족, 그리고 야생 동물을 공감의 영토로 이끌어오는 일은 쉽지 않다. 적어도 시는 그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불쾌하고 낯선 타자에게 공감해 보도록 제안한다.

 

 숙고해볼 것은 사람이 마주하는 최초의 타자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그리고 타자는 항상 우리 존재 곁이나 저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도 존재한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억누르고 싶은’ 죄를 직면하거나 반대로 ‘억눌러야만 하는’ 욕망을 발견한다. 하고 싶다는 목소리와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내면에서 상충한다. 공동체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전제는 구태여 학자의 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익숙한 사실이다.

 어느 정도로 솔직해질 것인가. 때로 시인은 자기 내면의 타자를 직면하기 위해 과감한 문법을 동원한다. 때론 폭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비속어와 직설을 활용하여 자기 욕망을 고백하는 것. 이러한 어조의 전형으로서 김행숙 시인이나 이소호 시인의 최근작을 다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시인들에게는 솔직성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을 억누르면서, 한편으로 자기 내부를 성찰하며 직시하는 것도 아닌, 도리어 자신조차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타자인 양 그저 응시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판단은 내면을 공간 이미지에 비유하는 안희연 시인의 시를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고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내가 머잖아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 안희연, 「당근밭 걷기」 전문(《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주제 의식이 뚜렷해 보이지 않는 이 작품을 의미화하기 위해서 유의할 것은 두 가지, 공간적 이항 구조와 시선이다. 작품을 따라 읽으며 자연스럽게 당근과 두더지, 밭과 지하라는 위상학적 차이를 떠올릴 수 있다. 시에 드러난 것은 당근밭의 의미이다. 그것은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으로 덮인 공간이고, “수확의 기쁨”을 타인과 나누는 공간이다. 따라서 기쁨과 나눔의 공간으로서 당근밭을 설명할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에 서술되지 않았지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더지의 눈”이라는 시어가 떠올리게 하는 지하이다. 또한 시인은 분명히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임을 명시하고 있다. 두더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은 시인이 진정 욕망하는 대상이 당근밭인지 스스로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한다는 시구처럼 시인은 자신이 바랐던 것이 정말 당근이었는지 묻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자신이 바랐던 것이 진정 기쁨과 나눔이었는지 되묻는 것과 같다. 실상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이제 무엇이 시작할 것인지 떠올려볼 수 있다. 수확이 끝나면 텅 빈 밭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달빛 아래 펼쳐지는 / 당근밭”을 홀로 돌보기도 할 것이다. 한 계절의 기쁨 이후에 이어질 적막한 시간, 결국 시인은 기쁨과 나눔만으로는 그 이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는 우리 존재 밑바닥에 흐르는 잔잔한 결핍이다. 표면적으로 기쁨과 수확을 말하면서도 어떠한 ‘휘청거림’ 혹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는 불안의 씨앗을 예감하는 것이 시적 정서이다. 암시된 것은 ‘현재’ 주어진 기쁨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안희연 시인의 시가 결핍을 확실하게 서술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이미 존재했던’ 결핍이 아니라 ‘앞으로의’ 결핍을 가리킨다. 기쁨 뒤에는 언제나 기쁨 이후의 적막이 이어진다는 것. 이 조바심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반대로 그러한 결핍을 직면하는 것도 수행하지 않는 이 수동적인 주체가 눈앞에 그려진다.

 

사람들은 숲 가까이 살길 원한다. 마치 사람들이 바닷가에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아침 바다로 고깃배들이 나갈 때 산책자들은 주택가를 벗어나 일렁거리는 숲으로 간다.

 

인간은 모두 흙이나 바다에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기원을 기억할 수 없다.

 

모래를 씻으려다 이안류에 휩싸인 노인은 바닷가에서 여든 해 넘게 살았던 이, 사람은 잘 안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죽곤 한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제를 올리는 해변 마을 너머 죽은 새끼 범고래의 주변을 떠도는 어미 범고래처럼 그 여자는 숲으로 간다.

 

어린 여자아이가 숲에서 울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에게 물었다, 왜 혼자 숲속을 헤매느냐고.

 

아이는 집에서 키우던 거북이를 숲속 연못에 놓아두었는데, 그 연못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자홍빛 해가 공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얘야, 그 연못은 메워졌단다. 구청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동산을 만들고 시비를 세웠거든, 네가 찾는 거북이는 더 넓고 아름다운 바다로 갔을 거야.

 

마음에 없는 말이 여자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마음에 없던 소리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아이와 여자는 목이 말랐다. 물을 사러 숲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여자는 아이에게 물었다.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여자가 아이만큼 어렸을 적에 그녀는 숲에 버려졌었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 없이 엄마 손에 자라던 소녀는 어느 날 숲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 오른쪽 눈을 실명한 이의 왼쪽 눈처럼. 누구나 숲에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엄마는 결혼해서 아이 몇을 낳았을까. 마음에 없어도 배가 고프지. 세상으로 밀려 나가야 할 때가 오지.

 

사람들은 숲 가까이에 살기를 원한다. 그곳에 가서 물결치는 새소리와 맑은 공기를 열고 잃어버린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망각의 은총을 피한 사람 중에는 살기 위해 숲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 김이듬, 「사랑의 역사」 전문(《문학의오늘》 2023년 겨울호)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에서 모티프를 빌린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상실의 우화처럼 느껴진다. 여든 살이 넘은 노인이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숲속에서 울고 있던 아이는 애완 거북이를 잃어버렸으며, 아이를 위로하는 여자는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다. 원작 소설에서도 폴란드 출신의 미국 이민자 레오 거스키와 아버지를 잃은 소녀 엘마 메러민스키 등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 시를설 『사랑의 역사』와 비교하며 읽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의 흔적일지도 모르는 이 시를 의도적으로 오독해 보고 싶어진다. 이를 원작으로부터 분리하여 오롯이 김이듬 시인의 사랑론으로도 읽어본다.

 다만 시를 음미하도록 하자. 시에 그려진 해변, 숲, 연못 등 이 작품에 그려지는 공간들은 상실이 응집한 거처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 놓이는 방식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헤매고’ ‘찾지 못하며’ ‘세상으로 밀려 나간다’. 시의 마지막 연처럼 ‘숲’에 가까이 살기를 바라면서 그곳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시인의 유비이다. 사람은 자신이 상실한 것에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도 결국 멀어진다. 근본적으로 여기 그려진 사람의 형상은 찾아 헤매는 자다. 찾아 헤매지만 끝내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자신이 잃은 대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이듬 시인이 그려낸 풍경의 의미는 모호하지 않다. 잃었기에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 어쩌면 시인은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구멍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랑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은 것을 다시 소망하는 과정이며, 그러한 과정이 누적하여 이루는 ‘사랑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편으로 원작 소설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은 일종의 자연재해인 동시에 은혜처럼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재난처럼 닥쳐오지만, 기적처럼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이 양면성을 김이듬 시인은 찾고 헤매는 원근 운동으로 그리는 듯하다.

 

빛이 허약해지는 겨울에는

바르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거기에는 늘 새가 있고

태양이 돌아누운 하늘은 새들의 것

 

혀와 입술이 읽어주는 몸의 연애처럼

기계가 읽어주는 쓸쓸한 소음처럼

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

 

책을 덮으면

투명한 몸으로

핏물처럼 번지는 문장

 

등 뒤척이는 밤을 열면

새들의 눈알이

가시처럼 빛난다

 

날 수 있을까?

 

몇개의 문장으로만

가볍게

 

무리를 이끄는 한마리 새가

북쪽으로 나를 재촉하는데

- 전수오, 「빛과 깃」 전문(《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상징은 언어의 가장자리이며, 가리킬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시인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익숙해진 상징은 다시금 관습적인 것, 낡은 것, 즉 데드 메타포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 시대에 이 사실을 모르는 시인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수오 시인의 시 「빛과 깃」은 상징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다시금 상징을 호명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이 시의 주제는 간명하다. 사람은 더 먼 곳을, 더 깊은 곳을, 더 숭고한 곳에 닿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늘’을 호명하고 ‘새’의 뒷모습에 인도 받으며 ‘날개’를 꿈꾼다.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더 높은 존재를 이룩하게 만드는 사람의 원천이다. 사람을 그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선량함인가 가없는 사랑인가 악착같음인가. 무엇을 연료로 삼아서 우리는 오늘 하루 발을 내딛을 수 있을까. 전수오 시인의 시는 ‘날개’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그 날개를 움직이는 자기만의 동력에 대해서는 고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에게 내밀한 언어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시는 익숙하고, 그 익숙함은 그저 막연하게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에 대한 전설처럼 들려온다. 명확한 것은 저 하늘을 “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 결국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핏물처럼 번지는 문장” 이라는 사실이다.

 

                                      

1) 천정환 역,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제2판), 숲, 2017, 31~32쪽.

2) 베르톨트 브레히트, 공진호 역, 시선집 『마리 A의 기억』, 아티초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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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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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