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임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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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매년 연말이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2001년부터 시작된 ‘올해의 사자성어’는 전국 대학교수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선정하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의 사자성어가 선정되곤 했다. 한 해가 시작될 때의 희망찬 마음과는 달리 뒤돌아본 한 해는 아마도 아쉬움과 회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리라. 올해도 마찬가지다. 2023년 12월 10일 발표된 올해의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 견리사의(見利思義)를 패러디한 이 말은 ‘이로움을 접하면 의로움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친구나 동료는 물론 가족까지 버리는 비정한 사회의 초상화인 셈이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기업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익을 좇기에 바빠 의로움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참고로, 지난 2022년 연말에 발표된 사자성어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과이불개(過而不改)’였다.
‘견리망의’와 더불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사자성어가 있다. 바로 일도 많고 탈도 많다는 뜻의 ‘다사다난(多事多難)’이다. 연말만 되면 여기저기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관용어 중의 관용어다. 그 말 속에는 국내 정세, 국제 정세는 물론이고 개인사에 있어서도 순탄하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처지와 환경에 따라서 천편일률이 아닌 천차만별의 감회를 가지게 마련이다. 한 해 동안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보람과 성취감보다는 회한이나 아쉬움이 더 많다.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이루지 못한 일이나 가지 못한 길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12월 31일의 태양과 1월 1일의 태양이 다를 리 없다. 연말과 연시는 실체 없는 환영이자 근거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 매일같이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그날이 그날 같은 삶이지만 인간이 편의상 설정해 놓은 시간의 시작과 끝을 따지는 건, 나이 들어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저항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누구나의 하루하루 속에는 다양한 그림의 인간사가 펼쳐진다. 누군들 버겁지 않은 삶이 있을까마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견뎌온 날들이 많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새해 아침에 느꼈던 기대와 설렘은 퇴색해버리고 벌써 한 해가 갔다는 세월의 아쉬움은 절망이 희망을 덮는 우울한 세밑 풍경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Life란 말에 if가 들어 있는 것처럼, 인생이란 원래 온갖 변수들의 총합이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가슴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생긴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불쑥 끼어듦으로 인해 삶은 언제나 왜곡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탐진치(貪嗔痴)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탐진치’의 ‘탐’은 욕심내는 마음이고, ‘진’은 화내는 마음, ‘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들 세 가지 마음은 독이 되니 ‘삼독심’이 없어진 상태가 곧 열반이라는 뜻이다. 이는 정신건강의학에서 말하는 스트레스 관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마인드 컨트롤 능력을 가졌다면 그게 부처이지 어디 사람이겠는가. 오욕칠정을 가진 보통의 인간이라면 결심하고 계획하고 후회하는 삶의 구렁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셩저셩 다 지내고 흐롱하롱 인 일 없네
공명도 어근버근 세사(世事)도 싱슝샹슝
매일에 한 잔 두 잔 하여 이렁져렁 하리라
『청구영언』(진본)에 실려 전하는 이 시조는 이러한 인간사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 해를 보내는 세밑의 어느 한 점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는 모습은 확연히 달라졌지만 인간의 본성 자체는 그때와 비교해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뜻이다. 원본의 고어 표기를 현대어 표기로만 바꾸었을 뿐 낱말이나 표현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몇 가지 낱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초장 첫 구에 보이는 “이셩저셩”은 ‘이렁저렁’이나 ‘이럭저럭’의 옛말로 ‘딱히 정한 방법이 없이 이렇게 저렇게 되는 대로’라는 의미이다. “흐롱하롱”은 요즘 말로는 ‘하롱하롱’이다. 말이나 하는 짓이 침착하지 못하고 자꾸 실없이 가볍고 들뜨게 하는 모양을 일컫는다. “인 일”은 ‘이룬 일’이라는 뜻이다. 중장의 “어근버근”은 ‘가구나 짜임새 따위가 꼭 맞지 않고 조금씩 벌어져 있는 모양’을 뜻한다. “싱슝샹슝”은 ‘싱숭생숭’, 즉 마음이 들떠서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뜻풀이를 토대로 이 시조를 현대적 표현으로 바꿔 보면, “이럭저럭 다 지내고 하롱하롱 이룬 일 없네 / 공명도 어근버근 세상일도 싱숭생숭 / 매일에 한 잔 두 잔 하여 이렁저렁 하리라”가 된다. 이럭저럭 지내왔지만 이룬 일은 없고, 이름을 날리지도 못해 세상일까지 싱숭생숭한데, 매일 술이나 마시며 그럭저럭 지내보자는 정도의 뜻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자랑할 만한 성과는 없는 사람들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핑계로 ‘망년회(忘年會)’ 술자리를 갖는 요즘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지은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필부필부(匹夫匹婦)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은근히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힘들게 아등바등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는 작자의 태도는 장자(莊子)의 ‘좌망(坐忘)’을 떠올리게 한다. ‘좌망’은 ‘앉아서 잊어버린다’는 뜻이니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는 판단의식을 중단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으로 기울어지거나 ‘체념과 달관’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좌절과 절망은 현실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우울과 비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체념과 달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 자유와 해방감을 누리게 해준다. 장자에 의하면, 사람은 완전한 망각 상태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좌망을 통해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누군가에 대한 원망,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이 시조의 작자 또한 지나간 것에 대해 무심함으로써 마음의 자유와 평온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조는 특히 ‘이셩저셩’, ‘흐롱하롱’, ‘어근버근’, ‘싱슝샹슝’, ‘한 잔 두 잔’, ‘이렁져렁’ 등 모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준첩어들이 중첩되면서 독특한 음악성까지 획득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시조 자체가 정형률에 내재된 가락에 의해 음악성을 선천적으로 확보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각각의 준첩어 시어들이 가지는 리듬이 더해지면서 그 맛이 더욱 증폭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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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송희, 「하버드 양념치킨」
몇 년 전 종편방송의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 상위 0.1%에 해당하는 최고 상류층을 배경으로 대학 입시 등 교육 문제를 다루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녀를 한국 최고의 대학에 진학시키려는 상류층 집안의 부모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와 직업의 대물림을 위해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온갖 행태를 보여주며 소위 스카이(SKY)에 들어가야 성공이 가능하다는 우리 사회의 학벌의식을 날카롭게 풍자했다는 평을 받았다.
드라마와 같은 현실은 비단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학업 성취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이다. 청소년들에게 대학 졸업장은 개인의 능력과 신분을 대변하는 일종의 보증서로 인식된다. 대학 졸업장이 곧 한국 사회에서 계급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꼬리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대다수의 부모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식을 세칭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희생하며. 자식의 대학교 입학이 성공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특정대학, 특정학과에 대한 성공의 믿음은 굳건하다.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대기업에 취업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거나 신분 상승을 위한 필수 경로로 여겨지는 한국에서는 대학 입학을 위한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일명 수능)이 매우 중요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 12월 7일에는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채점 결과가 발표되었다. 킬러문항 배제 방침으로 ‘물수능’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자 이를 의식한 교육 당국이 변별력 확보를 위해 고난도 문제를 늘리면서 수험생의 체감 난도가 크게 올라간 ‘불수능’으로 귀결되면서 상위권과 중위권 수험생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많은 학부모는 다양한 입시설명회와 입시컨설팅을 찾아다니고, 학원과 과외 등 사교육에 허리가 휠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송희 시인의 「하버드 양념치킨」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과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시조의 화자는 사교육 업체의 대표자 혹은 홍보 담당자다. 그는 업계에서 “최고의 주방장들”이 “스카이를 꿈꾸시는 분들의 심정을 / 익히고 잘 버무려서 주문 제작 해드리”겠다고 홍보한다. 여기서 ‘닭’은 “날개를 파닥이다 주저앉은” 존재로서 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학생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주문 제작’은 각각의 대입 전형에 맞추어진 ‘맞춤형 입시전략’이겠다. 학생들의 적성과 개성보다는 특정 학교, 특정 학과를 위해 짜 맞춘 입시 행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풍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하늘을 날았”던 닭의 날개를 퇴화시킨 것은 누구일까? 학벌주의에 따른 입시 위주 교육 정책과 시험 기계만을 양산하는 수능 제도가 날지 못하는 닭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아닐까. “최고의 명문에서 양념옷을 입”어야만 취업이나 결혼 시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하버드’와 ‘양념치킨’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통해 위트 있게 표현함으로써 풍자 효과 또한 극대화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행복은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산물이다”라고 했듯이 우리 사회 전체가 결과보다는 과정에, 성과보다는 노력 그 자체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모두의 꿈이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후회가 덜한 입학 시즌이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 시간
사랑은 애증을 낳고
애증은 죄악을 낳는
의문의 부호 던지며
송이눈이 날고 있다
깨어 있어라, 누구든 눈 뜨고 깨어 있어라
우주의 자궁 속에
지상의 빛 빠질 때
눈발에
젖어서 오는
주기도문은 슬프다
돌아보면 속죄의 빈 껍질의 몸뚱어리
신의 족쇄를 채워
고통을 맛보게 하라
한 생을
목발질하며
살아온 죄 단죄하라
내 안 믿음의 뜰 눈은 더욱 쌓여가고
마침내 돌아와 눕는
뉘우침의 밤, 밤, 밤
겨울도
촛불 켜들고
부활의 눈을 뜬다
- 오종문, 「겨울밤의 성서」
연말이 되면 거리는 성탄절을 알리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상업성이 도사리고 있다.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기보다는 산타클로스로 대변되는 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정신과 영혼이 아닌 물질적인 측면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기업과 상인들이 마케팅과 홍보로 연계시킴으로써 성탄절을 전후한 연말은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흥청망청의 축제 분위기로 기울어진다. 잠깐이나마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면, 지나간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마무리된다는 것을 참회를 통해 깨닫는 의례를 생략하게 됨으로써 다음 해 연말에도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오종문 시인은 이러한 연말 분위기를 강한 어조로 질타하며 경건한 참회의 분위기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독자를 참회와 회개로 이끌기 위해 시인은 ‘눈’이라는 이미지에 천착하고 있다. 여기서 눈은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로 쓰이고 있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서 떨어지는 얼음결정체인 눈[雪]과 물체와 형상을 볼 수 있는 인체 감각기관인 눈[眼]이 그것이다.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인간의 생은 찰나에 불과하다.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은 애증을 낳고 / 애증은 죄악을 낳는” 세속 공간에 하늘의 축복 같은 “송이눈이 날고 있다.” 그 눈을 보려면 “눈 뜨고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주의 자궁 속에 / 지상의 빛 빠지”는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회나 회개가 필요하다. “더욱 쌓여가는” 눈처럼 믿음이 굳건해질수록 부활의 새봄도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회개하라!’는 성스런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경전이다. 성서는 예수의 생을 세상에서 가장 비루하고 연약한 자의 탄생으로, 그의 죽음은 무력하고 실패한 자의 삶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력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새로운 세상은 그저 기다리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한복판에서 오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실패를 딛고 하나님이 함께함을 믿는 자리에 임한다고 말한다. 그 신앙을 위해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생각과 자세를 가다듬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 그것이 회개이다. 따라서 회개는 단순히 후회와 뉘우침이 아니라 속죄를 위한 거룩한 자기정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회개가 필요한 이유이다. 검은 토끼해의 끝자락에서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 희망을 다시 설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채성 l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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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