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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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ㅡ 거룩한 한 끼
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이다. 여기저기 다른 지역에서는 눈 소식이 들려왔지만 섬엔 올 듯 말 듯 감질나다 말짱해지곤 했다. 싸락눈과 우박만이 잠시 다녀갔을 뿐. 이런 날씨엔 칼국수 생각이 난다. 마침 집 가까운 곳에 칼국숫집이 있기도 했고. 집에 혼자 있기도 하고 집밥도 물리고 해서 칼국수나 먹으러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만 했지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뭉그적댔다. 가까운 거리여도 5분 정도는 걸어야 하고, 세수도 해야 하고 옷까지 갈아입으려니 갑자기 귀찮아졌다. 또 그 넓은 식당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점점 더 내키지 않은 쪽으로 흘렀다. 물론 나는 혼자 밥 먹는 일에 남 눈치를 보거나 부끄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공부할 때 도서관 다니면서도 혼자 먹었고, 학교에서도 수업 끝나고 종종 혼자 학교식당을 이용한다. 내 주변엔 아직도 절대로 혼자 식당에 못 간다는 사람들이 있다. 쭈뼛거리는 마음이 싫은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무슨 맛으로 먹냐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먹어야 할 때는 아예 굶거나 집에 가서 먹는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밥 한 끼 먹는데 남 눈치까지 봐야 하냐고 핀잔을 주지만 나도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혼자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을 때 당연히 쭈뼛거렸고 시킬까 말까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둘러보면 혼자 먹는 이들이 꽤 있다.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식에 집중한다. ‘그래 까짓것 내가 굶는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혼자 먹는 것도 꽤 근사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모락거리는 온도의 뜨끈한 칼국수를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갈까 말까로 쉴 새 없이 시간을 괴롭히다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대충 고양이 세수를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쭐래쭐래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시린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얼굴로 냅다 달려든다. 지금쯤이면 익숙해질 만한데도 매몰찬 섬 바람이 가끔 몸서리치듯 싫어질 때가 있다. 적응이라는 말은 어쩌면 적응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위한 억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럽지 못하니 우린 결국 그에 맞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문명 이래 필요에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언어를 도구처럼 사용하고. 기본적인 욕망조차 언어로 규정하고 그 틀에 인간을 끼워 맞추는 건 아닌가. 나라는 인간 역시 그런 언어의 도구인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칼국숫집에 도착했다. 점심때를 넘겨서 그런지 앉을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간엔 혼자 먹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고 김 나는 면발을 후루룩거리며 먹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혼자 음식을 먹는다는 건 오로지 먹는다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이토록 거룩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칼국숫집 하면 한 여자가 떠오른다. 물론 나와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날은 남편과 칼국숫 집에 갔던 날이다. 그때도 겨울이었고 지금보다 더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칼국수와 찐만두 하나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땡그랑 종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옷차림이 예사스럽지 않았다. 겨울과 여름을 한몸에 두르고 있었다. 위에는 겨울 외투를 걸쳤지만 맨살이 드러난 종아리에 여름 샌들을 신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무슨 말인가를 혼자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익숙한 듯 식당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면서 커피를 들고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그러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거의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이니? 방에서 안 나오면” 그러더니 또 애타게 “하느님”을 찾으면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여자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어쩌다 혼자라는 중얼거림에 갇히게 된 걸까. 범상치 않은 중얼거림과 흐느낌과 호통이 뒤섞인 그녀의 일상. 벗어날 수 없는 생각과 언어들. 그녀에게 바깥은 없었다. 그녀를 바깥으로 꺼내 줄 사람이 없었거나 꺼내 줄 힘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언어에 갇혀버린 사람. 언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본다. 얼마나 진저리나는 삶이었기에 그토록 집요하게 갇혀버린 걸까.
‘미쳤다’라는 말의 두 얼굴을 본다. 어떤 하나에 몰두할 때 우리는 미쳤다고 한다. 미쳤다는 말의 주어와 대상은 다르겠지만 나를 그 안에 가뒀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깥이 없는 삶.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린 삶.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말과 비슷하겠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하나에 집착하는 방식. 긍정적인 결과를 위해 달릴 때의 모습이다. 목표를 이뤘을 때 집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그 안에 매몰된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은 폐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자신이 만든 벽에 갇혀버리는 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은 너머. 부정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도 벽은 재빠르게 등장한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떠돌이 별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곳. 어디로 가야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바깥으로 나와도 햇볕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의 그늘이다. 카오스에 휘말린 채 휘적휘적 걸어갈 때마다 블랙홀로 자꾸만 빨아들인다. 살고 싶다고 외쳐도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손가락질하거나 힐끔거리며 구경할 뿐. 어쩌면 그녀는 칼국수보다 자신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만나러 여기 왔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자신을 햇볕 쪽으로 끌어내어 앉혀 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거리를 쏘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때 먹은 칼국수가 그 여자 눈빛에 걸린 채 내내 넘어가지 않았다.
칼국수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집이 하나 더 있다. 몇 년 전 친한 동생과 서울 여행을 갔을 때다. 마침 첫눈이 내렸고 길상사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먼저 먹으려고 성북동에 들렀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왠지 오래돼 보이는 칼국숫집이 눈에 띄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할머니는 칼국수를 뽑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테이블로 음식을 나르고 계셨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다행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칼국수에 파전을 시켰었지 아마. 배고픔이 밀려올 때쯤 칼국수가 나왔다. 그런데 어디서도 보지 못한 양념장이 딸려 나왔다. 어떤 맛일까 하고 칼국수에 양념장을 얹어 먹어보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와~ 대체 이건 무슨 맛이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우리 둘은 먹을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겨울이, 그 여행이, 그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칼국수를 먹는 내내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웬만큼 맛을 보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데 이 양념장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계산을 치르고 나오면서 양념장 비법을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않았다. 만약 알려준다고 해도 집에 와서 먹었을 땐 그 맛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남겨둬도 괜찮을 맛 하나쯤은 추억으로 간직해도 좋으니까. 어떤 맛은 그 장소를 벗어나면 다른 맛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 그 맛은 기억에서도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여러 생각이 스치는 가운데 칼국수가 나왔다. 칼국수 종류는 많았지만 식당 간판 이름을 딴 기본으로 시킨다. 다시마를 우려낸 국물에 감자와 호박을 썰어 넣은 슴슴한 칼국수다. 누군가에겐 거룩한 한 끼일 수도 있는 칼국수 한 그릇. 이 겨울이, 우리가 사는 삶이, 그렇게 칼국수 한 그릇처럼 담백하고 뜨끈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서귀포문학작품상〉〈서귀포칠십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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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