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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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선 

 

 

 

운동장

ㅡ 기억보존질량법칙의 순간

 

 

        

 

 가을의 입구부터 일몰을 재기 시작했다. 9월 9일의 일몰은 6시 50분이었다. 9월 8일은 51분, 그 전날은 52분이었다. 그러니까 1분씩 빨라지고 있었다. 처음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19일의 일몰은 오후 5시 56분, 거의 한 시간이 앞당겨졌다. 밤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일몰 시간대에 하늘은 온통 자신에게 집중한다. 하늘이라는 공간에 떠 있는 모든 부유물의 이마를 짚어 오늘이라는 시간을 지운다. 우리가 하루라고 부르는 매일은 그렇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일몰을 재기 시작한 건 순전히 걷기 위해서다. 해가 질 때쯤엔 맨얼굴로 걸을 수 있다.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도 되고 따가운 시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둠에 스며들면 그만이다.

 어쨌거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 이후에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개방하지 않는 학교가 더 많다고 했다. 아마 여러 가지 불운의 일들이 일어났으리라 짐작만 한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다가오면 동네 주민들은 하나둘 운동장으로 들어선다. 각자의 복장과 각자의 운동 포즈를 취한다. 대부분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지만 퇴근길에 들른 차림새로 걷는 사람들도 있다. 가고 오는 길에 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은 큰 위로가 된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온 젊은 부부, 축구공을 들고 아이와 축구하러 나온 아빠, 줄넘기를 들고 온 학생, 달리기를 하는 사람, 여러 가지 운동방법을 섞어서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하는 청년, 농구하는 중고등 학생들 등등 다양한 포즈들로 이곳이 채워진다. 노을은 그런 순간들을 골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서서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물론 금방 얼굴색을 바꾸지는 않는다. 서서히 어둠의 표정으로 허공을 채우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순간을 우리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기에는 무리였을까. 어쩌면 그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눈빛과 감각에도 인간 이외의 다른 속성이 숨어 있었으리라.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시간. 아무도 오지 않아서 아무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몸에 닿는 바람과 공기의 접촉만이 유일하게 나를 존재라고 인식한다. 그럴 때 무아지경에 다다른다. 내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조차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넓디넓은 우주라는 공간.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사람도 죽어서 어둠을 스몄다는 사람도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다. 삶과 죽음에 거리가 없어진다. 내가 태어난 공간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한 줌 흙이 되든 먼지가 되든 나는 가벼워질 것이다. 육체는 영혼을 동반하면서 무거워졌고, 정신은 내내 육체를 지배한다. 따로 똑같이. 땅에 발이 닿았는데 닿지 않은 느낌은 무엇일까. 몸이 가벼워진 걸까. 우리를 짓누르던 영혼은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 소멸하는 것일까. 이럴 때 정신이 얼마나 육체를 지배하는지 알게 된다. 육체를 둘러싼 장기들과 지방, 살들이 아닌 그 너머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 육체는 스스로 힘을 뺀다. 이 얼마나 신기한 현상인가. 내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끼는 순간의 희열. 날개 없이 지상 위를 걸어 다니는 기분.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마음을 먹었다고 뇌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니까. 뇌가 힘을 뺄 때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가끔 걷는 이 초등학교는 두 아이가 다닌 곳이기도 하다. 올해 봄부터 일주일에 한 사흘쯤 운동장을 걸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끌어당겼는지 모르겠다. 아마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인간관계에서 오는 허탈함이 이유였을 테다. 그럴 땐 주로 가까운 오름길이나 숲길을 걷는데 갑자기 이 운동장이 나에게로 걸어왔다. 걷다가 가끔 바닥에 떨어진 기억을 주워들 때가 있다. 아이들 운동회 하던 기억, 아이 일로 교실을 방문했던 기억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거의 20년 전 학교 운동장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잔디도 깔려 있지 않았고 모래와 흙이 섞여 있어 바람이 불면 흙먼지로 얼굴을 따갑게 했던 질 나쁜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운동장을 사랑했다. 첫째 큰 아이는 내가 눈 뜨는 시간보다 재빠르게 학교로 달아났다. 수업 전에 축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학교가 코앞이라 언제든 운동장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을 것이다. 내가 이 동네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육 년이라는 시간은 꽤 길다. 내게도 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가장 강하게 오래 자리 잡았기에 아이들에게도 그 시간을 물려주고 싶었다. 물론 좋은 기억이 더 많았을 때의 일이기도 하지만. 추억을 가진 공간을 물려주는 것만큼 큰 유산도 없을 것이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일수록 숨 가쁘게 뛰다가 천천히 뒤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공간과 여유가 필요할 테니까.

 운동장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공간이라 칭할 수도 있고 추억의 사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공간은 기억으로 밀집된 하나의 사물이다. 단지 꽃이나 책상, 의자가 가지고 있는 물성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발화한다.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수많은 감정과 이미지들은 발 닿음과 닿지 않음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원 안에 집합과 교집합을 형성한다. 그렇게 밀집된 공간은 또 하나의 거대한 의미망을 갖는다. 산산이 흩어졌던 기억들을 모아 새로운 감정을 토해낸다. 그럴 때 운동장은 거대한 사물로 우뚝 서서 지나온 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다. 가끔 왜곡된 시간과 기억들을 한데 조립해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내내 우리고 우려 곰삭은 맛으로 요리한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외롭지만 행복하게 서로 다른 감각을 뒤섞어 알 수 없는 최고의 맛으로. 영영 잊을 수 없는 과거의 맛으로.

 하지만 그런 감정을 와장창 깨뜨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운동장을 사용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무시하는 경우다. 학교 운동장에는 금지에 관한 규칙이 현수막에 걸려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애완동물을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런 규칙에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운동장에 자전거를 타면 안 되냐, 어디서 자전거를 타란 말이냐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목줄도 없이 개를 풀어놓고 우리 개는 작고 물지도 않는다는 둥 잔디밭을 뛰어다니게 놔두는 사람도 있다. 운동장은 하나의 공공장소이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 그런 못난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공간의 기억은 이렇게 잘못된 행동이 끼어드는 순간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공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 어울리는 행동과 자세가 필요하다. 공간은 교집합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기억보존질량법칙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십일월이다. 십일월의 일몰은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에 있다. 어둠이 길어진다는 건 활동량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기억보존 질량법칙을 위한 최적의 시간이다. 자신의 세계에 몰입할수록 나만의 공간도 넓어진다. 그 안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안목과 여유가 생겨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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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서귀포문학작품상〉〈서귀포칠십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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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