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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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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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손택수 시 / 한보리 곡

 

   

 

 

   

시, 풍경에서 노래로

  

 

 

 

  도피안사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의 장삼자락에서 흘러내린 주름이 풀어져. 풀어져 한 자락 두 자락 하늘을 떠메고 가는 새들. 녹슨 쇠문 여는 소리가 나네 철심 박아 넣은 몸으로 서 있는 노동당사 경첩 부딪는 소리도 들려오네 인간의 일은 잊고 오직 그리움 하나로 풀어져. 풀어져 쇠를 먹은 풀씨라도 품어보았으면.

 

  철원이라

  쇠기러기 떼 날 때

ㅡ 손택수, 「철원」

 

 

*

 

 

  문을 열고 들어가 조금 나아가면 문이 하나 더 나오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문이 나와서 아까와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그러니까 풍경을 복사해 붙여넣기를 하고, 조금 바꾼 듯한 풍경 속을 걸어가고, 풍경 속으로 소리들은 진화하듯 이야기를 풀어내고. 같은 공간 안에 평행으로 흐르는 다른 시간들이 마치 시냇물처럼 흘러간다. 그 시간의 색채 또한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단어들이 서로 스크럼을 짜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시간도 소리도 이야기도 다 멈추고 풍경 하나로만 남은 시를 만난다.

 

  시에 곡을 쓰는 과정을 얘기하자면, 먼저 시를 읽는다. 시 하나를 읽는 것이 아니고 시집 전체를. 처음엔 그냥 읽는다, 생각을 비우고. 시집 출간 순서대로 읽는 것은 중요하다. 두 벌째 읽는다. 깊이 정독한다. 몇 주 시집을 밀쳐두고 잊는다. 궁금해질 때까지. 시집을 다시 읽는다. 처음엔 잘 들어오지 않던 시들도 마음 안에 들어온다. 다시 시집과 시인을 잊는다. ‘잊는다’기 보다는 ‘버린다’가 맞겠다. 그리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시집을 꺼내 읽는다. 시인의 시세계가 안개 속으로 난 길처럼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인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시와 노래가 되어야 할 시들을 종이에 필사한다. 그리고 다시 밀쳐둔다. 때가 되면 가을볕에 나락이 말라가는 냄새같이 혹은 잘 마른 풀덤불을 태울 때 나는 연기 내음 같은 것이 내 몸을 감싸듯, 아니다. 내 마음에서 그 내음이 스며 나오는 때가 있다. 노래다. 그것은 내 목소리도 내 노래도 아니다. 시인의 색깔이며 냄새고 호흡이고 체온이고 속도이며 가락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적는다.

  인간의 능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하다. 내가 시를 잃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내 속에서 시는 제 할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 정신·정서적 화학 반응은 시와 떨어져 있을 때 일어난다. 나 모르게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읽었던 시들이 내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무장무장 자리를 넓히고 자라고 숙성되어서 노래가 된다. 내 모르는 내 속 깊은 못에서 자라던 잉어 한 마리가 불쑥 뛰쳐나와 푸른 숲으로 혹은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설원으로 봄날의 시내 위로 여름날 미루나무 우듬지를 넘어 날아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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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리  l

시인, 작곡가, 가수. 시집 『꽃 한 송이 주지 못했네』가 있음. 자작곡 음반 〈아내는 우동을 좋아해〉 〈소를 찾아서〉, 나팔꽃 동인 음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참여 음반 〈집 나온 시,길 떠나는 노래〉 〈산〉 〈백창우-시를 노래하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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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