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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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현형 

 

 

 

 

‘고독’이라는 이름의 스승

 

 

        

 

 

  “예술가는 예술가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이 문장에 왜 그렇게 홀려 마음에 간직했을까. 바늘로 손가락을 따면 검붉은 장미가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던 때, 맨밥에도 자주 체하던 때, 부적으로 삼고 싶은 문장이었다. 아직 생각한 적 없는 생각을 생각하는 얼굴로 고독은 멀리 말갛게 서 있다. 단테가 어떤 의도로 썼든 떨리는 손을 가진 불완전한 얼굴, 고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별의 파편을 함부로 버리지 않을 사람이 혹 시인이라면 분명히 떨리는 손을 가진 고독한 종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에 누구나 사로잡힌 채 살다 간다. 사로잡혀본 경험을 했다면 고독을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의 영정 속 눈빛은 너무나 살아있어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스물세 살 때처럼 엄격한 말로 일격을 가하기 직전의 순간인 듯도 했다. “시인은 고독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첫 시집 해설을 그는 분명 따뜻한 심장으로 써주셨으나 나의 남루를, 슬픔의 민낯을 해설로 가감 없이 드러내 부끄러웠다. 숨고 싶었다. 스승의 해설 속 문장인 “주문진 바닷가에서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녀”로부터 멀리 못간 채 부엌이 없는 자취방에서 들깨 차를 저녁 대신 먹고 자던 날들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스승은 엄격했다. 연구조교였던 내가 학부생들 과제를 가지고 교수 연구실로 올라가면 지금도 기억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야단을 치셨다. 버스가 사람을 기다려주는 강릉의 속도에 익숙해 있던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자주 울었다. 모든 오른편에, 왼편에 바다가 있다는 환각 속에서 느릿느릿 등교하는 나무늘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사를 주체적으로 비판적으로 읽고 왼편에 요약 후 오른편에 개별 의견을 달아 보라는 과제를 내주셨을 때도, 걸음의 방향에 따라 오른편 혹은 왼편에 있는 바다나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가 빈약하니 무거운 마음으로 교수 연구실의 차가운 돌계단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연구자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도 박사 과정을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석사 졸업 뒤 바로 시험을 봤으나 연구자로서 모자라는 그릇을 정확히 가늠하신 스승께서는 세 번이나 시험에서 떨어뜨리셨다. 시인도 연구자도 되지 못한 채 학교 주변을 맴돌던 어느 날 버스정류장에서 스승을 만났다. 분명히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시면서 “그래, 어떻게 지내느냐” 물어보실 게 뻔해 화장품 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도피해버렸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못 보셨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의 짧은 감행이었다.

  미국 3류 소설가의 연애 소설을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있다고 답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단 몇 초의 깊은 망설임 끝에 안 되겠다 싶어 다시 골목을 빠져나갔더니 학교 앞 전통 찻집으로 데려가서 내가 예상했던 “그래, 어떻게 지내니”를 가장 다정한 어조로 물어오셨다. 다정하게 대할수록 불안하고 어려웠다. 훗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졸업 후 이 녀석이 나랑 마주쳤는데 골목으로 도망갔다고” 잊어버리실 때까지 계속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리하여 십 년 이상이 걸려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연구자보다 그나마 시인이 나음을 증명하는 데 시간을 다 바쳤으니 참 어이없고 고독한 일이다.

  백수의 나날 중, 선생님이 발행하셨던 문학 잡지사로 나와 일을 도우라고 하신 적 있다. 나갔더니 직원을 통해 출근 일지를 준비해두셨다. 편집부 직원이 아닌데 출퇴근 일지를 쓰라니, 나는 반감을 갖고 바로 나와버렸다. 그리고 무서워서 반년간 찾아뵙지 못하고 문학 행사가 있는 날 찾아가서 쭈뼛거리다가 인사를 드리려 맥주잔을 건넸더니 빈 컵을 테이블에 엎어놓으시며 “네가 그러고도 제자냐”고 야단을 치셨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스승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후 구의동 다세대 주택 신혼집에 천상병 친필시가 표구된 액자를 들고 찾아와 주셨다.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연구실에서 가장 늦게 박사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으며 선생님 슬하를 떠나지 않았으나 선생님 말씀을 청개구리처럼 잘도 따랐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멀리 원을 그리며 자꾸 달아났고 선생님을 찾아뵙는 일에 게을리했다.

 

고독은 고독을 만나지 못한다

 

  고독은 고독을 만나지 못한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비 오는 저녁 전화를 걸어와서 안부를 물으신 적 있다. “잘 지내고 있느냐” 같은 날 저녁 두 번째 전화를 걸어오셨다. “잘 지내고 있느냐” “방금 통화했는데요.” “아 그랬니?” 그날 저녁의 세 번째 선생님 전화는 받지 않았다. 무언가 불안하고 착잡했다. 선생님이 다른 세계로 옮겨 가신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살펴드리지 못했다. “잘하고 있는데, 조금 더 열심히 써라. 스스로 강철 풀잎이 되어야 한다.” 스승께선 분명히 나를 시인으로 대해주셨다. 연구자가 아닌 시인으로 대해주신 걸 알고 있다. 스승께선 내 고독을 이해하셨지만 나는 스승의 고독을 이해해드리지 못했다.

 

  빙하기의 한 조각 고독처럼 차가운 낮달이 높은 가을 하늘에 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백의 모티브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스승의 모티브로 또 하나의 고독을 읽는다. 45년 동안 연기를 한 이탈리아 배우 지오바니 몬지아노는 예순일곱이 된 어느날 롬바르디아의 한 극장으로부터 공연 당일, 표가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충격으로 인해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공연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공연 시간에 무대에 올라가 객석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기 시작한 그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겠다. 처음엔 머뭇거리고 떨리던 그의 눈빛, 목소리가 차츰 평온해지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1시간 20분간 혼신을 다한 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까지 노배우의 마음은 다 부서진 유리 도자기 같았을 것이다. 스승이 말씀하신 고독, 강철로 된 풀잎이 깊은 안쪽에서 꺼내 쓰는 혼신의 빛을 초가을의 정원에서 상상해보게 된다. 성숙한 영혼은 타인처럼 자신을, 자신처럼 타인을 껴안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지오바니 몬지아노의 고독으로부터 얻게 된다. 참 어려운 화두이다. 고독은 박제화된 격언 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독은 늘 고독이 단편이길 바라며 매 순간 매 가닥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신비를, 자신의 시작을, 약간 우수에 젖은 얼굴로 역설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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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l 

1995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2013년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편저 『김영태 시선 초판본』, 공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ㅡ김수영 50주기 기념시 해설집』 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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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