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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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공시사 월평
여섯 번째 걸음. 사랑에 빠지기
● 박동억
― 사랑하는 자의 귀는 근본적으로 닿을 수 없는
장소를 향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의 존재이다.
사랑은 낯선 타인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심지어 자신보다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건이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가족과의 유대감과 달리 사랑은 한순간의 눈 맞춤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숨에 세상을 사랑하는 이의 빛깔로 물들인다. 그렇다고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지나친 열정을 끌어내기 때문에 사람을 상처 입히거나 파멸로 이끌곤 한다. 이 때문에 미셸 푸코는 사랑을 광기로부터 시작하는 지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 중요한 것은 사랑이 평온했던 ‘나’를 뒤흔들어 타인 앞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공감의 출발점일 수 있다. ‘나’와 내 곁의 가족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낯선 타인 또한 내밀한 공감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랑할까. 외젠 이오네스코는 사랑이 곧 보존 욕구일 뿐이라고 시니컬하게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도저히 거부하기는 힘든 법칙처럼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위해 정사를 한다고 믿지만, 이는 단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라고 나를 조종하는 법칙에 복종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2) 이 냉소적인 해석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당신은 무언가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거나 다만 사람에 너무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은 타인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렇지만 사랑의 징표 중 하나는 헌신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리는 상대의 얼굴에 동요한다. 상대의 웃는 얼굴과 찡그린 얼굴에 즉각 반응하고, 상대의 침묵에 숙고한다. 상대의 상처를 내 것처럼 느껴보려 하며, 상대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해결하려 한다. 타인이 처한 상황을 심려하고 섣부르게 나서지 않으려 참아본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의 신체는, 그것은 절대적으로 당신의 소유이기에 ‘내 몸처럼’ 느끼고 의식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말하고 있다’. 설령 당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당신의 눈빛은 내 가슴속에서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나’를 듣는 입장에 세운다. 일본의 현상학 와시다 기요카즈가 『듣기의 철학』에서 지적했듯 듣는 입장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공감의 출발점이라면, 사랑하는 자의 귀는 근본적으로 닿을 수 없는 장소를 향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의 존재이다. 당신이 그 자신의 마음과 신체로 존재하듯, ‘나’ 또한 당신의 존재를 듣고 싶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절망에 빠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타인의 존재를 자신의 것인 양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는 진정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3)
―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감정일 것이다.
사랑은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일까. 사랑하는 자의 의식에는 적어도 세 가지 대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사랑하는 당신이고, 둘째는 사랑의 감정 자체이며, 셋째는 사랑에 뒤따르는 인간관계이다. 우선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을 깊이 듣는 일이다. 사랑은 당신의 말뿐만 아니라 눈빛과 몸짓, 심지어 침묵까지 해석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 다음으로 사랑이 지속하려면 근본적으로 ‘사랑의 감정’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연적으로 좌절과 고통을 동반하는 한 사랑하고-사랑받는 감정의 교환이 소중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없다면 사랑은 지속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두 사람 혹은 두 가족을 하나로 묶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이 소중히 다루던 사람과 사물을 함께 보살피는 일이다.
사랑은 공감의 영토를 넓힌다. 따라서 사랑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존재를 건 월경(越境)이다. 역사상 사랑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공동체는 많았다. 특히 귀족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한 계급 사회에서는 사랑보다 지배 질서가 우선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감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이 뒤얽혀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 불가해한 타인들을 받아들이는 최초의 교육으로서 사랑은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한편 빌렘 플루서는 세상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우리가 죽음의 판결을 받는 인생의 잔인한 무의미함을 잊으려는 하나의 기교”이며, 예술·과학·철학·종교 등은 모두 고유한 고독과 죽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행해진다.”4) 이것은 도리어 사랑을 비롯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흩어지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는 데 반해, 인간의 대화 방식은 질서 정연하게 정보를 축적하고 정돈하는 ‘부정의 엔트로피’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미디어 철학자의 비유를 빌린다면,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엔트로피를 부정한다. 이것은 사랑은 어떠한 힘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것이다. 이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사랑은 우리를 무엇으로 향하게 하는가. 모든 물질이 균일한 분포와 밀도를 향해 확산하는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새삼 무엇인가를 모으고 세워서 나아가게 하려는 이 의지는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답하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사랑에 따르려는 의식이 이 세계와 마주한 본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다만 엔트로피와 사랑 사이에서, 사람은 공감을 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사랑의 도착점이 무엇인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랑을 따르며, 사랑이 우리의 존재에 무엇을 행하는지 반추할 뿐이다. 그저 우리는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돌보게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공감을 매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사랑의 흔적은 공감이다. ‘나’에 갇혀 있던 세계가 당신을 향해 넓어진다. 따라서 공감만이 사람의 의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최대치의 관념일지도 모른다.
―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고, 진실한 동시에 속일
때만 비로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최근의 시에 사랑의 온기가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다. 이 말은 최근까지 사랑이라는 단어와 사랑에 관련한 주제들이 현대 시에서 폄하되거나 도외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2000년대 시 전반의 징후는 사랑의 열정이 메말랐다는 특징이다. 2000년대 시에서 연인의 공동체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한 것은 ‘나’의 실존이고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억눌러두었던 진실이었다. 이와는 또 다른 맥락으로서 1990년대 페미니즘 시가 부각한 이후로 기존의 가족 질서와 연인 담론은 가부장제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사회학적 비판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시인이 연인이나 자식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조차 충분한 숙고와 도덕적인 표현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제 사랑에 대한 순연한 표현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2019년을 전후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시집이 대거 등장하는 사례도 있었으며,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는 경향은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창을 뚫고 새가 들어왔다. 새가 밝은 빛처럼 날아들 때 나는 놀라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빛에 의해 얼굴은 훼손되어가고
새로운 얼굴을 상상하며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없는 아침은 오지.
네가 나를 본다고 생각할 때 나는 오래된 장면 하나를 가졌다는 걸 알지.
왜가리, 제비, 참새, 벌새, 공작, 딱따구리…… 우리가 함께 본 새들은 많아서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일까.
강가에서, 거리에서, 수영장에서, 공원에서, 놀이동산에서, 영화관에서…… 창을 뚫고 나를 쳐다본 새가 이번 한 번이 아니었어.
그때 내가 있던 모든 장소가 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 낯선 상황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걸려오는 전화처럼
지금의 나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새를 간호해서 돌려보낸다면, 새는 더 큰 상처를 내면서 내게 올지도 몰라.
멀어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빛에 곧 사로잡힐 것만 같아. 비추다 만 얼굴로 네가 뒤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새에게 처음이 되고
처음의 모습으로 새는 죽어가고 싶어 하지.
이미 봤던 영화를 혼자서 보고 있다는 걸 알려준 건, 주인공의 집 마당에 살던 딱따구리야. 주인공이 집에서 나오면 소리를 멈추고 집에 들어가면 나무를 쪼아대던. 그래서일까
둘이서 봤던 영화관에서의 딱따구리를 말릴 수 없는 건.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같이
오늘은 돌아다니면서 평생 듣게 될 새들의 소리를 미리 들었어.
- 강우근, 「비밀」 전문(《현대문학》 2023년 7월호)
이 시를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뒷모습으로 멀어져 간 장면과 이내 ‘나’가 두 사람이 영화를 보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울음이 터질 것 같다고 느끼는 장면이 그렇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새’의 이미지이다. 왜 시인은 ‘새’의 이미지를 이별의 장면과 교직해놓은 것일까.
“밝은 빛처럼” 창을 뚫고 들어온 ‘새’의 이미지는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함께 본 새들”이라는 사실이다. 창을 뚫고 온 저 ‘새’는 고독한 방에서 만들어 낸 미적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강가, 거리, 수영장, 공원, 놀이동산 영화관과 같은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장소에서 ‘함께’ 발견했던 것으로 표현된다.
이와 맞물려 ‘새’는 대화의 표상이다. “내가 있던 모든 장소가 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이 ‘새’가 날아들 수 있는 장소임을 뜻한다. 그리고 ‘새’는 곧 “낯선 상황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걸려오는 전화처럼” 온다. 또한 빛에 감싸인 새의 표상처럼 멀어지는 당신의 뒷모습이 “빛에 곧 사로잡힐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 순간 네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결국 ‘새’는 나를 감싸주는 목소리이고, 나를 향하는 당신의 얼굴이다.
결국 우리는 뒤집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 새이고 빛인가. 당신의 목소리가 ‘새’처럼 내게 날아왔다. 당신의 얼굴이 빛처럼 ‘나’를 향했다. 다시 모든 장소가 창문이라는 표현을 짚어본다면, 이 시구는 당신이 떠나간 뒤에 모든 장소에서 당신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모든 곳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발견한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사랑시이다. ‘아름답다’라는 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이별과 그리움에 ‘새’와 ‘빛’이라는 승화된 이미지를 덧씌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기 혹은 투명함에 가까운 표상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거움을 덜어낸다. 그렇게 슬픔의 무게는 덜어지고 사랑의 아름다운 질감만이 남는다. 강우근 시인이 택한 ‘새’는 이별의 슬픔으로부터 마음의 날갯짓과 궤적, 그것이 뻗어 나가는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놓친 풍선을 잡으려고
있는 힘껏 손을 뻗는 사람이 있었다
구름이 펜스 바깥으로 나가도
이곳이 놀이동산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고
인형 탈을 쓴 무리를 쫓아가는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는 연인들 사이로
퍼레이드가 길게 이어졌다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에 찾을 수 있다고
너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높은 곳에 있던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내려올 때
물이 묻을까 봐 얼굴을 가려주는 것처럼
서로에게 손차양을 만들어주고
어떤 장면은
영원을 살게 했다
- 정재율, 「영원성」 부분(《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어떤 풍경은 액자에 담긴 그림 같아서
집 안에 오래도록 걸어놓고 싶다
한참 동안 모래사장을 걸으면
바다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고
영원이라고 말하면
정말 영원이 길게 놓여 있는 듯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라는 나무들에게선 특유의 단단함이 느껴지고
그 아래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연약하게
밀물과 썰물이 매번 번갈아가며 오는
해변에서
무너져내릴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무너지는 게 아니라 사라질 것만 같다
조금씩
모래성 안쪽으로 물이 차오르고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언젠간 다 사라질 것을 알지만
그 안으로 계속해서 손을 집어넣는 사람이 있고
그는 무너져도 계속 쌓는
집요함을 가졌을 것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사랑하면 마음이 괜찮아져”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옆으로
구름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새 그의 무릎은 젖어가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슬픔을 뭉쳐 집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에게 쉽게 부서지는 마음이 있어서
신은 그에게 계속 쌓는 믿음을 주었는지도
파도를 따라 천천히
모래가 밀려오고 있었다
- 정재율, 「온다는 믿음」 전문(같은 지면)
정재율 시인의 시는 익숙한 사랑의 감각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숙고할 것은 그러한 사랑의 익숙함 자체이다. 익숙한 대상을 익숙한 언어로 표현할 때 예술적 표현은 자칫 상투성을 지니게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영원성」에서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도 /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에 찾을 수 있다고 // 너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단언은 사랑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상기하게 해주는 문장이지만, 그 내용도 언어적 표현도 우리에게 새로운 앎이나 감각을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 있던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내려올 때 / 물이 묻을까 봐 얼굴을 가려주는 것처럼” ‘손차양’을 만든다는 시구에서도 다정함이 배어나오지만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새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재율의 시에 눈길을 두게 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집요할 정도로 인간의 가장 기초적이고 자명한 감각에 대해서 상기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지닌 매력은 단순성이다. 시 「온다는 믿음」에서 시인은 존재를 ‘무너짐-세움’이라는 간명한 이항 대립 속에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끝없는 바다처럼, 신이 만든 이 영원한 세상에서 시인은 삶이란 무엇인지 되묻는 듯하다. 생명은 파도에 지워지는 모래성처럼 삶은 쌓고 무너지는 일의 반복일까. 그러한 허무감을 부정하기 위해서 애써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사랑하면 마음이 괜찮아져”라고 말해보기도 하고, 젖은 무릎으로 ‘슬픔의 집’을 향해 전진하기도 하며, “계속 쌓는 믿음”을 간직해 본다. 이 시는 소박하고 명료하며,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허무주의적이다. 사람은 이미 간직한 것 외에는 새롭게 소유할 수 있는 진실 따위는 없는 셈이다.
무대 위의 침대 위에 수조를 놓는다
수조는 30x30x30cm로 바다를 담고 있다
관객은 무대에서 수조를 바라본다 수조에서 움직이는 작은 작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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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속의 바다에도 태풍이 분다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작은 곳에서 부는 태풍이라도 태풍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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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장을 끊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수조 속의 바다와 바닷속의 수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비슷하며 다르고 다르며 같다 같으며 바뀌고 달라지며 웃는다 이것은 바다 위에 서서 바다 위를 걷는 어떤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은 사람을 보며 웃는다 수조 속의 작은 작가를 보며 수조속의 작은 작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가리키는 손가락이 조금씩 작가에 닿는다 작가는 손가락에 눌린다 작가는 곧 터질 듯 보이지만
아무리 작은 작가라도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대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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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은유라고 부르기로 했다 작은 작가가 헤엄친다 작가에게는 손도 없고 발도 없다 지느러미도 없고 입도 없다 작가는 눈으로 보고 눈으로 적는다 작가가 적은 글을 배우가 재현한다 작가는 팔랑팔랑한 몸통만 남아 꿈틀대며 수조 속을 헤엄친다 배우는 그런 작가를 재현한다 무대 위에서 조금씩 자라는 희망 같은 것인 양 그러다 무너지는 절망 같은 것인 양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은 언제나 둥글고 새파랗습니다 그것은 단단하고 깨지지 않는
상징적인 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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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서 말을 한다, 울면서 말하기, 울면서 달리기, 달리면서 넘어지기, 넘어지며 일어나기, 일어나도 울기, 울면서 말을 하는 두 사람의 배우, 배우는 배우를 따라한다 배우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하나의 배우가 하나의 배우로 화하고 나면 무대에는 사랑만이 남는다, 두 사람의 배우가 사랑을 나누면 관객은 조심스레 그 사랑을 들고 자리로 떠난다, 관객의 자리는 너무 멀어서, 30x30x30cm의 수조 속을 바라보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관객이 볼 수 없어도 수조는 생동한다 수조는 살아 있고 수조는 숨을 쉬고 수조 속 바다는 조금씩 깊어지고 그렇게 심연이 된다 심연이 되어 슬픔도 남지 않는다
라고 작가는 적는다,
라고 배우는 재현하는지도 모른다
관객의 자리는 너무 멀고 누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측량사가 나타나서 조금씩 그림을 그린다 그림엔 알 수 없는 것들이 알 수 없는 형체를 하고 조금씩 웅크리고
순간을 그림에 담아도 그것은 순간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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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는 깨진다 관객의 마지막 말로
이제는 바닥에서 퍼덕이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듣는다
- 김연필, 「호두껍질과 미래」 전문(《문학의 오늘》 2023년 여름호)
김연필 시인의 시는 생경하다. 이 작품에 언급된 사랑이라는 시어 또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배우가 사랑을 나누면 관객은 조심스레 그 사랑을 들고 자리로 떠난다”라는 묘사에서 먼저 분석해야 할 것은 ‘배우-무대’와 ‘관객-사랑’의 관계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 또한 사랑으로 한정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을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5)
이 작품의 주제는 독자와 작가의 관계로 판단된다. 따라서 형식미학적인 논리를 따라 전개되는 이 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 시를 향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독서 과정에서 독자가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마음인가. 김연필 시인은 현실의 작가와 작품속의 작가를 구분하듯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관객은 무대에 머무르고, 작가는 수조 안에 있다. ‘관객(무대)’은 ‘작가(수조)’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수조’는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 세계이고, ‘무대’는 현실에 대한 극화된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관객은 작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에 관객의 손짓에도 “아무리 작은 작가라도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대의 법칙이다”라는 진술이 뒤따른다. 요컨대 독자는 작가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대신 ‘배우’라고 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는 그런 작가를 재현한다”. 요컨대 ‘배우’는 작품 안에 재현된 작가이고, 그것은 익히 작가와 화자를 구분하는 서구 근대문학의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속의 목소리는 작가의 것이 아니야, 단지 이런 말을 남기기 위해서 이 작품이 쓰였다면 문학 이론을 시로 번역한 지루한 작품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론적 답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김연필 시인 자신의 특수한 작품론이 여기에는 깃들어 있다. 다시금 작품을 읽어나가자. 배우들의 연기가 시작한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말을 한다,” 울면서 말하고 달리고 넘어진다. 그것은 만약 작가가 어떤 슬픔의 경험 속에서 쓴다면, 작품 속의 화자는 슬픔을 모사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사의 구조는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영원히 반복될 수 있다. “배우는 배우를 따라한다 배우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모사하는 존재를, 또 모사하는 존재를, 또 모사하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시는 근본적으로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성찰은 작가의 방향과 독자의 방향이라는 이중으로 행해진다. 작가에게 작품이란 승화이다. 그가 어떤 참혹과 슬픔을 경험하든 쓴다는 행위는 그것을 하나의 가상으로, 가상의 가상으로 바꾸면서 고통을 경감하는 승화의 방식이 된다. 한편 독자는 무엇을 소유하는가. 그는 그 끝없는 가상, 즉 작가의 마음이라는 원형에 비추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작품을 소유할 떠나갈 뿐이다. 작가와 독자의 위치는 견고해서 자리바꿈할 수 없다. 관객-독자의 손이 닿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작가의 이미지와 “상징적인 단단함”을 지닌 ‘독자의 눈’이라는 이미지는 이를 표현한다. 견고함은 각 위치의 완결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된 구조 안에서 “관객이 볼 수 없어도 수조는 생동한다. 수조는 살아 있고 수조는 숨을 쉬고 수조 속 바다는 조금씩 깊어지고 그렇게 심연이 된다. 심연이 되어 슬픔도 남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적는다. 요컨대 작품은 작가와 독자를 잇는 통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작품이다. 작품 자체가 마치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작가와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한다는 것이 이 시에 표현된 작품론인 셈이다.
이 구조를 분석한 이후에야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채롭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잇다. 무대에 남게 되는 것이 오직 ‘사랑’뿐이라고 김연필 시인은 표현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긍정적 진술일까, 부정적 진술일까. 시인의 슬픔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라면, 시인의 비참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감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라면,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수조는 깨진다 관객의 마지막 말로 / 이제는 바닥에서 퍼덕이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듣는다”라는 장면에서, 시인은 작품을 깨고 나오는 시인의 진실한 비명을 상상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을 뒤집어 읽고 싶다. 이 작품이 표현하는 상징적 파국은, 실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작품 속에서만 표현된 것이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사실 누구든지 마음을 직설할 수 있다. 그저 행하면 된다. 가슴속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온몸으로 세상을 내리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안다. 그 때문에 김연필 시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택했던 것이 아닐까.
김연필의 시 「호두껍질과 미래」가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언어의 구조이고,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김연필의 시는 언어라는 체계가 아니라 언어가 매개한 관계를 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의미체계로서의 언어보다 언어 행위 자체의 본질을 더 깊이 실감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보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서, 미적인 언어의 미로를 만들어서 스스로 헤매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헤맴은 자신의 마음을 직설하는 순간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하고 속이고 잃어버리기 위한 여정이다.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고, 진실한 동시에 속일 때만 비로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언어 행위이고, 이러한 언어 행위의 본질에 대한 추궁이 「호두껍질과 미래」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1) “가령 사랑의 광기는 종을 보존하는 데 필요하고, 정신착란에 빠질 정도의 야망은 정치단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필요하며, 무분별한 탐욕은 부를 창출하는 데 필요하다. 이처럼 이 모든 이기적 혼란은 개인을 넘어서는 질서의 위대한 지혜 속으로 들어간다.”(미셸 푸코,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309~310쪽).
2) 외젠 이오네스코, 이재룡 역, 『외로운 남자』, 문학동네, 2010, 56~57쪽.
3)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타키타니」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쓴다.
4) 빌렘 플루서, 김성재 역, 『코뮤니콜로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0~11쪽.
5) 이 글에서 나는 이 작품을 사랑시로 읽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랑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생태학을 주제로 다른 글에서도 이 작품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생태학적인 작품도 아니다. 다만 이 작품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이 작품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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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