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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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동억 

  2023년 8월 공시사 월평 


  

  

 

 

 

다섯 번째 걸음. 가족과의 이별

 

● 박동억

 

 

 

 

   

ㅡ 오늘날의 현대인은 더 이상 가족의 임종을 

집에서 돌보지 않는다. 이 돌봄의 노동은 병원과

장례식장에 위임된다.

 

 1923년에 문예지 《백조》에 발표된 현진건의 자전적 소설 「할머니의 죽음」은 여든두 살의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으며 시작한다.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자손들이 할머니의 생가에 모여 그녀의 임종을 지키는 과정이다. 할머니는 죽음 앞에서 마음과 몸의 변화를 겪는 듯했다. 평생 향을 켜고 염불을 외셨던 할머니는 이젠 종교 따윈 하잘것없다는 듯 오히려 자신을 위해 외는 염불 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며 성화를 내셨다. 또한 뒤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여 문드러진 할머니의 피부 또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가족의 이율배반이다. 그들은 임종하는 할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수행하는 한편 그러한 의무를 꺼림칙하게 느끼며 멀어지려 한다. 누군가는 금방 돌아가시지 않는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결국 의사를 불러 할머니가 이삼 주일을 건강하리라는 확답을 받은 뒤에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주인공 ‘나’ 또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전보를 받으며 이 짧은 소설은 끝맺는다.

 현진건의 소설은 현대적인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실감되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 죽음은 타인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원시적인 제의도 전통사회의 삼년상도 없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자손들은 오히려 임종이 지연될수록 직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심려한다. 죽음은 삶의 정체(停滯)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나 무의미와 같은 단어를 새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왜 현대인은 죽음 앞에서 그의 실존이 무의미해진다고 믿는가. 허무는 근본적으로 죽음 자체에 내재한 속성인가, 아니면 할머니의 임종 앞에서도 냉담한 가족들처럼 타인의 죽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대하는 우리의 관계 방식에서 비롯하는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지적했듯 오늘날 죽음은 두 가지 의미로 현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첫째는 심리적인 배제이다. 현대인은 죽음의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으려 하거나 의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죽음은 건강한 일상의 중단이거나 휴지(休止)일 뿐이다. 그것은 현진건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 할머니가 금방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보며 죽음을 부인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한편 두 번째 배제는 사회적 수준에서 행해진다. 오늘날 현대인은 더 이상 가족의 임종을 집에서 돌보지 않는다. 이 돌봄의 노동은 병원과 장례식장에 위임된다. 이것은 죽음이 죽어가는 자의 몸을 바라보며 실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현진건의 소설이 현대적인 죽음의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임종의 장소를 ‘집’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할머니의 죽음」에서 죽음의 실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죽어가는 할머니의 몸을 바라보며, 그의 정신이 종교적 신앙을 잃고, 그의 몸이 건강성을 잃어버리며 무너져 가는 것을, 한 인간이 그렇게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러한 죽음은 부조리나 실존과 같은 관념으로 환원될 필요가 없다. 그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드러난 인간적인 추(醜)를 직시하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ㅡ 죽음에 관한 한 현대문학은 고통스러운

애도의 의식인가, 아니면 고통스러움을 억누르는

탈취제에 가까운 것인가.

 

 과거의 사람들은 비위생적으로 죽어갔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요하게, 위생 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바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인의 죽음은 타인에게 더 이상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장례의 산업화 또한 이러한 과정을 가속한다. 현대의 장례는 가족을 기리는 고유한 의식이라기보다 장례업체의 형식화된 절차에 가깝다. 거기서 풍기는 것은 사랑했던 이의 시취가 아니라 탈취제의 향기이다.

죽음에 관한 한 현대문학은 고통스러운 애도의 의식인가, 아니면 고통스러움을 억누르는 탈취제에 가까운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가장 손쉽게 대답하는 방법은 아울러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끈질기게 애도하는 작품과 추모를 완수하는 작품, 그리고 그리움조차 거세한 작품이 뒤섞여 있는 것이 실제라고 답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의 근원적인 지향성, 근본적으로 그것이 지극한 심려 속에서 말 건네고 마찬가지의 심려 속에서 말을 듣는 사건이라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작품에서도, 근본적으로 문학이란 타인의 죽음까지 듣고자 하는 심려가 배음으로 깔린 장르가 아닐까.

     

    

직진 길 없음 우회하시오 팻말을 따라 걸었다 언제부터 걸었는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걷다가 돌이 있으면 주웠다 금세 또 던져버렸다 이쪽으로 가면 군부대가 나와 오래전 죽은 형이 말했다 그래 그때도 이 길을 걸었지 어른들은 뱀술을 담갔다고 했다 먼지바람이 날리는 마당에 서서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입을 보다가 목을 지나서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는 뱀을 봤다 거짓말 아냐 형은 웃었다 너 굉장히 명랑만화에 나올 것 같네 총성이 울리는 만화에도 명랑이 있다면 뱀 잡으라고 했다 뱀이 사람을 잡았다고 했나 혀가 딱딱하게 굳은 형이 아무 맛도 안 난다고 말을 흘리는 동안 도망은 가장 빨리 낮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밤이 낮이 되는 긴 쉬워 낮 속에 밤이 있고 밤 속에 낮이 있다고 하는 것도 쉬울까? 물 안에 뱀이 있었다 뱀 안에는 형이 있었고 형 안에는 죽은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는 뿌리부터 썩고 있었다 먼지바람이 눈이라고 착각할 만큼 수북이 휘날렸다 그것은 사람을 덮었다 멀리서 뻣뻣하게 굳은 공들이 굴러왔다 잉걸도 없이 재만이 가지런하게…… 길이 없다 계곡의 물살이 차오르고 형은 잠들지 말라고 했다 형이 어디 있지? 물가엔 쇠살모사만 둥글게 누워서 사람은 거들떠도 안 본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태평하다 얼큰하게 취한 것도 같다 던진 돌은 구르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총성 다음에 비명이 없다고 형 아닌 내가 말했다 

- 오산하, 「진입금지」 전문(《문학사상》, 2023년 8월호)

 

 

 죽은 형과의 동행을 그리는 「진입금지」를 읽으며 문득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린다. 추모하는 자에게 걷는다는 행위, 그의 눈앞에 놓인 길은 무엇인가. “직진 길 없음”이라는 첫 문장으로부터 시의 후반에서는 “길이 없다”라는 시구에 닿는다. 이는 곧 추모하는 자에게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이라기보다 헤매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형의 죽음은 직설되기보다 암시된다. 어른들이 만든 뱀술을 들이켰고, 그렇게 뱀이 사람을 잡았고, 형의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것은 구체적 사건의 회상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포된 것은 시인이 형상화하고자 하는 죽음의 이미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혀가 딱딱하게 굳은 형”처럼 죽음은 존재를 송두리째 삼키고 화석화하는 일이다.

 죽음은 존재를 삼킨다. 징후적인 것은 이 작품에서 줄곧 시공간과 생명체를 ‘삼키고-삼켜지는’ 관계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낮 속에 밤이 있고 밤 속에 낮이 있다고 하는 것” 혹은 “물 안에 뱀이 있었다 뱀 안에는 형이 있었고 형 안에는 죽은 나무가 있었는데”라고 표현하는 시구를 주목해 보자. 여기서 내포의 우열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삼키고-삼켜지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존재의 화석화이다. 죽음은 존재를 굳힌다. 멀리서 먼지가 불어와 사람을 ‘삼키면’ 그것은 이윽고 “뻣뻣하게 굳은 공들”이 되어 다시 굴러온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결국 존재를 삼키고 굳히는 죽음의 이미지가 이 시에서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주된 것은 ‘나’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일견 형에 대한 추모를 그리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추모의 마음보다 앞서는 것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실감으로 판단된다. ‘나’에게 죽음은 피부로 와 닿는 것, 피부를 옥죄고 경직시키는 어떤 통증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말미에서 “형 아닌 내가 말했다”라는 문장처럼, ‘형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시의 주제는 ‘나’의 피부로 실감하는 죽음의 공포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형’과 동행하는 매 걸음은 옥죄는 뱀의 꽈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가중하고 있는 셈이다.

 

 

조문을 다녀와서 신열을 앓았어요

문중의 큰 어르신이었지요

4.19 학생 운동을 했던 큰아버지

여름의 초입이었고

채 떨구지 못한 꽃잎이 말라 버석거렸어요

몇 겹의 물감을 덧바르다가 페인팅나이프를 던졌어요

어느 화가의 그림 밑에는 죽은 아이가 있었고

내 그림 밑에는 살아 있는 아이가

거룩한 믿음에 고개를 숙였는데

 

건물에 달린 창은

살아있는 물고기의 눈을 뜨는데

소나기는 집중적으로 통증을 주겠다는

의지로 내리고

 

조문을 다녀왔고 국적이 난무하는 여인숙 앞을 지났고

그게 지난주였던가요, 지난달이었던가요

날개를 펼친 청동 풍뎅이가

우리 앞으로 날아왔던 시간 사이를

어지럽게 붕붕 날아다니고

보라색 얼굴을 한 외국인이 후암떡집 앞에서

코스모스와 함께 피어 하늘거리고

여름 까마귀와 깔깔 웃다가

폭풍우에 사라졌는데

 

조문하러 다녀온 기억은 있는데

정작 큰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기억은 없는

- 윤진화, 「신열」(《공시사》, 2023년 8월호)

 

  

 「신열」은 사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이라는 두 가지 맥락에서 읽힌다. 우선 이것은 큰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신열을 앓은 경험에 대한 작품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이것이 4‧19 학생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품임을 쉽게 깨달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4‧19 학생 운동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큰아버지의 추억을 회상하거나 4‧19 학생 운동의 이념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신열을 앓는다. 이는 역사적 체험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감각화하고 있는 셈이다.

 신열이란 큰아버지를 애도하는 동시에 4‧19를 애도하면서 발생하는 징후이자 그것을 애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열이 지속할수록 애도의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여전히 나에게 애도는 생생한 것임을 암시한다. 애도의 지속성은 어느 화가의 그림에서는 ‘죽은 아이’인 것이 “내 그림 밑에는 살아 있는 아이가 / 거룩한 믿음에 고개를 숙였는데”라는 시구에서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시인에게 망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건물에 달린 창은 / 살아 있는 물고기의 눈을 뜨는데”라는 시구는 역으로 시인이 ‘눈을 떠야 한다는’ 의식을 견지한 채 저 건물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음을 뜻한다. “소나기는 집중적으로 통증을 주겠다는 / 의지로 내리고”라는 시구 역시 역으로 기꺼이 통증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시인은 4‧19 학생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표현을 다만 4‧19 학생 운동의 ‘통증’을 받아 들이겠다는 표현으로 대치하고 있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이 작품의 신열이란 4‧19라는 역사적 현장 곁에 닿고자 하는 소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한편 좀처럼 유추하기 어려운 것은 “청동 풍뎅이”가 지닌 상징성이나 “보라색 얼굴을 한 외국인이 후암떡집 앞”과 같은 시어에 깃든 구체적 맥락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어들에 대한 해석을 차치한다면 비교적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명확해 보인다. 그저 흘러가는 선조적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앞으로 날아왔던 시간 사이를” 직시하고 바라보는 것, 그렇게 신열로 호명되는 4‧19라는 시간을 체온에 새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나’는 조문하러 갔지만, 돌아온 기억은 없다고 쓴다. 그렇다면 ‘나’가 살아가는 시공간은 현재가 아니라 4‧19의 시간이다.

  

 

천사가 지상에 올 때마다 세상은 한층 일그러진다. 균형을 잃으므로

 

천사가 지상에 왔다 갈 때마다

세상은 기우뚱거린다.

천사들이 건망증이 심하므로, 깃털을 떨어뜨리므로

 

월남참전자회 회원들과 안국역에서 버스를 함께 탔다.

돈이 많다는 베트남 말을

아직 기억하노라고.

건강하고 튼튼한 남자들이었다.

작년에, 그리고 재작년에 죽은 회원들 이야기

지나며

 

천사가 드문드문 보이다가

안 보였다.

서울에는 참 실종되는 사람도 많네.

 

이번 주만 해도 도대체 몇 명인지.

분명히 있었는데 어떻게 사라지는 건지

 

버스가 급정차하는 건지

천사가 떠나가는 건지

손잡이를 잡다가 크게 휘청, 사람들 사이

 

손자와 손녀 이야기, 재개발된 아파트 이야기,

그 어릴 때 갔어도 베트남 말로 돈은 기억난다는,

그 말이면 베트남 여자들이 다 웃어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실종된 사람들도,

죽은 형님들도 안됐지만

오늘은 서울에서 낮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오래간만에 사랑하는 형님들과 버스도 다 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서울로부터

우리들의 서울이 궁금해 햇빛 속을 한참 더 달렸다.

천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그때에도

그들의 어린 등 뒤에도

천사가 있었으리라.

 

길을 쓸고

깃털을 모아 사람의 무거운 몸과 쌓아 함께 태웠던 일, 사이

 

그들 모르게

휘청,

서울까지 따라왔으리라. 

- 김복희, 「서울」 전문(《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이번 월평의 주제에 해당하지 않는 작품이지만, 김복희의 「서울」은 월남전 파병에 대한 젊은 시인의 재현으로서 주목할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의 ‘나’는 월남 참전자의 대화를 ‘엿듣는’ 위치에 놓인다. 이것은 감정적 거리를 마련하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건강하고 튼튼한 남자들”이었던 월남참전자회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또한 그들이 “사랑하는 형님들”과 베트남의 추억담을 나누는 것을 듣고 있다. 그 순간마다 ‘나’가 떠올리는 것은 ‘천사’의 이미지이다.

 ‘천사’와 ‘깃털’의 이미지는 이 작품을 키치적으로 장식한다. 왜냐하면 월남전 파병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에서 이념적 갈등의 첨예함을 감춘 채, 현실의 구체성과 분리된 평면적 이미지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천사가 지상에 왔다 갈 때마다 / 세상은 기우뚱거린다.”라는 문장을 그대로 읽는다면 ‘천사’는 세상의 저울추이다. 천사의 등장은 우리의 세상이 무엇인가 삐뚤어져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사건으로 암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과는 반대로 근본적으로 이 이미지들은 작품에서 갈등을 승화하는 기능을 한다. 이 작품에서 천사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내려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깃털을 모아 사람의 무거운 몸과 쌓아 함께 태웠던 일, 사이”라는 문장처럼 사람의 무게를 세상에서 덜어내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천사와 깃털의 이미지는 월남전이라고 하는 사건의 무게감을 오히려 산뜻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덮어버리는 커튼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면 우리 마음속에서 “휘청”이는 것은 월남전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다만 천사와 깃털이 맴도는 ‘서울’이라는 이미지인 것이다.

 윤진화, 김복희, 오산하 시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역사적 이념이나 가정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배경으로 놓은 채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나 가정사를 감각하는 자신의 신체를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재현 방식은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멀어졌을 뿐더러 심지어 사적인 관점의 편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주어가 되는 것은 표면상 ‘나’지만 실상 주어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어떤 정체성이나 자아를 지닌 ‘나’라기보다 특정한 사건에 연루되어있는 신체의 ‘감각’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을 최근 유행하는 정동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각성은 수동적으로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며 생성된 것이라기보다 명백히 시인의 의식과 고유한 삶에서 산출된 개성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여기서 다시 문학이 죽음을 여실하게 재현하는 장르인지 되묻는다면 아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시인은 주저하면서도 언제나 타인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는 낯설고 섬뜩한 타인의 죽음을 향해 자신의 신체를 열어두는 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연재-박동억.png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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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