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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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공시사 월평
네 번째 걸음. 돌봄과 가족
● 박동억
ㅡ 가족이란 맹목적인 돌봄의 공동체이다. 가족
사이의 돌봄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돌봄의 방식이 도덕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최초의 경험은 가족을 통해 이뤄진다.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돌보아지고, 이후 부모가 되어 자식을 돌보는 경험으로 이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면, 가족은 돌봄의 경험을 대물림하는 공동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곧 사회가 필요하다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사람은 사람 혹은 수많은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직관적으로 가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러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마다 가족에 대한 경험이 다르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가족을 통해 사랑과 화해를 배우지만, 누군가는 가족에게서 불안과 고통을 경험한다. 혈연으로서의 가족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안식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행의 울타리 이다.
가족에는 이유가 없다. 왜 가족인지 묻기 전에 가족일 뿐이다. 다시 말해 혈연으로서의 가족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돌봄의 경험만을 제시할 뿐, 어떠한 이유 때문에 서로 맺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 공동체가 법이나 도덕에 의해 맺어진 관계인 데 반해, 가족은 다만 피로 맺어진 관계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돌봄의 체험-본능’과 ‘돌봄의 뜻-도덕’을 구분해보아야 한다. 부모‧자식의 단란함, 더 나아가 친척 사이의 유대감은 마땅한 돌봄의 이유가 없을 때도 성립한다.
가족이란 맹목적인 돌봄의 공동체이다. 가족 사이의 돌봄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돌봄의 방식이 도덕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때로 다른 가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행하곤 한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아동심리학자 킬리 햄리(Kiley Hamlin)에 따르면 우리 마음속에는 자신과 같은 습관과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반대로 자신과 다른 습관과 취향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본능이 깃들어 있다. 생후 육개월 된 아이조차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돌봄에 대한 정확한 사유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한 최초의 조건은 가족에 대한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듯 세상을 사랑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순에 부딪친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가. 모든 사람과 가족처럼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은 만족스럽고 순진한 이상론일 수 있다. 도리어 우리가 실천적인 입장에 서려면 모든 사람과 가족처럼 살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 이후에 다시금 ‘가족처럼’ 함께 돌보는 관계를 이룩하는 방식에 대해 물어야 한다.
—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부양하는 부모와
부양받는 자식의 일방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로
대체된다. 그것은 ‘아이’라는 가족 구성원이
발명되면서 가능했던 변화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창에 ‘가족’ 또는 ‘Family’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곧바로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의 이미지가 나온다. 서로 포옹하고 있거나 서로에게 기대거나 서를 향해 그들은 웃고 있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인 것처럼 보인다. 가족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면서, 가족 구성원은 그들의 삶을 상호 지지하고 상호 부양하는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 사회의 가족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인 것이기도 하다. 전통 사회의 가족은 권위적인 모델을 따른다. 조선 시대의 양반 가문을 떠올려보자. 가부장은 존경받아 마땅할 웃어른일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을 가르치고 처벌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가부장은 계급적 차이에 따라서 타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한편 전통 사회의 가장(家長)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의무 또한 짊어졌다. 그가 짊어지는 의무란 ‘가(家)’의 의미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가부장 혹은 가모장은 왜 가족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사람의 관계란 무엇인지 묻고 답해야 했다. 다시 말해 가장은 돌봄의 뜻을 세워야 하는 위치를 뜻했다. 마찬가지로 가문이란 돌봄의 뜻을 누대에 걸쳐서 잇는 관계를 말했다.
이와 달리 현대 사회의 가족은 ‘돌봄의 뜻’을 세우지 않는다. 돌봄의 뜻을 제정하는 역할은 사회에 이양되었다. 정치인과 법조인과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돌봄의 뜻을 입안한다. 그렇다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현대의 핵가족 사회로, 더 나아가 현대의 다원화된 가족 형태로 이행해오는 과정은 곧 가족 내에서 ‘돌봄의 체험’만이 남고 ‘돌봄의 뜻’이 배제되는 역사적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과정을 「아동의 발명」이라는 글에서 제목대로 ‘아동이 발명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가 역사적 고찰을 통해 논증하는 놀라운 사실은 전통 사회에서는 아이와 성인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관념, 즉 부모에 의해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양육받아야 할 가족 구성원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었다. 사실 이러한 사실은 고진보다 더 일찍이 필립 아리에스가 『아동의 탄생』에서 지적한 바다.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에서 천 년에 달하는 역사적 시간 동안 대여섯 살의 아이조차 부모의 시중을 드는 존재이거나 ‘작은 어른’으로 취급되었을 뿐, 어린아이로 생각되었던 적이 없다.
‘아이’라는 관념, 다시 말해 ‘아이’라는 가족 구성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전통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부양은 권위에 따른 상호 관계이다. 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돌봄의 뜻을 전하고, 가족 구성원은 그 뜻에 따라서 서로 부양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부양하는 부모와 부양받는 자식의 일방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로 대체된다. 더 이상 가족은 가정 내에서 정치를 행하지 않는다.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상호 협력만이 중요해졌다. 그것은 ‘아이’라는 누구나 보살펴야 할 가족 구성원이 발명되면서 가능했던 변화다. 그 변화는 서구 사회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고,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에서야 가능했다.
— 사적인 영역으로 배제된 가족 체험을
‘돌봄의 뜻’을 세우는 장소로 되돌리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가족에 대한 역사적 물음을 통해 우리는 가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즉 ‘가족이란 맹목적인 돌봄의 공동체’라는 규정은 오직 현대 사회에 유효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돌봄의 뜻을 생산하는 기능을 잃었고, 돌봄의 체험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가정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장소다. 대신 가족 구성원 간에 서로 지지하고 유대하는 것만이 가정의 기능이 되었다. 가정은 정치적 · 사회적 영역의 바깥으로 추방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적인’ 영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의 역할이다. 사적인 영역으로 배제된 가족 체험을 ‘돌봄의 뜻’을 세우는 장소로 되돌리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사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공적 담론으로 치환하는 것은 가정법원의 역할도, 통계청의 역할도 아닌, 문학이 맡아야 할 역할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정확히 말해서 문학은 이 물음을 최초로부터, 즉 가족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반문하는 근본주의적 태도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가 자라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날 엄마는 아침으로 소시지 야채 볶음, 감자볶음, 미역국을 차려 줬잖아. 난 미역국이 너무 싫었어. 미끌거리는 걸 입속에 넣을 때마다 억지로 삼켰어. 매번 그랬잖아. 피가 맑아진다고. 피가, 맑아지는 게, 뭔데?
학교는 너무 시끄러웠어.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의 작은 문을 열고 하얀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했어. 거기서 사각거리는 이불을 덮고 고요하게 침잠하는 상상. 그게 나를 구했어. 그런데 내 방은 너무 약해서 누가 툭 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 버렸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맑게 웃고 있는 애들의 입을 다 찢어버리고 싶었어.
*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된 날부터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졌잖아. 그게 나는 좋았어. 좋은데 엄마가 슬퍼 보여서 미안했어.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엄마가 미웠어.
불가능한 것이 너무 많아서
믿음이 생겨나듯
세상에는 처음부터 잘못된 자리에 놓인 것도 있어. 제자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냥 거기 있어야 되는 것도 있어. 그걸 엄마는 모르는 거 같았어. 나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했어. 가만히 누워 있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빈집의 정적 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것들
비틀린 채 돌고 있는
기울어진 풍경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
*
난 절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 백은선, 「가장 아름다운 혼」 부분(《현대시》, 2023년 6월호)
백은선 시인의 시는 엄마에게 투정하는 어린아이의 어조로 쓰였다. 이기적인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투정하고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엄마가 미웠어”라는 문장은 가능하다. 더 나아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하기보다 어머니를 탓하는 방식을 ‘나’가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내 이 작품은 “난 절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영원히 ‘아이’로 남으려는 선언이기도 하다. 타인을 짊어지는 대신, 타인에게 기대기를 바라는 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2010년대 시에서 반복하던 주제인 ‘영원한 아이’의 추구와 겹쳐서 이해할 수 있다. 2010년대 시인들이 아이로 남고자 했던 이유는 아름다운 동화적 세계에 남고자 하는 피터팬 콤플렉스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명징한 사회 인식과 관련한다. 비성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곧 질식할 것 같은 사회 속에 구성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유의미한’ 인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 의식을 내포했다.
마찬가지로 「가장 아름다운 혼」은 그 반어적인 제목과는 달리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도는 불안한 영혼에 대한 작품이다. 이 사회 안에서 자신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을 학창시절 깨달았고, 그래서 그에게 이 세상은 “비틀린 채 돌고 있는 / 기울어진 풍경”이거나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어조에서 전경화하는 것은 자아의 병증이다. 어린아이의 어조는 타인을 심려할 힘을 잃어버릴,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자기 변호와 토로에 급급한 한 왜소증을 표현한다. 이 점에서 백은선의 시는 사회 비판으로 옮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한 성찰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이나 성찰을 행할 힘을 잃어버린 자아의 불안으로, 그렇게 왜소해져버린 ‘가정’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저 ‘나’는 어린아이의 위치로 달아나는 존재일 뿐이다.
숙주보단 힘차게 아래로 뻗은 것 어둠 속에서 마음만으로 머리를 밝힌 것 콩나물은 궁극이지 둥긂을 찢고 한 번은 제대로 뻗는 순결한 다리지 늙은 아빠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이불 밖으로 왼다리가 튀어나올 때 저렇게 흰 다리로 달렸던 거야 죽은 줄도 모른 채 꿰뚫린 채로 이복동생을 찾아 달린 철길이었다 침목에 침묵에 참혹에 마음이 찢긴 채 너무 멀리 순식간에 날아간 아이 엄마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내 손을 쥐면 아카시아 숲이 일렁거렸다 문지방 너머로 꽃과 개가 컹컹거렸다 우리는 왜 눈매가 다르지 배꼽이 다르지 아무리 사랑해도 우리는 왜 가족이 아니지 형 때문에 행복했어요 매화도 보고 형 덕분에 집이라는 기분을 알아요 곱게 만든 방패연을 베개 위에 두고 아이는 말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후로 그는 평생 못을 밟으며 산다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도 못한 채, 내 동생 봤나요 집집마다 묻고 또 묻고 그렇게 노인은 굵다란 머리로 동네를 달렸다 작은 어깨, 너를 한번 안고 싶어서
- 고명재, 「시루」 전문(《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가족을 의구심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현대시의 흐름에 역행하여, 고명재 시인은 가족의 온기를 믿는 듯하다. 이 작품은 “늙은 아빠”가 악몽에 시달리는 장면으로부터 천천히 그의 과거를 서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복동생을 잃었고 오래 찾아 헤맸고 결국은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달라도 “형 때문에 행복했어요”라고 말 건네던 그 동생이 어느 날 사라진 뒤 “그는 평생 못을 밟으며 산다”라는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그려진 지극한 심려이다. 그의 시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지극한 자세’로 나아간다. 우선 “늙은 아빠”가 이복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다. 그는 노인이 되어서도 “너를 한번 안고 싶”은 지극한 자세를 간직한다. 한편 이복동생의 조심스러운 손짓이 있다. 어린 이복동생은 “형 때문에 행복했어요”라는 다정한 말 건넴과 함께 “곱게 만든 방패연을 베개 위에 두고” 떠나갔다. 여기서 ‘곱다’라는 표현을 시인이 택했다는 사실을 음미하게 된다. 시인에게 가족 사이의 말 건넴과 손짓은 ‘고운’ 것이어야만 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늙은 아빠’를 바라보고 있을 시적 화자의 시선이 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찢긴 마음을 깊이 심려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의 문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섣불리 대하지 않고, 결코 잊지 않는 것. 이 지극함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고명재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가족의 유대를 더 적극적인 의미의 도덕률로 승격하는 순간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실상 현대 사회의 가족이 지닌 상호 부양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오히려 실천하기 어려운 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심려를 표현한다. 가족에 대한 상상력을 넘어서 어떤 도덕적 원칙을 예감하게 만든다는 것이 「시루」라는 작품이 남기는 여운일 것이다.
만약에 if,
이런 걸 가정법이라 한다면
그러니까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정법이라 한다면
나는 물음표 없이 묻는다
만약에 아빠가 둘이라면 어떡해
고장 난 스탠드가 엄마라면
형이 실은 형이 아니라 동생이었다면 말이야
그럼 좋지, 너는 대답한다
가정을 이루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입술 밑이 거짓말로 물들었을 것
빌린 게 없어도 빚진 게
있을 것
서로가 심각하게 부끄러울 것
물려받은 것이 침대가 아니라
성격일 때 우리는 하필
오래된 스프링처럼 딱딱해진다
뭉툭해진 연필로 가정통신문의 빈칸을 채운다
우리 집에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돌려주는 것입니다
받은 만큼, 겸허하게
나는 곰 인형에 맞은 만큼 돌려줬다
컥컥거리면 받은 만큼 토해 냈다
부침개처럼 생긴 그것을 엄마에게 자랑했다
이것 보세요, 제가 만든 가정식이에요
그런데 얘야,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구나
눈물 콧물이 섞여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정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숟가락을 놓다 말고 묻는다
우리가 가정을 이룬다면
양파망에 담아 둔 양파처럼
서로를 닮아 가자
썩은 곳이 있다면 한 겹씩 벗겨 내면서
절대 커지진 말고 작아지면서
그럼 좋지, 너는 대답한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 서진배, 「조건 가정」 전문(《파란》, 2023년 여름호)
서진배 시인의 시는 유머러스하다. 그것은 이 시가 동음이의어를 사용하여 가정(家庭)은 가정(假定)에 지나지 않다는 풍자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은 명료한 비판 의식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족이라고 믿는 자명성을 해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아빠가 둘이라면 어떡해 / 고장 난 스탠드가 엄마라면”와 같은 표현은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양하고-부양되는’ 일방적 관계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작품은 백은선 시인의 시처럼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즉 상대를 어른으로 상정하여서 말하는 어조를 취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엄마에게 “그런데 가정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 가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묻지만 거기에는 응답이 없다. 또한 물건을 대물림하거나 식사를 차리는 일상적 장면 또한 부모-자식의 위계를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경험을 ‘토해내고’ 그 토해낸 경험을 “제가 만든 가정식”이라고 표현하는 전도된 상상이 이어진다. 가족의 이미지는 “양파망에 담아 둔 양파”처럼 서로 닮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것은 서로가 닮아있다는 사실말고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여기 묘사된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 단지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만이 전제될 뿐 여기에는 가족이 어째서 가족으로 성립하는지 마땅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서진배 시인이 인식하는 ‘가족’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책임 때문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너’에게 가족을 이루자고 제안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상대를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두려움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화제를 전환하듯 말할 뿐이다. 이 황량한 목소리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가족은 가족이 있다는 가정일 뿐이다. 가족이어야 할 이유가 없듯, 가족이 아니어야 할 이유 또한 없다. 어쩌면 이것이 시인이 건네고 싶었던 냉소의 내용일지도 모른다.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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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