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임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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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바야흐로 물의 계절이다. 장마로 인한 폭우가 전국 곳곳에 물난리를 겪게 하면서 축축한 워터 월드의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하지만, 장마가 끝나면 불볕더위를 피해 계곡이나 해변 같은 물가를 찾는 친수의 계절이 도래한 까닭이다. 우리가 이처럼 물 가까이에서 물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물의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은 우리 몸의 약 70%를 차지하는 주요 성분이다. 육체의 60%, 뇌의 70%, 혈액의 80%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태아 때에는 어머니 자궁 속 양수에서 인간의 꼴을 갖춰간다. 우리 몸에서 수분이 20%만 빠져나가도 목숨을 유지할 수 없다. 평균적으로 성인 한 사람의 몸 안에는 약 40리터의 물이 있다. 그만큼의 물을 하루에 다 채우려면 9분마다 물 1컵(250㎜)을 마셔야 한다. 평균 열두 살인 어린이에게 필요한 하루치 물의 양은 10컵 정도, 하루에 보는 평균적인 소변 양은 6컵, 하루에 흘리는 땀의 양은 3컵이라고 한다.
지구 표면의 70%도 물로 덮여 있다. 수십억 년 전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물의 형태는 세 가지다. 얼음, 물, 수증기가 그것이다. 전체 양은 13억 8500만㎦나 되지만 그중 약 97%가 마실 수 없는 바닷물이다. 담수는 3%에 불과한 셈인데, 그마저도 대부분은 빙하와 같은 얼음의 형태이다. 사람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물은 전체 담수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지구에 존재하는 전체 물의 0.007%만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다.
이처럼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원천이지만 지구촌 인구의 1/3은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도시와 공업 지대가 늘어나면서 물 사용량 증가와 함께 환경 파괴 및 수질 오염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기준 전 세계의 약 11%인 7억 4800만여 명이 깨끗한 마실 물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지금은 물 부족 사태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UN에서는 1인당 사용 가능한 수자원량이 1700㎥ 이상이면 ‘물 풍요 국가’, 1700㎥ 미만이면 ‘물 부족 국가’, 1000㎥ 미만은 ‘물 기근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453㎥에 불과해 ‘물 부족 국가’에 해당한다. 강수량도 장마철과 같이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편중돼 있어 계절적·지역적 물 부족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물을 물 쓰듯 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뜻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점은 물가였다.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 갠지스문명과 황하문명 등 인류의 4대 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물의 중요성을 잘 반증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이오니아학파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 동양의 상수학(象數學)에서는 물[水]을 숫자 가운데 1로 본다. 불[火]이 2에 해당하고 나무[木]가 3에 해당한다. 1은 제일 앞에 있는 숫자이니 모든 출발은 물이라는 이야기다. 그 때문인지 『도덕경(道德經)』에서 주장하는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사상의 핵심도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성인의 말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한자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라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최고의 선(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리라.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도 그 공을 다투지 않는다. 자신을 담는 그릇을 탓하지 않고, 제 모습을 그릇에다 맞춘다. 위를 탐하지 않고 항상 아래로만 낮은 자세로 흐른다. 모든 곳을 적시며 만물의 생성과 성장을 돕는다. 바위가 막아서면 비껴 흐르고, 그래도 막히면 멈췄다 차고 넘칠 때 흐름을 계속하며 억지로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연못이 되고 강이 되고, 먼지와 얼룩을 씻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며 모두가 바다에서 만나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는 것이 물이다. 이러한 물의 속성을 통해 볼 때, 이상적인 삶은 물 흐르듯 순리를 따르는 것이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돼 살면서 물의 지혜를 배우고 물의 덕을 본받을 때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노자의 철학은 옛시조 속에서도 발현되고 있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절로
두어라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절로
- 송시열, 『청구영언(진본)』 주해
‘저절로’라는 뜻을 가진 ‘절로’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며 독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음악성을 획득하고 있는 이 시조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글은 『청구영언』에 실려 전하는 것을 현대어 표기로만 바꾼 것이다. 『청구영언』에는 작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해동가요』에는 이 시조의 작자가 송시열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이 시조의 작자를 김인후(金麟厚, 1510~1560)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김인후의 문집인 『하서전집(河西全集) 속집(續集)』에 실려있는 「자연가(自然歌)」라는 한시 때문이다. ‘청산자연자연(靑山自然自然) 녹수자연자연(綠水自然自然) 산자연수자연(山自然水自然) 산수간아역자연(山水間我亦自然)’이라는 내용으로 볼 때, 「자연가」가 이 시조를 한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조 작품의 원문은 『청구영언』, 『가곡원류』, 『해동가요』, 『병와가곡집』 등에 실려 전하는데 시조집마다 표기와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종장의 감탄구 “두어라”를 “그중에”로 표기한다든지, 종장 끝부분에 “하리라”를 넣어 종결시키는 등의 표기가 그것이다.
이 시조에서 ‘절로’는 ‘제 스스로 타고난 자연 그대로’라는 의미다. 푸른 산도 저절로, 맑은 물도 저절로, 자연 속에서 나도 저절로, 저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저절로 한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순응적인 삶의 태도는 자연친화적 인생관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중장의 “산수간에 나도 절로 절로”는 자연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몸이니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자연사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이로써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라는 노자의 철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노자가 말한 자연이란 물리 세계의 자연이나 서양 철학의 자연주의가 아니다. 자연은 바로 자유자재하고, 스스로 그러하며,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정신의 독립이자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이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을 무위자연이라 표현한 것이다.
공자(孔子) 또한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고 했듯이 물은 도(道)의 상징적인 도구로 자주 쓰였다. 이런 점에서 물은 지혜와 유연한 처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삼국지’로 통용되는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불어났을 때 말은 자신의 힘을 믿고 물살을 거슬러가려다 힘이 빠져 죽지만, 소는 물살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다가 뭍으로 나가 목숨을 건진다는 이야기다. 이 또한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우화가 아니겠는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공정과 정의를 상징하는 ‘법(法)’이라는 한자도 ‘상선약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물(水)이 흘러가는(去) 것이 곧 법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법’은 헌법이나 형법, 민법 등의 규약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진리, 자연의 이치를 말함이다. 하지만 이는 근래에 와서 만들어진 글자라서 본래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法(법)의 원래 글자(정자)는 灋(법)이었다. 이 글자는 水+廌+去로 이루어진 회의문자이다. 가운데의 글자는 ‘해태 치(廌)’ 자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법 글자는 ‘해태에 의한 심판’, 즉 ‘규율’을 의미한다. 해태, 혹은 해치라고 부르는 ‘치’는 악을 물리치는 신성한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법’의 개념으로 쓰인 것 같다. 이 글자에서 廌(치)가 생략된 약자가 오늘날의 법(法)이다. 그런 점에서 옛날의 법이 공평을 위하여 시비곡직을 가려 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법은 물이 흘러가듯 공평하고 상식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현실도 그러할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나는 차마 몰랐습니다
- 박구하, 「헌법 제1조」 전문
박구하 시인은 「헌법 제1조」를 통해 국민들의 법 감정과 현실과의 괴리를 질타하고 있다. 사설 시조로 구조화된 초장과 중장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항과 ②항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헌법 제1조의 내용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헌법에 기초한다. 제1조의 내용 외에도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비롯하여 국회와 정부 등 국가 기관을 운영하는 기본 원칙, 선거 관리, 지방 자치, 국토와 국민에 관한 규정 등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국가가 나아갈 지향점을 밝혀놓은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헌법 제1조의 조항들을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아전인수 격으로 왜곡하거나 호도함으로써 유명무실해져 버린 현실에 있다. 민주(民主, Democracy)는 문자 그대로 국민이 국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의미이고, 공화국(共和國, Republic)이란 국가 권력을 모든 구성원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이란 국민이 국가 권력을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그 결과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권력자나 정치인들에게 있어 국민에 대한 배려나 관심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맹자(孟子)는 정치의 요체를 ‘민생’과 ‘도덕’이라 했고, 그중 더 중요한 것은 ‘민생’이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의중이 통치의 기준이 돼버렸다. 대통령의 독재적 권력을 견제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국회는 직무유기에 빠진 지 오래다. 협치가 사라지고 강행과 거부만 있는 대한민국 정치의 민낯은 시급한 민생 법안조차 폐기시키고 있다. 모든 것을 틀어쥔 제왕적인 권력 구조, 국민의 대변자가 되지 못하는 식물국회, 권력 실세의 눈치만 보고 있는 정부 관료들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민생을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 박구하 시인은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을 야기한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에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직접 인용하면서 대오각성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저항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Nekrasov, 1821~1878)는 자신의 시 「신문 열람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라며,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관심하면 할수록 우리는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거짓말에 발등을 찍히고서도 아픈 줄 모른다면, 결국에는 발등뿐만 아니라 다리 전체를 내줘야 할 것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상식이 거짓이 되어버린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전환적인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나목이 받들고 선 엄동의 하늘 한 장
이제는 가고 없는 젊은 시인의 혼을 보며
아무리 되새겨 봐도
풀리지 않는 벽이 있다
날선 끌로 파내던 그 가슴 한복판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언어는 살아서
무엇을 증거하려고
목숨 걸고 남겼을까
새벽을 여는 이의 홀로 밟는 아침 길에
한 조각 햇살 되라고 맑은 이슬로 맺히라고
시인은 선반 위에서
청동피리 불고 있다
- 하순희 「유작시집을 읽으며」
부조리와 불합리가 판을 치는 ‘병든 사회’와 불화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갈구하는 자가 시인이다. 거짓과 기만의 시대에 참과 바름을 혼불로 삼아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을 문학적 파토스와 에토스로 전환시키려 노력하는 자가 시인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세계는 물론이고 관습화되고 일상화되어서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포착하고 정서적 일렁임을 체현하려는 자가 시인이다. 시인의 인식론적 사유는 얽히고설킨 역사와 현실 속 질곡의 삶을 파헤치며 양지보다는 음지를 응시한다. 정신과 육체, 물질과 의식, 관념과 이미지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합일하는 과정을 통해 존재자의 인식세계를 형상화해 내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현실에 대해 명확한 시시비비의 잣대로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시인의 시는 웅혼하여 울림의 강도가 크다. 하순희 시인도 그런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다.
시인이 인식하는 시집 속의 시대적 상황은 추운 겨울이다. “나목이 받들고 선 엄동의 하늘”이라는 은유적 배경은 그래서 책의 “한 장”으로 귀결된다.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엄혹한 현실에 처해 있는 ‘젊은 시인’은 “이제는 가고 없”고 ‘시집’이라는 그의 “혼”만 남아 있다. 얼핏 이육사나 윤동주라는 이름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그렇다면 시인은 고통스런 언어로 목숨까지 걸어가며 무엇을 남기려 했을까? 여명의 새벽빛을 향해 걸어가는 선지자를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화자에게 ‘피리소리’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피리소리는 음률을 탄 시의 언어이지만, 그림 동화에 나오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그것처럼 순정한 세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힘이자 묵시록적인 예언이다. 그렇게 보면, ‘물이 흐르는 대로’라는 단순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우리나라와 사회가 바로 서서 나아갈 길이라는 생각을 유작시집을 남긴 시인도 했던 것 같다. 그가 바란 것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즉 상식과 공정과 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살아있는 현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임채성 ㅣ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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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