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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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ㅡ 의 안쪽
툭, 툭, 투드득. 굵은 빗방울 몇 개가 땅을 두드린다. 비릿한 냄새가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온다.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마른 흙이 젖으면서 공기 중에 퍼지는 냄새, 이 비릿한 냄새를 ‘페트리코’라고 부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1964년 호주 과학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 알게 되었다. 비의 이름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비 냄새에 이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코를 킁킁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그 비릿하면서도 이상한 냄새는 땅속에 있던 미생물들이 비와 흙, 이끼, 풀과 함께 섞이면서 풍기는 냄새였다. ‘페트리코’는 그리스어로 돌을 의미하는 ‘페트라’와 신화 속 신들이 흘린 피를 뜻하는 ‘이코’라는 말을 합친 말이라고도 한다. 돌이 피를 머금은 냄새? 그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니 또 그렇게 느껴진다. 아무튼 ‘페트리코’라는 단어를 안 순간 그 비릿하고 이상한 냄새가 내 코에 딱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뭐랄까. 그 냄새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했다. 생뚱맞게 풀잎을 닮은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페트리코, 페트리코, 페트리코. 부를수록 냄새는 사라지고 단어가 주는 질감만 남는다.
그런데 왜 비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는데 사물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 비와 태양, 눈은 사물이라는 말보다 대상이라는 말에 가까울지 모른다. 대상은 눈으로 바라보는 실체에 가깝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대상, 실체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우리가 사물과 비사물이라고 구분하는 것도 어쩌면 구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비는 대상으로서 사물의 얼굴을 갖는다. 그것이 영원히 우리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자연이라는 속성에 의해 생성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눈을 감으면 비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 촉감과 맛과 향과 질감까지 생생해진다.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비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월 말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때때로 마른장마가 땅을 바싹 말리기도 하지만 올해는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예보다. 비는 안의 시간이다. 바깥의 시간보다 안에서 바라보는 비를 좋아한다. 창문이 있으면 더 좋고 테이블 위에 작은 화분 하나 놓여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경이다. 커피가 됐든 막걸리가 됐든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 비는 어떤 것과도 잘 섞인다. 리듬은 기억의 디저트나 안주로 삼기 좋은 형태니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비라는 이름에 대해. 비는 어쩌면 누가 비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세상엔 간절한 목소리가 참 많으니까. 비는 그런 소리를 모아 우리에게 들려주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라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라고 말이다. 한숨은 폐 안의 나쁜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한숨을 쉰다고 타박을 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비의 한숨 소리를 듣는다. 한숨은 꽤 길었지만 그치고 나면 기분은 상쾌해진다.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긴다. 비의 끝에서 생겨나는 마음이다.
끝이라는 말에는 많은 감정들이 달라붙는다. 끝이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끝이 좋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끝을 견뎌낸 사람만이 새로운 시작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 끝이 참담하든 비참하든 억울하든 무너져내릴 것 같든지 간에. 비가 계속된다는 건 장마라는 말이고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새 우리의 감정과 기분은 날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꼴이다. 장마가 길어질수록 우울은 깊어지고 세상과 단절된 시간을 살기도 한다. 적당히에서 멀어지면 집착을 낳고 누군가는 벗어나고 싶어서 ‘끝’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것이다. 그것이 가난이든 사랑이든 삶이든.
어릴 땐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 감상적인 분위기를 느끼려고 기다린 건 아니다. 비가 오면 밭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일을 안 해도 됐으니까. 그 시절 우리 또래들이 비슷한 생활을 했겠지만 주중에는 학교 갔다 오면 집안일을 해야 했고, 주말엔 늘 밭에 나가야 했다. 탈출구가 없는 도돌이표였다. 여름 땡볕에 앉아 잡초를 뽑고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엄청 바쁠 때는 학교도 못 가고 밭에 간 적도 있었다. 입이 펠리컨만큼 튀어나왔을 거다. 그러니 주말마다 비가 오라고 고사를 지낼밖에.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지 비가 내릴 때면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뻤다. 쪼그라들었던 등이 펴지고 다리도 쭉 펴지는 것 같았다. 뒤란에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양하잎에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는 빗방울.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에 취하던 시간. 그런 빗방울 소리와 닮은 부침개가 마루에서 타닥타닥 부쳐지기도 했다. 그때는 식용유가 아닌 직접 기른 유채나 동백으로 짠 유채기름이나 동백기름에 메밀가루를 넣고 부쳤다. 탁, 탁 튀어오르는 안과 밖의 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사소함이 그땐 내 기쁨의 전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서쪽 공기는 다른 곳보다 많이 습했다. 장마철이면 벽마다 곰팡이들이 생기고 눅눅한 이불을 덮고 불면을 견뎌야 했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의 ‘끝’은 어디일까.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눅눅하고 꿉꿉한 이불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참혹함은 결국 나를 빗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내 나이 열일곱 살, 나는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섣불리 빗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마음을 다친 날들도 많았다. 분명 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안타까워서 도와준 일이 이상하게 꼬여 멀어져 버린 관계. 제삼자에서 아예 남이 되어버리는 일들도 있었다. 어정쩡하게 끼어버린 나는 그 둘에게서 내동댕이치고 당사자들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낸다. 어떤 싸움이든 제삼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다. 나한테 와서 실컷 퍼부으면서 실토를 할 땐 언제고 막상 화해를 시키려던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다 지난 일이지만 비는 그런 것들을 불러내 가라앉았던 마음을 붕 띄워놓기도 한다. 한참 동안 명치에 쌓였던 앙금이 비에 섞여 내렸다. 안이 밖으로 뛰쳐나간 순간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느 날부터 비 오는 날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이 달라졌다는 말일 수도 있다. 가끔 내리는 비는 단비처럼 촉촉하지만 사나흘 내리 비는 눅진하고 우울하다. 우울한 기분이 마치 비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리고 이상하게 밖에 세워둔 내 차를 걱정하게 되었다. 고급 승용차도 아니고 그저 이동 수단일 뿐인 낡고 허름한 그 차가 비에 젖는 게 자꾸 맘에 걸렸다. 단순히 기계뿐인 그 사물이 혼자 비를 맞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아팠다. 마치 내가 비를 맞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물건이나 오래 함께한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 때문일까. 한 번 마음에 품은 건 쉽게 버리지 못한다. 한번 시작한 일이나 취미(?)도 잘 놓지 못한다. 한번 나에게 온 사람은 쉽게 내치지 못하는 것처럼. 나에겐 그런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물론 시도 그중 하나다. 아니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존재이기도 하다. 비와 시.
시는 비의 안쪽을 닮아 있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순간. 무아의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끈적한 기운이 몰려와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거리지 않는다. 잠시 내가 내가 아닌 순간으로 사는 일. 비는 보이지 않고 비라는 의식만 남아 응시하게 되는 곳. 영혼만이 지배하는 세계.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환(幻)을 부르는 곳. 비는 안과 밖의 세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안개를 불러와 경계를 허물고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다. 비의 본질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니까. 어쩌면 시조차도 나조차도.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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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