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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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선 

 

    

 

 

 

태양

ㅡ 다가옴과 밀쳐냄

 

 

        

 

 

 뜨겁다는 건 뭘까? 여름과 봄 사이를 오가다 마침내 하나의 계절로 굳혀지는 날씨. 시나브로 끈적함이 스며들어 목덜미로 물기가 흘러내릴 때 비로소 느끼는 날씨라는 온도. 태양의 계절 여름이다. 우리는 그런 온도를 수없이 지나왔고 지금도 온도에 의지해 살아간다. 삶에서 첫, 온도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태어나면서 처음 밖이라는 온도와 마주쳤을 때, ‘으앙’ 하며 울음을 터트렸을 때 어떤 공기가 우리 몸 안으로 흘러들었을까. 뜨거움일까 차가움일까 불안일까. 살면서 내면에 어떤 기운이 흘러들어 온도를 느낀 때는 떨림이라는 미세한 경련을 경험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사랑이라는 떨림, 성취의 떨림. 어느 순간 육체로 스며들어 심장에 매달아 놓은 추가 내부의 압력을 받으며 움직인다. 불에 덴 듯 뜨겁게 달궈진 온도는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서사를 흩뿌린다. 서사는 심장에 매단 추의 곡선으로 휘어졌다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경쾌하던 추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면서 맥박은 희미해진다. 떨림의 추는 비로소 무덤덤이라는 봉분에 안착한다. 의식의 흐름을 좇아 무덤덤에서 무덤을 만나게 된다. 한 글자만 빼면 다를 게 없는 단어. 무덤덤이 길어지면 사랑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간다. 어쩌면 무덤덤은 무덤으로 옮겨가기 위한 간이역인지도 모른다. 몇 사람 올라타지 않아도 끝까지 올라타는 사람이 있어 멈추지 못하는. 죽음이 죽음을 만나 소멸하는 시간. 간이역이 폐역이 되어 스스로 무덤이 될 때까지.

 영원한 소멸은 가능할까. 제주의 오름이나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무덤 옆을 지나치게 된다. 기괴하다거나 을씨년스럽다기보다는 이 세계에 함께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느낌이 든다. 울울창창한 나무들과 대화를 하거나 또 때로는 바다를 지나온 해풍을 즐기기도 하면서 그곳이 자신의 거처인 듯하다. 우리가 가끔 의지와 상관없는 우연을 만나 운명을 믿는 일처럼. 처음 무덤을 발견한 사람은 흠칫 놀라며 발을 멈칫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내 익숙해진다. 한두 개가 아닌 데다 평범한 듯 무심한 모양새다. 돌담으로 둘러놓은 곳도 있지만 평지에 자연스럽게 봉분을 만들어 놓은 곳도 많다. 자주 가다 보면 무덤은 어느새 길과 동의어가 된다.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은 단지 길이라는 서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무덤덤과 무덤은 흔들림이 없는 상태다. 태양이 아무리 내리쬐어도 꿈쩍하지 않고 견딘다. 옷을 벗어 던지지도 않고 물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거기 고요히 머문다. 하지만 무덤덤과 무덤으로 가기 전까지 우리는 태양의 변덕을 견뎌야 한다. 뜨겁다는 말은 깜깜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우주 암흑기에서 태양이 탄생했다는 말이다. 행성이 탄생하기까지 우주는 암흑기였고, 대기를 떠다니는 여러 물질로 인해 우주망이 형성되었다. 이 우주망은 다른 물질과 결합하고 새로운 반응이 나타나면서 별이 탄생했다. 그 별들이 핵융합을 하면서 탄생한 또 하나의 별이 바로 태양이다. 그러니까 태양은 아주 거대한 별이다. 우리는 태양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너무 크고 환해서 눈을 멀게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래 바라볼수록 눈은 밝음에서 멀어진 캄캄함이 깃든다. 캄캄함이 깃들기 전까지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하는 것. 어둠은 무시하고 밝음만 보려는 것이 사랑이다. 그 뒤에 올 캄캄함 따위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밝음은 집착을 부른다. 너무 환한 나머지 벗어날 수 없는 중독의 단계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노예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뜨거움에 데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발목까지 뜨거운 불 속에 넣어버리고 마는 시간. 집착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열정 없이 이타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한번 데인 후에야 뜨거움을 멀리하는 것처럼 발을 빼기에 너무 늦어버렸을 때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느낀다. 예감을 몰고 오는 바람이다. 태양을 집어삼킨 바람이다. 흑점만 남긴. 하지만 흑점은 멀었던 눈을 되돌려놓는다. 열정을 서서히 가라앉혀 붕 떴던 몸을 바닥에 착지시킨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돌아온 자리는 그때의 자리가 아니다. 태양과 흑점을 동시에 지닌 새로운 얼굴, 반짝이는 별이다.

 그러고 나서 양파를 썬다. 양파 장아찌를 담는다. 매운 양파는 저절로 눈물을 생성하고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햇양파일수록 맛있게 맵다. 맹렬한 태양의 가장자리가 피운 열매다. 간장에 설탕과 식초, 매실청을 넣어 달인다. 거기에 유자청도 조금 넣어 달이다가 건져낸다. 간장 달인 물에 양파, 고추, 당귀, 방풍 이파리를 몇 개 섞어서 담아주면 향긋한 양파 장아찌가 완성된다. 양파 장아찌는 하루 정도 실온에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는다. 오래 먹고 싶을 땐 간장을 냄비에 다시 부어 달인 후에 재료를 넣어준다. 양파 장아찌를 담그는 일은 폭풍처럼 휩쓸고 간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응축된 시간을 부어주는 일이다. 다양한 감정이 섞여 하나의 맛으로 어우러지는 조화로움. 태양이 한바탕 부려놓은 뜨거움은 서서히 병 속에서 익어가며 깊은 맛을 우려낸다. 양파 장아찌가 익는 색은 시간이다. 시간으로 치환된 색이다. 우리가 먹는 건 태양을 식힌 또 하나의 태양이다.

 태양은 욕망과 연결된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카로스의 태양 말이다. 하지만 1560년경 벨기에의 화가 브뢰헬이 그린 이카로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이카로스와 날개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조연 중에서도 이름도 불리지 않는 1, 2, 3에 들어간다. 바다에 빠지는 이카로스와 날개는 단지 하나의 배경에 불과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 그림에 제목이 없었다면, 그대로 묻힐 이카로스다. 그림의 주인공은 하루하루 생을 이어가는 서민들이다.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양을 돌보고, 어부는 바다를 향해 그물을 던진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부지런히 자신의 몫을 해내는 인간들의 일상. 그러나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이카로스는 바다에 반쯤 빠진 채 다리만 허우적거린다. 아무도 신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신만 바라보던 시절은 지났다. 신을 숭배했으나 현실은 전쟁과 가난으로 허덕였다. 기도의 절실함은 기도로 끝이 났다. 인간이 저지른 일은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신의 잘못으로 돌리지는 않았지만 신을 향해 입을 닫았다. 인간의 숙명은 하루하루 자신의 몫을 해내야만 삶의 바퀴가 굴러간다는 것이다. 태양이 신적인 존재에서 자연적인 존재로 돌아서기까지 수많은 피의 혈투와 희생이 있었다. 시간은 인간의 사고와 함께 흐른다. 신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과학으로 점점 사고방식이 바뀐다. 여전히 뒤섞여 굴러가는 하나의 바퀴이긴 하지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인가 사람인가.

 태양이 인간과 접촉하는 방식 혹은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은 다가옴이다. 어떤 다가옴은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지만 또 어떤 다가옴은 밀어내게 한다. 끌림과 밀어냄은 온도의 차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에너지의 질량과 방향의 영향을 받는다. 그 힘의 방향에 따라 태양이 움직인다. 태양이 빛을 쏟아낸 자리에 싹이 움트고 키가 자란 나무는 붉음을 뱉어낸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끌리게 하고 다가가게 하고 포옹하게 만드는 힘. 우리는 그런 빛에 이끌려 열정을 만들어내고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운다. 그러니 우리는 무덤덤이 무덤으로 가기 전에 그 빛이라는 열차에 올라타야 한다. 태양이 이끄는 곳으로 맹렬히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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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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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