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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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공시사 월평
세 번째 걸음. 접촉
● 박동억
— 마음에 관한 한 헤맨다는 것은 가장 정확한 언어이다.
왜 사람은 공감받기를 원하는 것일까. 매일 사람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데도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에 함께 놓인 동시에 따로 놓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을 나누고 음식을 나눌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은 쉽게 나눌 수 없다. 당신의 몸은 나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고, 당신의 마음은 내 생각과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평생 가진 것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마음을 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은 건네지지 않는다. 마음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이자처럼 불어날 뿐이다. 마음을 받아줄 상대도 세계도 결국 나의 마음을 ‘나처럼’ 느낄 수 없는 타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을 건넨다는 것이 곧 타인과 가까워진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이 차이를 우리는 정확히 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한 소통도 없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도 자신의 마음이라는 밀실에 놓인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그의 생각을 타인에게 완벽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대화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대화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타인처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타인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 때로 열렬히 대화하려 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방황해보았던 사람이 타인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길을 잃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자국을 들여다보고, 그 무게를 가늠하는 일에 가깝다.
한편으로 이것은 시가 어려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는 단숨에 타인에게 전달되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는 서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합의된 것이지만, 그러한 언어만으로 나의 마음을 ‘나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인은 제 마음의 논리대로 언어를 재구성하고 제 마음의 미로를 향해 독자를 인도한다. 마음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시인의 언어는 낯설어진다. 시인이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그가 자신의 마음대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마음 안에서 독자는 헤맬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헤매는 자의 뒷모습을 엿본다는 의미에 가깝다.
마음에 관한 한 헤맨다는 것은 가장 정확한 언어이다. 마음이 괴로울 때 우리는 산책하기도 한다. 먼 곳으로 여행을 훌쩍 떠나버리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방황이라고 표현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헤매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명확한 의미나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음은 거리를 헤맬수록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충분히 헤매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의 헤맴을 방황이라고 부르는 대신 순례나 모험이라는 단어를 혀끝으로 굴려본다.
— 우리 마음속에 억압된 것, 금기시된 깊은 욕망은
접촉이다. 세상과 ‘마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은 사실 세상이 사람을 끌어안아주기를,
부모처럼 우리를 ‘감싸주기를’ 바란다.
마음은 전해질 수 없다. 이는 흔히 ‘말하고-듣는다’ 혹은 ‘공감하다-공감받다’라는 표현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에게 공감을 곧 마음을 주고받는 이미지로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의 공감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일까.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 1923~1999)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싸고-감싸지는’ 관계를 욕망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직업을 얻으며 세계를 탐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를 보듬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감싸고-감싸지는’ 이미지는 부모의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이자 엄마의 뱃속에 감싸인 태아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열망하는 것은 타인이나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보듬어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디디에 앙지외는 우리가 열망하는 자아의 근원적인 형태를 ‘피부자아’(Moi-peau)라고 부른다. 여느 정신분석학자들처럼 디디에 앙지외는 어린 시절의 체험이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이때 인간 정신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했던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는 인간의 신체 감각을 주목했다. 특히 그는 사람과 교제할 때 사람의 피부 접촉의 한계와 그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욕망에 대해 탐구한다.
앙지외는 적어도 피부를 통한 경험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우선 피부는 주머니다. 기본적으로 피부는 ‘나’를 담고 있는 주머니일뿐더러 그 안에 무엇인가를 먹고 소화하는 내장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피부는 경계다. 우리는 피부를 기준으로 삼아 ‘나’와 다른 존재들을 구분할 수 있다. 한편 피부는 통로이기도 하다.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순간에 우리는 타인과 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린아이는 이 세 가지 체험을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 아이는 함부로 삼키고, 함부로 쥐며, 함부로 끌어안는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접촉의 욕구를 억누르고, 신중하게 멀리서 보도록 만드는 규칙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어른이 되면서 우리의 촉각적 욕망은 자연스럽게 시각적 욕망으로 대체되어간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억압된 것, 금기시된 깊은 욕망은 접촉이다. 세상과 ‘마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은 사실 세상이 사람을 끌어안아 주기를, 부모처럼 우리를 ‘감싸주기를’ 바란다. 예컨대 사람의 독특한 욕망 중 하나는 그림의 사본을 감상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원본을 소유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심지어 발터 벤야민이라는 한 철학자는 단 하나의 예술 작품에는 대체할 수 없는 ‘아우라’(Aura)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우라란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믿음, 세상에 유일무이한 접촉이 ‘존재해야 한다는’ 열망을 표현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나’로서, 나를 간직하고 세상과
접촉하게 해주는 내 존재의 한계로서 피부가 있다.
따라서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엇인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때 닿는다는 것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싸진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 그곳에 머무르고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타인과의 접촉은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불쾌감을 느끼게 할 위험을 무릅쓰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접촉을 바란다. 친한 사람들과의 ‘부드러운’ 접촉으로, 더 나아가 세상이 존재하는지 알 필요도 없었던 태아의 시기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한편으로 이보다 더 원초적인 은둔은 자기 피부로 숨는 것이다. 요컨대 주먹을 쥐거나 몸을 움직일 때 자신의 피부가 맞닿는 그 주름 속에도 사람은 숨을 수 있다.
날이 흐려
외출 준비를 하다 생각에 잠긴다
우산에 관해 말하자면 우선 손가락이 필요하다
손가락을 차례로 접으며 결국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
상대는 자주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주먹을 높이 들고 걸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우산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주먹을 쥐었다 펴며 나는
가질 수 있는 것과 놓아야 하는 것을 배웠다
머리카락을 만지며 비를 생각한다 네 머리카락은 장마와 함께 찾아왔구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지나간 뒤에도 손가락에 남는 것은. 비는 종일 내리고, 그 뒤에 남은 것들을 생각한다 비는 계속 오는데 당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처럼 길고 가는 것들이 밖에 가득한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은 무엇으로 가득한 것인가
무엇을 위해 텅 비어 있는 것인가
나는 걸어가며 빗속에 틈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산 아래 있는 사람과
우산 밖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주먹을 펴기 전까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듯이, 당신 우산 안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당신은 아직 이별에 실패한 사람 울음에 특화된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 보이지 않아 함부로 우는 사람 보이지 않아, 볼 수 없는 사람
나는 우산을 쓰고 광장을 걸었다
비는 어둠에 녹지 않으면서
비는 어둠을 분해하며 내린다
광장은 아름다웠지만,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지 모른다
외출에서 돌아와
방 안에
우산을 펼쳐놓았다
우산은 한 손으로 쥘 수 있다
우산은 곧 활짝 피어날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그 안으로 허기와 사랑과 치욕과 혁명이 모여들어,
비는 곧 그칠 듯하지만,
오늘 비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이동욱, 「비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전문(《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3월호)
이동욱 시인의 시는 우리가 오직 ‘나’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의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비가 내리는 거리를 향해 외출하는 자의 의식을 차분히 그려낸다. 이때 ‘나’는 바깥으로 나서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는 우산에 관심을 두고 있고, 실은 우산보다 우산을 쥐는 자기 손가락을 들여다보고 있다. 심지어 그는 “손가락을 차례로 접으며 결국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이 있다고 쓴다. 그에게 마음은 손가락을 쥐는 순간에 가지런히 모여드는 듯하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주먹을 쥐었다 펴거나 사물을 쥐거나 펼치는 감각에 주목하고 있다.
실은 피부의 접힘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사람은 ‘나’의 존재를 어떻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목을 움직이거나 팔꿈치를 구부리거나 무릎을 굽힐 때, 사람의 피부는 자신에게 닿는다. 두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기 이전에 사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존재가 ‘있다고’ 항상 확신하게 만든다. 만약 그러한 자기 접촉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사라진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이 때문에 현상학자 와시다 기요카즈는 “피부가 스스로 겹쳐지고 접혀 있는 곳, 그곳에서 ‘영혼’이 탄생한다”라고 쓰기도 한다.1)
그런데 본래 그러한 주름의 감각은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이동욱 시인의 시는 자꾸만 주름의 감각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우산을 펼칠 때 자기 손가락의 주름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광장에서 자신의 몸을 움직일 때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몸을 의식조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동욱 시인은 자꾸만 손가락의 주름을 의식하게 만들고, 바로 거기서 “하나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로써 그는 자기 걸음을 의식하는 자의 걸음새처럼, 자기 존재를 어색하게 의식하려 한다. 이를 통해 그가 행하려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고 있다. “가질 수 있는 것과 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모든 사람이 각자 답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동욱 시인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는 “허기와 사랑과 치욕과 혁명이 모여들어” 있다고, 즉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순간을 소중히 손안에 간직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우리가 그의 시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순간에 사람이 어디에 ‘닿는가’라는 문제이다. 성찰이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성찰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존재의 주름에 닿는다.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나’로서, 나를 간직하고 세상과 접촉하게 해주는 내 존재의 한계로서 피부가 있다.
ㅡ 그의 시는 자신의 피부를 잊고
타인의 피부만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집을 봐드립니다
허름한 집
식물이 많은 집
길게 살지 않는 집
내가 살려는 것도 있어서예요
이 집의 미래를 봐드립니다
어쩌면 삐걱거리거나 어차피 절룩절룩할지도 모를 집
고양이가 지킬 빈집
고요히 먼지가 내려앉을 집
물기가 사라지고 건조함마저도 부서져 없어질 집
집을 지키려는 흉내를 내려는 것이 아니라
집의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아우성치고 울부짖는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을 냉장고에서 찾아내
걸식을 하려는 나는 어떤가요
집을 안고 있으면 온기로 집은 깡통처럼 금세 덥혀질 겁니다
집은 누군가에 의해 이해받아야만 해요
누구나 집에 들어갈 땐 똑같은 생각을 해요
집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있음에도 찾을 수 없음에 관하여서도
인터뷰하는 일이 저의 일이 될 것입니다
열쇠를 하나 만들어 주세요
중요한 장소로서 매력을 지키는 일을 고민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빛이니까요
- 이병률, 「남쪽으로 가는 기차」 전문(《문학사상》, 2023년 3월호)
접촉의 언어에는 난해한 관념이 필요 없다. 다만 충분히 신중해야 하고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손짓이 중요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병률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그의 시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그가 타인과 사물을 대하는 사려 깊은 손짓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무는 집조차도 시인은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허름한 집”의 내부조차 시인에게는 피부이다. 예컨대 ‘삐걱거리는’ 집이 곧 그에게는 ‘절룩절룩하는’ 사람 같다. 시인은 그러한 “집의 일부”가 되어 ‘온기’를 나누며 ‘이해하려’ 한다. 여기서 마치 집을 사람처럼 대하는 따스한 문법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집에 대해 ‘저’라는 낮춤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 자체가 탁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은 사람처럼 논쟁하거나 갈등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쉽게 “인터뷰”할 수 있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병률 시인의 시를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시적 탁월함이 자기 몰입에서 탄생하는 데 반해, 그의 ‘따스한 문법’은 타인의 입장을 심려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의 시는 자신의 피부를 잊고 타인의 피부만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이 작품에서 고려되는 것은 오직 집의 존재 방식이다. 대신 이 시에는 집을 만지고 사용하는 ‘나의 피부’, 예컨대 삐걱거리는 집을 거닐 때 나의 발이 느끼는 위험이나 건조한 집안을 거닐 때 나의 피부가 느끼는 불편함이 배제되어있다. 간단히 말해 이병률 시인의 시는 타자의 입장에서 쓴다. 이 때문에 그의 언어는 쉽다. 다른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지점에서 언어를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적 문법으로서는 드문 것이기도 하다.
시인의 마지막 시구들을 빌린다면, 이병률 시인의 시는 “중요한 장소로서 매력을 지키는 일”,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불빛’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결국 어떤 공동의 지향점을 만들어낸다는 과제를 그는 의식한다. 따라서 타인의 피부에 대하여, 그의 시는 사려 깊고 신중한 손짓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신중하게 사랑한다. 그의 시는 때론 서로 상처 입히는 것까지 감수하는 치열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나란히 바라볼 수 있는 목적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제안하는 셈이다. 저곳으로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어떤 의미로 그의 시는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람다움을 표현하는 듯하다.
— 다만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접촉하고 있다는
이 간명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다만 살아낼 뿐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좀 더 지극하게 살아내려 한다.
그는 완성하지 못한 소설의 마지막 장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처럼 발밑까지 낯설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풀은 다시 자라나 그의 검은 발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슬픔의 소녀들은 화관을 쓰고선 바람에 흔들리는 종처럼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있었다.
그의 소설은 이 ‘있다’와 ‘있었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멈춰서 있다. 그는 몇 번이고 이 대목을 읽으며 자신의 발을 간지럽혀본다. 왜 풀은 다시 자라난 것인가. 절벽에서 떨어진 피처럼 붉은 그 화관은, 고대 동굴 속 그림처럼 흐릿하기만 한 이 소녀들은 왜 있는가. 있었던가. 하지만 그는 언제나 여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쓰던 소설을 덮고 그는 집 바깥으로 나왔다. 봄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새들은 부러진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선 흰 불꽃 모양의 나무 위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새에게 집을 지으라고 명령한 것은 누구일까. 물이 흔들리며 둥글고 투명한 말을 건네듯, 그토록 부드러운 명령이라니. 그는 조심스레 발밑의 풀을 한 움큼 뜯었다. 풀이 끊어지는 소리와 감촉이 손끝으로 번져왔다. 이렇게나 부드러운 명령이라니. 이렇게나 낮고 고요한 둥근 서사의 세계라니. 그는 생각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의 첫 문장을.
그는 새가 사라져간 나무 위로 하얗게 빛나는 두 다리를 보았다.
당신을 쓰고 싶었습니다. 바람이, 봄이 두 다리를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가 올라가는 만큼, 하얗게 빛나는 두 다리도 나무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있다, 저기 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이미 손톱은 뒤집혀 있었고, 붉고 굵은 피가 그의 팔꿈치에 둥글게 맺혀 종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에 그 다리가 닿으려는 순간, 그의 육신 어딘가에서, 풀이 끊어지는 소리와 감촉이 번져왔다. 그렇게 그는 나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몸은 움푹 패어 있었고, 그 속에서 연한 풀잎들이 자라나 있었다. 흔들리고 있다. 손을 뻗어 그 풀들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웠다. 자목련 꽃잎이 다독거리는 슬픔의 손처럼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 김안, 「죽음은 집의 기록」 전문」(《한국문학》 2023년 상반기호)
서사시의 문체로 기록한 위 작품에는 소설을 쓰는 한 화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화자가 던지는 질문들이나 그가 어째서 소설을 쓰고 있는지, 또한 그가 어째서 “슬픔의 소녀들”이나 “절벽에서 떨어진 피처럼 붉은 그 화관”과 같은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해석의 실마리가 드러나는 것은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이다. 즉 “당신을 쓰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쓴다.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이 곧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애도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추측하게 된다. 그러한 추측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은 시적 화자의 투신으로 끝맺는다는 점이다. 그가 나무 아래로 자신을 내던져 의식을 잃었다가 풀잎과 자목련 꽃잎 속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마무리된다.
왜 이 작품은 서사시의 문체로 쓰인 것일까. 슬픔은 단번에 기록하기에는 너무나도 아픈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슬픔이라고 쓰는 대신 “슬픔의 소녀”라는 이미지로 기록할 수밖에 없고, “절벽에서 떨어진 피처럼 붉은 그 화관은, 고대 동굴 속 그림처럼 흐릿하기만 한 이 소녀들은 왜 있는가. 있었던가.”라고 머뭇거리며 반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 작품이 슬픔에 줄곧 아름다운 색채를 더한다는 점이다. 슬픔에서 투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의 발을 간질이고 쓰다듬는 ‘풀’의 몸짓이 있다. 풀은 그에게 “부드러운 명령”이자 “낮고 고요한 둥근 서사의 세계”로 읽힌다. 저편의 당신을 만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할 때, 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발밑에서 당신을 쓰다듬고 기다리며 받아줄 뿐이다.
나는 저편의 당신에게 닿고 싶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이 시의 진정한 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나 시적 언어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우선 김안 시인이 표현한 것은 죽음을 넘어서려는 접촉의 열망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진정한 주제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그의 각오가 아니라 그를 감싸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닿을 수 없는 저편의 당신과 별개로, 언제나 그를 보듬어주는 ‘풀’의 풍경이 있다. 그가 결국 당신에게 도달하는 데 실패했을지라도 그를 다독이는 ‘자목련 꽃잎’의 손길이 있다. 결국 이 시의 주제는 애도하는 자의 슬픔을 돌보는 것, 요컨대 애도를 애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향해 사무칠 때, 그 마음을 받아주는 곁이 있다. 그것의 진위와 무관하게, ‘있다’라고 쓰기 위해 이 시는 나아간다. 언제나 당신의 마음을 받아줄 풀빛 바닥이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대부분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접촉에 대한 욕망이다. 그것이 자기 존재에 대한 것이든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든 세상을 향한 것이든, 심지어 그것이 사실이든 헛것이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무엇인가를 만지고-만져지는 관계 없이는 나는 나를 홀로 견딜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감추고 있는 감싸고-감싸지는 관계를 파악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시인은 자기 육체의 접힘을 읽어내고, 어떤 시인은 자신과 타자의 피부를 맞대며, 어떤 시인은 사람의 피부로 도달할 수 없는 저편을 바라본다. 이때 근원적으로 ‘만진다’라는 욕망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접촉하고 있다는 이 간명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다만 살아낼 뿐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좀 더 지극하게 살아내려 한다. 좀 더 사람의 마음에 기대어 기록하려 한다.
1) 와시다 기요카즈, 김경원 역, 『사람의 현상학』, 문학동네, 2013, 80쪽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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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