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tra Form Output
저자 신재창 

  

 

 

 

시, 나의 아날로그를 위하여

 

 

 

 

 

  성탄 예배를 드렸다. 예배 전 찬송을 부르는데 농아인석에 수어 통역을 하는 분의 손짓을 보다 가슴이 찡했다. “엎드려 절하세”라는 가사를 표현하는데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몸짓이 간절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평소에는 주의 깊게 들여다본 적이 없어 잘 몰랐다. 몇 단어를 표현하기 위해 손과 팔과 얼굴 근육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말’ 없이 말을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 듯 했다. 흥미로운 것은 말(소리)을 사용하지 않는 의사 전달이 오히려 깊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표정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고 있어서 표정만 봐도 대략 어떤 감정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의사소통을 위한 표현 중 말이 가장 편한 수단이지만 거꾸로 얼마나 진심을 담을 수 있는지, 돌아보는 지점이었다. 노래도 그렇다. 나는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표정을 더 주의 깊게 보는 편인데, 그중 큰 감동을 느끼는 때는 진심을 다해 자신의 노래에 몰입해 부르는 장면에서다.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도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표정은 어떻게든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수의 열창하는 표정과, 심사위원이나 청중의 몰입하는 표정을 반드시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시는 참 고독하다. 말도 몸짓도 표정도 보여줄 수 없이 오로지 글로써 승부를 걸어야 하니 외롭고 외로운 길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길어낸 한 알의 진주는 별처럼 오래 남는다. 정말로 오래오래.

  두어 주 전 ‘시조튜브’ 송년회에 초대되어 갔다. 여러 시인이 모여 시만 낭독했는데 오랜만에 정말 좋은 자리였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모인 분들이 모두 시를 한 편씩 읽기만 했을 뿐인데 이상한 감동이 몰려왔다. 이벤트가 없으면 안 되는 세상에 아무런 이벤트 없이 30여 명의 시인들 시 낭독회 끄트머리에 내 시노래 순서가 있었다. 너무 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기우였다는 것을 두어 편 시 낭독 만에 깨달았다. 특별함을 위한 이벤트가 얼마나 우리 개개인의 특별함을 잊어버리게 만드는지를 오히려 생각하게 됐다. 조용하게 한 편 한 편 읽어나갈수록 목소리의 울림과 그 공간의 공명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들 호흡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말이 달랐지만 말로 읊어지는 시의 생동감과 순간의 울렁임은 아는 시도 새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차츰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시를 통해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사람살이에 대한 것이란 것을. 우리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그렇게 좋았던 것처럼 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리운 것이고, 시 속에서 그 냄새를 맡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만의 기술과 수사로 무장한 시들과 그에 열광하는 이런 시대에 삶 냄새 사람 냄새 가득한 시를 만나고 싶다는 것,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나를 숨 쉬게 하는 아날로그는 바로 사람인 나를 울게하는 시라는 것을 말이다.

  

   빵집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 집 빵 사 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 하는 아이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쓴 아이를 떠올리며

    

  만나보지 못한 시인이지만 행여 만나게 되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싶다. 이 한 편의 시 때문에. 아이의 삐뚤빼뚤 글씨 속에 담긴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자세를 바로 고친다니 뭔가 은근히 고맙고 그 마음을 배우고 싶다. 이런 시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이 실은 고마운 일이다.

 

   풍경을 닦다가

                 오성일

 

   반지하방 창문으로 보면

   아침마다 낡은 구두 신고 돈 벌러 가는

   중년의 뭉툭한 발목 빼꼼히 보이고

   살 부러진 세발자전거 바퀴가 혼자

   민들레와 한나절 뱅뱅 노는 것 보이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새벽에 딸깍대며 돌아오는

   옥탑방 처녀 에나멜 구두 보이고

   꽃 지는 밤 담벼락에 기댄 채

   가난한 입술 부비며 붙어 있는

   다리 네 개 보이고

   철지난 털신 신고 폐지 줍는 노인네의

   빵꾸난 리어카 바퀴도 보이고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지만

   안 봐도 누군지 다 알 것 같고

   하늘은 안 보이지만

   하늘 밑 사람의 일들 대략은 알 것 같고

   나만 아는 발목 근처의 세상사를

   곰팡이 약으로 닦아내다가

   설핏 눈물이 날 것도 같고

 

  이 시를 읽다보면 마지막 구절 즈음에 내 눈에도 설핏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런 맛에 시를 읽는다. 사실 처음 연재를 부탁받고 시와 노래의 상관 관계에 대해 작곡가의 시선으로 어떻게 시가 노래가 되는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했고 그런 기조로 글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노래를 작곡하는지 자로 재듯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감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온다. 그럴 때면, 박용래 시인이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손이 떨려 펜을 못 잡고 딸아이에게 불러주고 써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나도 뭔가 영감이 떠오를 때면 곧바로 녹음부터 한다. 행여 잊어버릴까봐 순간의 기록을 해두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불러보며 그 멜로디를 이어 나간다. 전후좌우 맥락을 맞추고 다듬은 뒤에 노래의 형상이 갖춰지면 다시 녹음을 하고, 맨 마지막에 악보를 그린다. 그래서 내 악보는 항상 깨끗하다. 마지막에 그려지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도 나중에 불러보면 또 수정할 부분이 생긴다. 어느 시든 노래로 부를 때는 입에 ‘걸리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김포행 막차」의 경우도 2절의 원문은 “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인데, “그대”와 “진정”의 앞뒤를 바꾸어 노래했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면서 멜로디가 높은음 도에서 파로 도약하는데 “그대”라는 단어는 닫힌 소리가 나기 때문에 시원하게 들리질 않는 까닭이다. 고음을 낼 때에 첫 소절이 시원하게 들리지 않으면 뒤에 나는 음들도 제대로 따라오기 쉽지 않다. 그래서 앞뒤를 바꾸어 “진정 그대 사람이 그리웁거든”이라고 노래하니 훨씬 자연스럽게 들리면서 소리도 시원하게 나왔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예들이 노래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가령,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들어본다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쏟아지는 “사랑했지만” 의 파워는 다른 어떤 말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사랑했어도, 사랑했기에, 사랑했는데, 사랑했었네, 사랑했었지 등등 어떤 동음이의어를 넣는다고 해도 ‘지만’이 가지는 폭발력에 비할 수 없다. 과장하자면 그 노래는 ‘지만’으로 명곡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노래로 김광석은 ‘김광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작곡자 한동준은 또 하나의 히트곡을 얻은 셈이다. 〈너를 사랑해〉 〈사랑의 서약〉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등 히트곡이 많지만, 이 노래가 가장 큰 저작권 수입을 준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다. 나도 그렇지만 작곡을 하는 모든 이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가사와 노래의 합을 맞추는 일일 것이다. 멜로디와 가사의 흐름도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발성도 억지스럽지 않아야 한다. 웅변에도 랩에도 흐름과 라임이 있고, 팝도 가요도 가곡도 뮤지컬도 오페라도 모든 소리로 내는 예술에는 반드시 이 과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노래의 가장 잘 들리는 부분은 특히 강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하루 일과 중 80퍼센트는 노이즈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듣는 새소리, 문 여닫는 소리,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 사람 소리, 바람소리 등 거의 전 일과가 어떤 종류의 소리와 맞닿아 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주변의 소리를 인식하며 잔다. 새벽녘 잠에서 깼을 때의 적막이나, 소리가 완벽히 차단된 녹음실에 들어가면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다. 사실 노래도 그런 노이즈 중 하나다. 이 수많은 노이즈 중 특정 주파수가 내 가슴을 울릴 때 우리는 그제야 그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게 된다. 어느 포인트에 매력을 느꼈는지를. 목소리가 좋았든 도입부가 좋았든, 아니면 클라이맥스가 좋았든 여하튼 어느 부분이 마음에 와닿아 찾아 듣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그 노래 전체나 그 사람의 모든 노래가 좋아지게 된다. 이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작곡가의 몫이고 역량인데 그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세상에 없던 멜로디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여름 발표한 〈모래내 종점〉은 처음 시를 보았을 때 “미끄러운 세상살이”와 “모래내 종점”, 딱 두 구절이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이상하게 종점인데도 어감이 따뜻했고 종점이어서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일주일여 끙끙거린 끝에 멜로디를 완성하고 얼마나 좋았던지 이 노래는 어느 음반에 실리든 타이틀 곡으로 삼으리라 마음먹었고, 8년 만에 이루어졌다. 18곡이 실린 그 음반에서 이 노래가 가장 좋다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세상은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누구에게든지 미끄러운 세상이긴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생(生)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이 곡은 공감대가 두툼할 터였다. 내가 느낀 ‘미끄러운 세상살이’가 남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공명된다면 나는 성공한 셈이다. 〈청산도 앞바다〉에서는 “더 늦기 전에 우리 그만”이라는 구절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원래 제목은 「그대에게」이고, 더 늦기 전에 다 내려놓고 같이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자는 내용의 시이다. 그런 삶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인가. 사실 내 꿈도 내 고향 서천으로 가 바다가 보이는 다사리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작곡이 더 용이해 보이는 시가 있음에도 굳이 이 시를 택해 작곡한 이유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가 길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연으로 가 살 생각을 하면 얼마나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신이 날까. 구구절절 화자의 마음이 와 닿지만 노래의 호흡이 있으니 다문다문 발췌해서 곡을 썼다. 산문적인 긴 내용은 노랫말로는 지루할 수 있기도 하고, 또 그편이 화자의 마음을 더 전달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시의 전문을 먼저 소개한다.

  

   그대에게

                 유은희

 

​   더 늦기 전에 우리 그만 섬으로 내려가요

   시집과 레코드판과 턴테이블로 방 한 칸 들여요

   나는 창틀에서 물결 한 장 뽑아내 식탁보를 깔게요

   돌미역에 오이랑 풋고추 숭숭 썰어 냉국을 만들게요

   금방 따 온 굴로 새콤한 초무침 할게요

   그대가 낚아 올린 각시볼락은 붉은 양념 발라 쪄 낼게요

   다정큼나무 울타리 삼아 이른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요

   내 서투른 젓가락질로 먼 파도 소리 한 점 떼어 그대 수저에 올릴게요

   누룻누릇해진 눌은밥까지 노을에 다 불려 먹어요

   돌확의 초저녁달 휘휘 풀어 수저 두 벌 담가두고 우리 나가요

   칠게랑 참고둥이랑 보리새우랑 갯지렁이랑 바지락이랑 가리맛이랑 소라가

   구멍 집으로 잘 찾아들었는지 손전등으로 들여다봐요

   한 눈 빠끔 뜨고 내다보는 개펄의 창문을 꼭 닫아줘요​

 

   밤새 어린 별들의 미소를 아득히 지켜봐요​

 

   통통배가 몇 차례 창문을 지나가고 먼 섬이 밀려와 코앞에 닿기 전에

   늦잠에서 부스스 일어날거예요

   낚싯대 드리우고 앉은 그대를 못 본 척 소리소리 불러댈 거예요

  

  노랫말은 이렇다.

  

   1.

   더 늦기 전에 우리 그만 청산도 앞바다로 가요

   시집과 라디오와 사랑을 들고 함께 떠나요

   돌미역이랑 풋고추랑 싱싱한 굴로 밥을 짓고

   이른 저녁을 먹고 저 푸른 바다로 함께 걸어요

 

   칠게랑 참고둥이 바지락이 사는 해변을 지나

   쏟아져 내릴 듯 밤새 어린 별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그곳으로

 

   더 늦기 전에 우리 그만

   더 늦기 전에 우리 이제

   청산도 앞바다로 사랑을 들고 함께 떠나요

 

   2.

   다정큼나무 울타리로 먼 파도 소리 들려오고

   급할 것 하나 없는 수평선으로 노을은 지고

   통통배가 지나가고 짠 바닷바람 불어와도

   그대와 함께라면 더 바랄 것 없는 그곳으로

 

   칠게랑 참고둥이 바지락이 사는 해변을 지나

   쏟아져 내릴 듯 밤새 어린 별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그곳으로

 

   더 늦기 전에 우리 그만

   더 늦기 전에 우리 이제

   청산도 앞바다로 사랑을 들고 함께 떠나요

  

  시에서는 ‘그대’와 함께 떠나는 설렘이 포인트라면 노래에서는 설렘과 더불어 ‘더 늦기 전에’에 살짝 방점을 얹었다. 마음은 가득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기에 노래에서 만이라도 그런 마음들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살기 위해 사는 서울살이 이십 년에 지친 나 역시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틈만 나면 고향 생각이 나고 그 땅 냄새가 맡고 싶어 자주 그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떻든 이 시를 통해 내가 위안을 받았고 또 노래로 작곡해 음반으로 발표했으니 이런 지친 마음들에 잠시나마 위로가 되는 노래였으면 좋겠다.

 

  많은 시인들이 궁금해 하며 물어 보기도 한다. 어떤 시가 노래로 작곡하기 좋은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이다. 여러 말들이 있겠지만 답은 아주 명료하다. 좋은 시를 열심히 쓰시면 된다. 그리고도 노래로 꼭 만들고 싶은 시는 정식으로 작곡을 의뢰하시면 된다. 몸속에 음악성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노래처럼 들리겠지만 그러기가 어디 쉬운가. 흔히 시노래를 얘기할 때 소월의 예를 많이 든다. 그런데 짐작건대 소월은 노래를 했어도 잘할 사람이다. 자기 몸 안에 가락이 있지 않고야 저렇게 시가 출렁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생전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고, 그가 길어낸 통찰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시의 특징은 짧고 간결하며 민요적인 데다 예삿말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유종호 평론가는 그의 저서 『시란 무엇인가』(281 - 284p.)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터주시인 소월은 나랏말의 기층어휘로 시를 썼다. 가령 〈산유화〉나 〈초혼〉이라는 시 표제는 반드시 기층어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 본문은 기초 단어 몇백 개 안에 들어갈 정도의 기층어휘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기층어휘는 정서적 충전에 있어서 강력하다. 개인사의 원시시대를 이루고 있는 유아기로부터 익혀온 말들이어서 삶이 주는 최초의 충격적인 감정경험과 진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또 기억의 가장 오래된 부분과 맞닿아 있어 오래된 것 특유의 호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뒷날의 교양 체험 과정에서 익히게 된 상층어휘는 이에 반해서 정서적 충전력이 허약하다. 개인사 속에서의 그 역사도 짧거니와 전인적 체험과는 거리가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기층어휘는 이를테면 무의식의 언어로서 우리의 감정과 의식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조정하고 지배한다. 그것은 존재의 깊이와 닿아 있는 말들이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ㅡ 「산유화」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ㅡ 「초혼」

 

  인용된 시행에 동원된 낱말은 거의 모두 기본단어 5백 안에 들어 있는 말들이다. 예사로우면서도 간결한 이러한 구절의 각별한 호소력은 그 운율적 호음조(好音調)와 함께 기층어휘 특유의 정서적 충전력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구비문학의 청각적 전통에 대한 소월 시의 충실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ㅡ 「만리성」 전문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 집 가문에

   시집가서 사느냐

 

   두루두루 살펴도

   금강 단발령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하라우

ㅡ 「팔베개 노래」

 

  이러한 짧은 시행의 작품에서 우리는 간결하면서 막힘없는 유창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대로 우리 민요의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항전애창(巷傳哀唱)」이란 큰 제목 아래 포함시켜 틈틈이 발표했던 작품들 속에서 전래적 구비문학에 대한 청각적 충실이 소월 시의 기초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층언어’와 ‘청각적 충실’이 소월 시의 근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구비문학의 청각적 충실이 시대의 소산은 아닌 듯하다. 민요가 지금보다는 승했을 그 시대에도 전혀 다른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기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해 보인다.

  

  뚜렷한 운문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상 음수율에 기초한 음률성이 시의 특징이 되어 있다시피 한 우리 문학에서 시와 산문의 구분은 대체로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다. 소재와 그 처리에 있어서의 특정 경향, 비교적 짤막하게 압축된 간결성, 또 적절한 행갈이에 의해서 시로 처리하고 또 그렇게 인지한다. 어느 나라 문학에서나 시도 관습의 하나요 또 제도이다. 그렇지만 운문 개념의 불확정성은 우리의 시에 대체로 산문시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음률성을 지향한 김소월과 터놓고 산문시를 지향한 한용운이 1920년대 초의 우리 시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후 현대시는 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주저하고 선택하고 절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음률성을 지향할 때 말의 되풀이와 함께 밀도가 엷어지는 경향이 있고 터놓고 산문시를 지향할 때 깊이를 얻는 대신 시 고유의 음률성은 소홀히 되는 것이다. 뜻과 깊이를 지향할 때 시는 노래말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241 - 242p.)

  

  음률성을 지향할 때 밀도가 엷어지고 산문시를 지향할 때 깊이를 얻는 대신 고유의 음률성은 홀대받게 되니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둘을 잡으려다 시도 산문도 안 되고 운율도 잃는 어정쩡한 경계에 서느니 농담 아니라 그냥 열심히 쓰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도 싶다. 우리 시가 왜 점점 노래에서 멀어져 가는지에 대해서도 짚은 맥락이 있어 옮긴다.

  

  서정시가 소리와 뜻 사이의 망설임이라고 말한 시인의 말은 골똘히 음미되어야 한다. 최근의 우리 시는 소리와 음률성을 멀리하면서 뜻과 전언에만 골똘해 왔다. 그 결과 산문으로의 경사는 더욱 심해지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한 〈시적인 것〉의 조성은 불필요한 시적 소음을 낳고 있다. 그리하여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는 한길을 버리고 변두리의 소로길로의 잠행이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이와 함께 부끄럼성을 잃어버린 노출증이나 비행촉진적인 비속 언어가 정직이라는 이름으로 숭상되는 경향까지 보여주고 있다. 욕설이나 비속어의 표출에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해방적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두상황 아닌 기록의 맥락에서 비속어를 남발하는 것은 우선 발설자 자신의 뒷날의 자괴감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본래 시인을 낳게 한 것은 엘뤼아르의 시구를 빌리면 〈지속에 대한 다부진 욕망〉이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251-252p.)

  

  사실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는 한길을 버리고”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시를 쓰는 목적은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는 것이고 그를 이루는 방법은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 시를 풀어 나가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고된 고도의 예술인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누구나 좋은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처럼 나 또한 내 작업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구다. 이쯤이면 어떤 시가 노래가 되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이것을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하고 노출증으로, 비속어로 혹은 온갖 포즈만 가득한 시들이 난무하니 시를 들여다보는 안목이 오히려 더 필요한 세상처럼 보인다. 시적인 조류는 모르겠고 나는 좋은 시를 찾아서 좋은 노래를 쓰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목표고 갈 길이라 여긴다. 이미 나는 시에 빚진 자다.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을 알고 난 후부터 눈은 언제나 내게 “복된 눈”이다.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국밥을 앞에 놓고는 ‘짠 눈물’이 떠오르고, 국수를 보면 소 팔고 돌아오는 이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면 먼지 이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인생을 떠올리기도 한다.

  

   젖은 신발

                 이정록

 

​   아이들 운동화는

   대문 옆 담장 위에 말려야지.

   우리 집에 막 발을 내딛는

   첫 햇살로 말려야지.

 

   어른들 신발은 지붕에 올려놔야지.

   개가 물어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높고 험한 데로 밥벌이하러 나가야 하니까.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셨지.

   북망산천 가까운 사랑방 툇마루에서

   당신은, 당신 흰 고무신을 말리셨지.

 

   노을빛에 말리셨지.

   어둔 저승길, 미리 넘어져보는 거야.

   달빛에 엎어놓으셨지.

   저물어도 거둬들이지 않으셨지.

 

   마지막은 다 밤길이야.

   젖은 신발이 고꾸라져 있었지.

  

  이런 시를 만난 뒤로는 아이들 물건도 함부로 아무데나 던져놓지 못한다. 하기는, 우리 어머니도 빨랫줄에 빨래조차 함부로 막 걸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밥을 푸면서도 늘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나는 보고 자랐다. 첫 음반을 낸 이후 숱한 노래를 하면서도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의 길에 대한 확신이 어쩌면 없었다. 이 고달픈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고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1집 음반 타이틀 곡인 〈길〉이 지금도 그런 엉성하고 방황에 찬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시를 만나고 난 뒤 또 그 시에 진심인 몇몇 시인들을 만나고 난 뒤 나는 그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분명 시에 빚진 자다. 길이 남을 시들에! 

 

 

 

 

 

- 그동안 "신재창의 [새로운 길]"을 애독해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신재창.jpg

신재창  l 

작곡가, 가수. 〈국어 교과서 아름다운 시노래 음반1〉, ‘노래로 만나는 시’ 연작인 〈눈 온 아침〉 등 6장의 음반, ‘삶의 시, 삶의 노래’ 연작인 〈김포행 막차〉 〈모래내 종점〉, 자작곡 음반 〈길〉, 시노래 베스트 음반 〈조곤조곤 시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매월 시인 초청 〈수요시콘서트〉 등을 열어오고 있으며,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노래 동인 ‘시노래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다.

 

 

 

—

202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