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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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여부 | 연재중 | ||
오선지 위의 시어들 19
ㅡ 안도현 시 「가을 엽서」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선함을 믿으며 살았다. 봄볕에 그을리면서도 파릇한 새싹이 가르쳐 주었다. 여린 싹은 몸뚱이가 채 올라오기도 전부터 앉은 벌레에 살점을 내주고도 묵묵히 뿌리를 내려주었다. 나뭇잎 위에서 갓 태어난 애벌레의 몸짓도 애잔했다. 내장을 내보일 만큼 투명해서 빗줄기에라도 베이면 금세 핏물이 배일 듯한데도 흔들리는 이파리 위에서 꿈틀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알에서 갓 깨어나 두리번거리며 어미를 향해 주둥이를 내미는 병아리를 본 적이 있다. 첫 생명에게 나는 두려움이었겠으나 어린아이인 나에게는 설렘이었다. 꼬물거리다 오물거리다 옹알대는 첫아기를 품에 안으며 아빠라고 불러보렴, 속으로만 말하다가 울컥해 버렸던 그날의 떨림을 새기면서는 더욱 세상은 선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신봉하게 되었다. 모든 계절은 선했다. 계절을 상징하는 낱말에 들어가는 “첫” 혹은 “새”라는 음절이 그렇게 만들었다. 돋아날 새싹과 그해 첫 여름, 첫 단풍, 첫서리, 그리고 첫눈. 지나온 계절은 질곡이었을지라도 맞이하는 계절의 “첫”이란 음절로 인해 살아온 날도 살아갈 날도 모두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설령 가슴을 헤집고 칼날처럼 스며드는 그리움일지라도.
그립다 오늘은 이 말이 내가 걸었던 발자국 수보다 더 많이 입가에 맴돌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너를 잊은 적은 없다
첫눈 내린다는 누군가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눈발은 보이지 않고 그리움만 발끝에서 툭툭 채이는 날
그립다 오늘은 이 말이 내가 걸었던 발자국 수보다 더 많이 입가에 맴돌았다
- 졸시 「그리움과 연애하다」 중에서
나의 선함은 묵묵하고 애잔하며 꿈틀거리고 울컥하는 첫 마음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선한가. 고가의 기타 하나 선물 받았다고 그새를 못 참고 자랑하는 나는 선한가. 곤궁한 이의 눈물을 보고도 빈 호주머니만 탓하는 나는 선한가. 무대 위에 앉아 빈자리를 보며 공허해하는 나는 선한가. “내가 뭐라고”보다는 “내가 누군데”하며 자존을 지키려는 나는 선한가. 인류가 살아온 지구 위에서의 역사 30여만 년 동안 몇몇의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이외에 인류는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다고 믿는 나는 선한가. 떨어지는 낙엽의 숲 한가운데 앉아 외로워하지 못하는 나는 선한가. 황홀한 노을의 복판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대못처럼 새겨넣지 못하는 나는 선한가. 보름달이 저리 환한데도 전화 한 통 하지 못하는 나는 선한가.
그리고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지는 낙엽에게 물어보라는 시인의 말을 곱씹으면서도 무감하게 눈감는 나는 선한가. 그럼에도,
나의 선함은 중력의 깊이에 가까운 곳에서 나온다는 사실 또한 믿는다. 내가 믿는 선의 전부는 지구 중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낮아지라고 작아지고 느려지고 약해지라고 그래서 더 굳어지라고 끌어당기는 중력에 순응하는 모든 것들의 호흡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연민하고 슬퍼하고 그로 인해 더 아파해야만 가능한 일들.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 선함의 기준이 된다면 그렇게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시인의 구절을 통해 고백하는 것이다. “그대는 슬픔에서 왔으니 슬픔으로 가는 길목에서 더 이상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조용히 속삭이는 낙엽의 귓속말을 새겨 넣기 좋은 저녁이 오면 슬픔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선이다, 다짐해 보는 것이다. 하여 떨어지는 것, 이별하는 것, 사라지는 것들과 그것을 연민하는 모든 것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아 보는 것이다. 지금은 그러한 사상을 허용해야 마땅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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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oN31CQpqJMM?si=pik3Jnb5hD-mrye1


이지상 ■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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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호(VOL.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