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오선지 위의 시어들
 
오선지 위의 시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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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지상 
완결여부 연재중 

 

 

 

오선지 위의 시어들 9

— 이형기 시 「낙화」 :

"지금은 가야 할 때 이제는 떠나야 할 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차선 도로가 보이는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글을 쓴다. 신호등의 멈춤 신호가 선명하고 그 앞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항시 멈춤으로 서 있다. 신호등 불빛이 푸른색으로 바뀌었지만 건너는 사람은 없다.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는 제각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을 배회하며 쓸쓸하게 걷고 있다. 날은 어둑하고 오늘도 일몰은 황홀할 예정이다. 산을 깎아 지은 아파트 뒤편으로 노을이 물들면 그 노을 속 깊이 누구라도 그리운 이의 이름을 대못처럼 새겨 내 심장으로 찔러 넣는 연습을 오랫동안 해왔다. 아릿하게 저며오는 심장의 통증을 사랑한다. 나의 피가 붉어진 것도 순전히 오랜 수련의 결과일 거라고 여겨왔다. 세상은 이별 중이다. 오늘 내가 스쳤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은 대부분 “안녕”이었다. 방금은 나뭇잎 하나가 떨어졌다. 지난날 헤어졌던 이에게 “어디로 가십니까?”를 묻지 않았던 것처럼 낙엽에게도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았다. 나뭇잎은 쉽사리 낙하하지 않았다.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의 리어카 위를 몇 차례 순회했고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날더니 임대 문의가 써붙여진 가게 앞에 앉았다가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일으킨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늘 나는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고 누군가를 기다린 적도 없다. 오늘 나는 이별하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안녕.” 오늘 내가 누군가를 향해 내뱉은 첫 번째 이별의 말이었다. 이제는 노을에게 말을 걸어야 할 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첫마디는 늘 당혹스럽다. 이전에 한번은 노을이 먼저 말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왜 하루의 이별 통지를 자신이 담당하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어려운 일을 매일 해야 하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도 했었다. 노을의 얼굴이 항상 붉은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래서 언제나 황홀함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몇 해 전 붉은 가을 단풍이 온 산을 덮었던 저녁의 가을 숲에서였다.

   “그리움의 깊이를 모른 채 지나가는 날들이 있어. 그런 날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만으로 내 그리움의 깊이를 측정해. 그래서 하루 중에 오직 행복한 시간일 때가 많아”. 무심코 노을에게 건넨 약속 같은 말이었는데 지금도 유효한지를 자문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날은 저물었고 가을 숲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다. 후줄근하게 젖은 어깨 위로 단풍잎 하나 날아들었을 때는 더 이상 이별을 서러워하지 않기로 했었다.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은 없으므로. 쓸쓸하고 외로운 나를 위해 이 가을을 대신 울어주는 벗들의 상기된 얼굴이 있기에.

 

   네가 마음을 닫고 가을 숲으로 가는 동안

   나의 생살보다 더 붉은 너의 살갗 위로

   소금을 흩뿌리듯 가을비 떨어졌으나

   아프단 말도 없이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조용히 눈 감고 자꾸 깊어지기만 하는

   조용히 눈 감고 자꾸 멀어지기만 하는 이별

- 〈가을 단풍〉, 《그리움과 연애하다》(이지상 5집) 중

 

   내 고향 포천의 금동리에 사는 천년 은행나무를 찾아가기로 한다. 이맘때쯤의 연례행사다. 그 나무 아래서, 더 정확히 말하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금풍(金風)을 만나 떼 지어 비상하는 가을 하늘 아래서 “낙화”를 암송해야 한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 지던 날”를 외며 가을과의 결별을 황홀함으로 물들여야 한다. 이별을 그리움으로 전화(轉化)시킬 능력이 있다는 게 축복이란 걸 시인에게 배웠으므로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말은 하지 못해도 내년에 또 이 가을에 만나자고 약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년을 산 나무 뿌리의 길이를 생각하며 나무가 또 다시 일 년을 기약하는 나무가 주는 위로의 말도 새겨두어야 한다. “천천히 가라. 어차피 먼길이다.”

 

   “낙화”를 사모 하게된 건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대학 신입생 때 문학청년이었던 동기생들이 주로 읊었던 구절이 이 시의 첫 구절이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독 침을 튀기며 시인을 감탄해 마지않았던 친구가 있었고 그의 어투와 분위기가 나를 물들게 했었다. 고갈비가 500원 하던 시절의 막걸리 집에서였다. 작곡한 모든 노래가 그렇듯 이 시에 선율을 얹은 건 참 잘한 일이 되었다. 밀레니엄의 새 시대라고 들떠있던 시기에 만들었고 두 해쯤 뒤에 녹음을 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 절절한 목소리를 가진 후배 가수 김가영 씨와 듀엣을 했다. 혼자의 무대가 많았으니 이 노래 또한 혼자 부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엔 미처 물들지 못한 천년 은행나무를 만나러 갔던 버스 안에서 이 시를 암송한 적이 있었다. “나의 사랑 나의 결별…… 내 영혼의 슬픈 눈”의 대목에선 가슴이 울컥거렸었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가을을 맞이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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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XHMFXdnxxQ?si=b_M9rtIkZlFhci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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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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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VOL.121)